영화 <범죄와의 전쟁>

영화 <범죄와의 전쟁> ⓒ 팔레트픽쳐스

"살아있네."

저 남자는 뭐가 살아있다고 저리 능글맞게 웃을까? 다방 여성의 풍만한 가슴이? 그가 마시는 시원한 식혜의 밥알이? 그게 아니다. 자기 마음대로 여자 가슴을 만져도 괜찮고, 자신에게 조폭들이 90도로 인사하는 상황이 '살아'있을 뿐이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은 절로 "살아있네"를 되뇌게 하는 '힘'에 관한 영화다. 여기까지라면 기존 조폭영화의 스펙트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은 건달과 민간인 사이의 '반달' 최익현(최민식)이다. 그가 세 자녀를 둔 아버지란 사실은 더 무겁게 다가온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우리는 자꾸 이 사람을 각자의 아버지에 빗대어 보게 된다. '반달'로 살아야했던 아버지 말이다.

그(아버지)는 왜 그렇게 살아야만 했을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조폭은 자기네 수가 많거나 상대가 무방비 상태일 때, 그리고 자신에게 무기가 있을 때 상대를 친다. 무자비해 보여도 행동수칙이 있는 셈이다. 태권도 7단 김서방(마동석)이 뒤통수를 보여야 박창우(김성균)가 맥주병으로 한 대 갈기고 "X도 아닌 게"라고 허세 떨 수 있다. 한 치도 이 룰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그들은 참으로 '모범적'이다.

단순한 폭력의 룰만 있는, 딱 그 단계였던 조폭세계는 '반달' 최익현의 인맥을 만나 한 단계 진화한다. 너무 배신을 많이 당해서 사람을 잘 안 믿는다던 최형배(하정우). 그는 가족밖에는 믿을 게 없다면서 최익현에게 "사랑합니다"라며 그 진화를 인정한다.

보스 최형배에게 만족할 만한 대답을 이끌어낸 최익현은 경주 최씨 종친회까지 장악한다. 최익현은 자기를 기소한 검사 앞에서는 바짝 엎드린다. 하지만 경주 최씨 부장검사 앞에서는 첫 대면부터 말을 탁 놓고 사실상 검찰수사를 조정한다. 그렇게 그는 힘 있는 경주 최씨들을 주무른다. 인맥으로 최익현은 갑보다 강한 을이다. 

'인맥' 하나로 사는 최익현... 움츠러 드는 사람들

 <범죄와의 전쟁>의 깡패 최형배(하정우 분)와 '청탁의 달인' 반달 최익현(최민식).

<범죄와의 전쟁>의 깡패 최형배(하정우 분)와 '청탁의 달인' 반달 최익현(최민식). ⓒ 팔레트픽쳐스



최익현은 정말 '인맥' 하나로 산다. 그는 자신이 들고 설치는 '빈총'처럼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으면서 떵떵거린다. 상대가 보기에 총은 총알이 장전돼 검지 관절만 움직이면 발사될 것 같다. 그래서 그 앞에서 사람들은 움츠러든다. 

최익현은 김서방에게 "총알 구할 데 있느냐"고 묻지만 실은 그에게 이미 총알은 있다. 바로 자식들이 어디 가서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게 해놓는 것. 그렇게 하려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돈을 왕창 벌 것. 이 모든 게 가족을 위한 것이라는 변명이 그가 가진 진짜 총알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는 조폭과 선을 분명히 긋는다. 건달은 싸워야할 때 싸우지만, '반달'은 싸워야할 때 사람(인맥)을 찾는다. 그가 찾은 힘 있는 최씨들은 돈을 받고 최익현의 청탁을 들어준다. 그리고 그들은 최익현의 돈맛에 점점 길들여진다.

그 짓으로 최익현의 가족은 큰집을 마련하고, 그의 아들은 영어를 배우며 '경쟁력'을 기른다. 결국 그 아들은 티 하나 없는 맑고 깨끗한 모습의 검사가 된다. 능글맞고 산전수전 다 겪은 아버지 최익현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검사가 된 아들이 이 대단한(?) 아버지에게 하는 말은 고작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이다. 검사만 되게 해주면, 부자만 되게 해주면 아버지가 밖에서 뭘 하든 자식은 크게 관심 두지 않는다. 어떤 '호로자식'이 최익현의 무덤에 침을 뱉겠는가?

야당 의원 후보였던 최익현의 아버지는 모난 놈이 정 맞는다는 증거다. 최익현은 "(아버지 때문에) 인생 꼬있다" "아버지 때문에 드러분 바닥에서 개고생하고 있는 거 아이가"라고 말한다. 그는 세상 때문에 자신이 '나쁜놈'이 되었다고 믿는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 한 장면.

영화 <범죄와의 전쟁> 한 장면. ⓒ 팔레트픽쳐스


그의 변명은 이어진다. 세관공무원일 때 그는 "XX, 나만 받아먹었냐고?!"라며 억울해 한다. 그의 변명대로라면, 그는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시대에 맞춰 살아가다가 '나쁜놈'이 됐을 뿐이다. "넌 정체가 뭐야"라는 검사의 질문에 최익현은 뻔뻔하게도 "그냥 보통 사람이지예"라고 답할 정도다.

"노무현 때의 변화... 그러나 다시 원점"

영화를 만든 윤종빈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사람이 시대에 따라 변해 가는지 아니면,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건지 묻고 싶었다"고 했다. 또 윤 감독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권이 탄생할 때 우리 세대는 확실히 시대가 변화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더라. 왜 다시 아버지 세대들의 논리로 역행했는지 이 시대에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자 이젠, 우리가 답하거나 최소한 고민을 해야 할 차례다. 왜 우린 "아버지 세대들의 논리로 역행"했는지 말이다. <범죄와의 전쟁>은 부제대로 '나쁜놈들의 전성시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최익현을 통해 그 시대에 적응했거나 살아남은 '아버지'를 그려낸다.

그 자식들인 우리들은 시대가 폭압적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떠밀리듯 '나쁜놈'이 되었다고 변명해 줄 수 있을까? 혹시 우리는 아버지에게 연민 이상의 감정을 갖게 된 건 아닐까?

주인공 최익현의 삶은 확실히 조폭과 민간인 사이의 '반달'로 점철돼 있다. 그의 삶은 우리 근대화 역사와 기묘하게 닮은 구석이 많다. 이승만은 사실상 관치깡패를 부렸고 박정희는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위해 깡패를 소탕했다. 삼청교육대, 범죄와의 전쟁. 전두환-노태우 정부도 같은 수를 썼다. 권력을 가진 '진짜 나쁜놈'은, 거리의 '나쁜놈'을 이용해 착해 보이거나 보통사람처럼 보이고자 했다.

그리고 이들은 "굶지 않게 해주겠다" "나쁜놈으로부터(북한) 보호해주겠다" "잘 살게 해주겠다"는 논리로 자신들의 악행을 감추거나 조폭을 능가하는 폭력을 은폐했다. 적지 않은 사람은 이 말을 믿거나, 환호했다. 그리고 "잘 살게만 해주면..."이라며 이들의 악행에 슬쩍 눈을 감아버렸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 한 장면.

영화 <범죄와의 전쟁> 한 장면. ⓒ 팔레트픽쳐스


이명박 대통령, 한미FTA 이행법안 서명 이명박 대통령이 29일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통과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행을 위한 14개 부수법안에 서명하고 있다. 뒷줄 오른쪽부터 최금락 홍보수석, 천영우 외교안보수석, 김동수 공정위원장, 백용호 정책실장, 임채민 복지부장관, 서규용 농림부 장관,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 김성환 외교부장관, 박재완 기재부 장관, 권재진 법무부 장관, 홍석우 지경부장관, 임태희 대통령실장,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김효재 정무수석, 김대기 경제수석.

▲ 이명박 대통령, 한미FTA 이행법안 서명 이명박 대통령이 11월 29일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통과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행을 위한 14개 부수법안에 서명하고 있다. 힘으로 새 업소를 접수하려 길을 나서는 '조폭' 모습을 담은 위 사진과 이 사진의 느낌은 기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일방통행식 힘으로 많은 일을 처리했다. ⓒ 연합뉴스


안타깝게도 이는 영화의 배경이 된 1980년대까지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언젠가부터 우린 "아버지 세대의 논리"로 역행했고, 이명박을 만나 그 퇴행은 절정을 이뤘다. 우린 MB에게서 숱한 도덕적 결함을 발견했고, 여러 의혹을 가졌음에도 "부자 만들어주겠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그에게 환호를 보냈다.

고려대·소망교회·영남... MB에게서 '아버지 신화'의 끝을 봤다

MB를 '반달'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최익현에게 밑천은 '경주 최씨' 하나지만 MB의 밑천은 세 가지나 된다. 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더 진화한 아버지의 등장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아버지가 우리를 잘 살게 해줄 거야"라는 믿음을 보내봐야 MB와 우리는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남이다. '고소영'과 부자가 아닌 이상 우리에게 떨어질 '떡고물'은 없다는 걸, 우린 지난 4년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MB역시 최익현처럼 빈총을 들고 폼만 잡은 거였고, 우리 모두는 그 빈총에 휘둘렸다. 우리는 MB에게서 아버지 신화의 끝을 봤다.

그래서 마침내 검사가 된 '반달' 최익현 아들의 말끔한 얼굴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 '착한 아들'인 그의 얼굴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아버지의 나쁜 짓 같은 거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 어쨌거나 나는 성공했다."

잘 살게만 해주면 MB가 과거에 무얼 했든 무관심하던 우리 역시 참으로 '착한 자식'이었다. 우리는 어쩌다가 빈총만 남은 아버지를 못 잊어 시대를 바꿀 기회를 스스로 차 버렸을까. 감독의 말대로, 왜 아버지의 끊어진 필름을 버리지 못하고, 기어코 그걸 이어 붙여 과거로 돌아간 것일까.

다시 찾아온 선거 시즌, 다시 세상은 "내가 부자 만들어 주겠다'는 빈총 든 '아버지'들이 넘친다. 우린 또 착한 자식으로 남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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