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 조선은 자전거의 나라였다. 자전거는 자동차 등 다른 교통수단을 압도했을 뿐만 아니라 통근, 통학, 업무, 레저 등 여러 분야에 두루두루 쓰였다. 그 시대 자전거문화는 어땠을까. 역사는 반복된다는데 앞으로 다가올 자전거 시대에 비슷한 모습으로 재현되진 않을까. 그 시절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본다. - 기자 말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

 <살인의 추억> 포스터

<살인의 추억> 포스터 ⓒ 싸이더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에 나온 문구다. 이 문구엔 살인범을 잡고 싶은 형사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다.

비슷한 느낌을 한일 스포츠경기가 열릴 때마다 받게 된다. 경기에 나서는 감독이나 선수들은 "일본전만은 반드시 이기고 싶다"고 힘줘 말한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 독기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일본이 힘으로 조선을 집어삼키고 식민지로 만든 게 뿌리다. 당시 일본은 골리앗이었고, 조선은 다윗이었다. 옛 역사에서 다윗은 골리앗을 이기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작은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이기길 바라는 것은 그만큼 다윗이 이길 가능성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비록 가능성이 적더라도 '0'은 아니다. 관건은 '0'이라는 믿음을 깰 수 있는 존재, 바로 '영웅'이다. 사람들은 영웅을 찾고 영웅을 만든다. 영웅을 통해 '뒤집기 한 판'의 가능성을 꿈꾼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킨 그 때, 조선인들은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조선은 일본을 이길 수 없다 여긴다. 가능성 '0'의 벽은 높은 듯 보였으나 착각이었다. 조선인은 일본인을 이길 수 있었다.

영웅은 자전거 쪽에서 나왔다. 바로 엄복동이었다. 191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치열하게 이어진 자전거 한일전. 조선 선수들은 다윗이었고, 일본 선수들은 골리앗이었다. 엄복동은 다윗 부대의 선봉장. 골리앗은 다윗에게 일격을 당했지만 일본 관중들은 '어쩌다 한 번'이라고 생각했다. 오해였다. 조선 선수는 연이어 승전보를 날렸고, 일본 선수나 관중들은 낯빛이 바뀌었다. 자전거 경기장이 뜨겁게 달궈진다.

일본만큼은 반드시 이기고 싶은 스포츠 한일전 역사의 첫머리에 자전거 경기가 놓여 있다. 그때도 지금처럼 뜨거웠다. 어쩌면 더욱 더.

경성 인구 25만 가운데 10만... 그들은 왜 모였을까

 한일전 스포츠역사는 뿌리가 깊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집어삼키면서 시작된 감정이다. 비록 나라는 잃었지만 경기장에서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던 악다구니가 놀라운 승리로 나타났을 것이다. 영화 <삼일독립운동>(1959) 중

한일전 스포츠역사는 뿌리가 깊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집어삼키면서 시작된 감정이다. 비록 나라는 잃었지만 경기장에서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던 악다구니가 놀라운 승리로 나타났을 것이다. 영화 <삼일독립운동>(1959) 중 ⓒ 한양영화사


1913년 4월 13일. 용산연병장에서 자전거 경기가 열린다. 관중 수는 10만 명이 넘었다. 1910년 당시 경성 인구가 25만 명 정도였으니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다 온 셈이었다.

당시 자전거경기는 1류, 2류, 3류 경기(때로는 4류까지)로 등급을 나눠 치러졌다. 날고 긴다는 선수들만 참가하는 경기가 1류 경기였고, 당연히 1류 경기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1류 경주엔 일본인 4명과 조선인 2명이 참가했다. 조선인은 엄복동과 황수복이었다. 우승은 엄복동이 차지했다.

다시 우승기 쟁탈 경주가 벌어졌다. 최고의 선수들만 참가하는 이날 경기의 하이라이트. 일본인 8명에 한국인 1명. 한국인은 바로 엄복동이었다. 1류 경주에서 쓴 맛을 본 일본인 선수들은 패배를 설욕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숫자상 8대 1로 절대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본 선수들은 '이번에는 이기겠지'라고 생각했겠지만 결승선 직전까지 엄복동은 앞서 달렸다. 관중들은 "이번에도"라며 기대를 품었겠지만, 막판 일본선수 자전거 바퀴에 치어 엄복동은 넘어지고 만다.

1913년 4월 27일 매일신보가 주최한 자전차대경주회에서도 엄복동과 일본 선수는 1류 경주에서 만난다. 역시 1등은 엄복동, 2, 3등은 일본인 선수 차지였다.

엄복동은 일본 선수를 이기고 싶었고, 일본 선수는 얕잡아 보는 조선 선수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엄복동과 일본선수 사이의 경쟁 심리는 곧 조선과 일본 관중의 마음이기도 했다. '너한테만은 지고 싶지 않다'는 욕망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였다.

10바퀴 도는 동안 7명 제친 엄복동

1920년 마침내 사단이 벌어진다. 무대는 1920년 경복궁 안 마당에서 열린 경성상공민연합대운동회. 10만 인파가 몰려 흥행은 성공이었다. 예선전에서 황수복이 일본선수 삼하정일(森下正一)과 결승을 다투다 삼하의 자전거에 치여 넘어진다.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황수복과 엄복동은 최종 결승에 올라간다. <매일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우승기 쟁탈전에 나선 선수는 삼하정일과 엄복동, 황수복, 이로마 등 네 명. 일본선수인 삼하와 한국 선수인 엄복동이 우승을 다투는 한일전이었다. 우연인지 고의인지 경기 도중 삼하가 넘어지고 뒤따르던 선수 두 명이 같이 넘어진다. 엄복동만 넘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경기가 진행되면 자연스레 엄복동 우승이었다.

돌발 상황은 경기장 안에서 벌어졌다. 일본인 심판이 갑자기 경기 중단을 명령한 것. 경기 취소와 함께 엄복동의 우승도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일본 선수들에게 견제를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쌓인 게 많은 엄복동이었다. 엄복동은 심판석으로 달려가 우승기를 부러뜨리며 항의했다.

엄복동만 화가 난 건 아니었다. 2등 시민이라 여기던 조선 선수가 번번이 자국 선수를 꺾으니 잔뜩 독이 오른 건 일본 관중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인 관중들이 '이때다'라며 달려들어 엄복동을 때리기 시작한다. 조선인 관중 또한 조선 선수가 맞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만 없었다. 경기장에 뛰어들었다. 집단 난투극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 한 해 전 3월, 전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진 뒤 일본이 유화조치를 취했으나 조선인과 일본인 간 감정은 이렇게 자전거 경기장에서 폭발했다.

조선 대표선수의 앞길을 막은 삼하는 1년 뒤 다시 엄복동과 만난다. 이번 무대는 장충단이었다. 관중은 1만여 명. 300보 주위를 여섯 바퀴 도는 예선에는 60명이 참가한다. 조선인은 50명, 일본인은 10명이었다. 40바퀴를 도는 1류경주에는 모두 8명이 참가한다. 조선인과 일본인 관중은 각각 다른 선수를 응원했다.

1등을 하리라 기대했던 엄복동은 30바퀴를 돌 때 8명 가운데 8등이었다. 꼴등. 조선 관중들 표정에는 '탄식'이, 일본 관중들 표정에는 '거만한 미소'가 서렸을 것이다. 과연 이번에도 엄복동이 삼하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인가.

그때부터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엄복동이 서서히 속도를 올리며 앞선 이들을 따라잡기 시작한다. 40바퀴를 모두 돌았을 때 결과는 1등 엄복동, 2등 삼하, 3등 천길(天吉)순이었다. 대역전극. '역전의 명수'인 엄복동이 화려하게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역전을 노리는 순간, 관중은 외친다... "일어선다!"

엄복동은 심폐기능이 뛰어난 선수였다. 165cm 정도 키에 어깨폭이 넓고 가슴이 유달리 컸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아 폐활량이 매우 좋았다. 무엇보다 집념이 강해 코너를 돌다 넘어지거나 상대선수와 부딪치는 경우에도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1930년대 자전거선수로 활약한 박성렬이 일간지에서 증언한 내용이다.

이런 신체 활동 덕택에 엄복동은 막판에 강했고, 역전승을 자주 일궈냈다. 일단 앞선 상대를 빠른 시간 내에 앞지르자면 폭발적인 힘이 필요했고, 일어서서 페달을 밟으면 순간속도가 빨라진다. 후반부가 되고, 앞선 상대가 있으면 엄복동은 엉덩이를 치켜들고 일어선다. 터보 엔진을 가동한다는 뜻이다. 관객들은 "일어선다, 일어선다"라고 외치며 흥분했다.

앞서나가던 일본선수들은 황당했을 것이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선수가 순식간에 쫓아와 1등을 차지하니 말이다. 처음엔 '어쩌다 한 번' 했겠지만, 매번 그랬다면 일본 선수나 관중이나 분통이 터지지 않았을까.

일본 선수들은 엄복동을 확실히 견제했다. 1922년 4월에 열린 상주 자전거 대회에서 엄복동은 일본 선수에 두 번이나 떠밀려 중상을 입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조선 관중들은 치를 떨었고, 일본 관중들은 음침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평상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괄시하고, 조선인들은 기죽어 지냈겠지만, 엄복동이 나서는 자전거 경기장이라면 달랐다.

'엄복동 우승 못함'이 주요 뉴스로

 일제강점기 장충단공원은 서울에서 가장 넓은 공터였다. 자전거경기를 하기 좋은 이 곳에서 많을 때는 10만 인파가 몰렸다. 사진은 장충단공원에 있는 장충단비.

일제강점기 장충단공원은 서울에서 가장 넓은 공터였다. 자전거경기를 하기 좋은 이 곳에서 많을 때는 10만 인파가 몰렸다. 사진은 장충단공원에 있는 장충단비. ⓒ 김대홍


1923년 5월 6일 다시 한 번 무대가 마련된다. 경성윤업회가 주최한 전선자전거경기대회(全鮮自轉車競技大會) 마지막 날이었다. 장소는 장충단공원. 경성에서 가장 넓은 장소였다. 엄복동이 결승에 올라간 상태였고, 관중 4~5만 명이 모였다. 일본인과 조선인이 섞인 대부대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경관 100여 명이 경기장에 나타난다. 경성 내 경찰관 숫자가 1500명 가량이었으니 꽤 많은 숫자였다. 현장의 묘한 분위기를 경찰 또한 읽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앞선 조치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충돌을 막지 못했다. 경기 도중 한 일본인이 술병을 경기장 내에 던졌고 엄복동은 우승을 하지 못했다. 이번에 분개한 건 조선인이었다. 술병을 던진 일본인을 붙잡고 화풀이를 했다. 결국 서로 돌을 던지며 싸우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폭동이 일어날 뻔한 상황이었다.

경찰이 뛰어들어 싸움을 주동한 손용근(노동자, 당시 24)외에 7명을 구속했다.

일본 선수와 일본 관중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엄복동의 우승 행진은 끊이지 않는다. 1920년대 중반까지 그가 들어 올린 우승트로피는 약 50여 개. 조선 내에서 뿐만 아니라 만주로 건너가 러시아, 만주 선수들과 붙어 이긴 경기도 여기에 포함된다. 오죽하면 '엄복동 우승 못함'이 주요 뉴스로 다뤄졌을까.

문제는 당시 조선 선수들이 심판의 애매한 판정에도 애를 먹었다는 점이다. 심판은 주로 일본인들이 맡았고, 어이없는 판정을 종종 내렸다. 이에 조선선수들이 할 수 있는 조치란 퇴장이었다.

1925년 6월 28~29일 대구에서 전국자전거대회가 열린다. 우승청부사로 일본에서 무등(武藤)이란 선수가 건너온다. 조선 대표는 조씨(조수만으로 추측)였다. 예상대로 조씨와 무등이 선두 다툼을 벌인다. 조선 선수가 앞서는 상황에서 둘이 부딪힐 뻔한 상황이 벌어진다. 조선 선수가 살짝 몸을 틀어 비껴간다. 그대로 골인. 심판은 조선선수가 1등이라고 공포하나 갑자기 취소하고 3등이라고 결과를 고친다. 조선 선수가 일본 선수와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한 자(약 30cm) 가량 선 밖으로 나갔다는 것.

조선선수들은 "말도 안 된다"며 모두 퇴장한다. 심판부장을 맡은 암정(岩井) 대구경찰서장이 3등을 받아들이길 권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조선관중들도 모두 퇴장하며 이날 경기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엄복동의 후예들, 조선 자전거의 전통을 이어가다

 한국선수는 경기장 안에서 수시로 일본선수를 꺾었지만 그 뿐이었다. 경기장 밖으로 나오면 일본은 여전히 조선을 지배했고, 그 강도는 점점 더 세질 뿐이었다. 아무리 경기장 안에서 조선선수가 일본선수를 이긴다 하더라도 그건 막내린 영화처럼 허무한 일이었다. 영화 <승부>(1973) 중.

한국선수는 경기장 안에서 수시로 일본선수를 꺾었지만 그 뿐이었다. 경기장 밖으로 나오면 일본은 여전히 조선을 지배했고, 그 강도는 점점 더 세질 뿐이었다. 아무리 경기장 안에서 조선선수가 일본선수를 이긴다 하더라도 그건 막내린 영화처럼 허무한 일이었다. 영화 <승부>(1973) 중. ⓒ 화천공사


이듬해 엄복동은 은퇴선언을 하고, 같은 시기 자전거 절도혐의로 체포되며 떠밀리듯 무대에서 내려간다. '조선 자전거왕'의 쓸쓸한 퇴장이었다. 왕이 사라졌으니 조선 자전거계는 무주공산이 됐을까? 그렇진 않다. 조선 자전거계는 꽤 내공이 강했다. 엄복동이 후계자로 지명하며 타고 다니던 자전거를 물려준 조수만이 있었고, 한공식이 있었다. 엄귀석 또한 누구와 붙어도 지지 않는 선수였다.

1930년대 말에 이르면 이윤백이라는 또 한 명의 걸출한 자전거 스타가 탄생한다.

1938년 6월 일본에서 열린 제1회 전일본학생자전거선수권대회는 한국 선수들 독무대였다. 500미터, 1000미터, 5000미터, 1만 미터 네 종목을 한국선수들이 싹쓸이했다. 특히 장거리 두 종목을 석권한 이윤백(당시 연희전문학교 재학)은 학생 신기록을 세우며 혜성같이 떠올랐다.

이윤백의 실력이 우연이 아님은 석 달 뒤에 증명된다. 9월에 열린 전일본학생싸이클경기대회에서 다시 학생신기록을 세우며 5000미터와 1만 미터의 최강자 자리를 차지한다.

이윤백을 필두로 한 조선 자전거계는 1939년 7월 30일 내선교환자전거경기대회에서 일본대표와 맞붙어 56대 34로 승리하면서 일본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자전거 한일전은 여전히 양국 국민들을 흥분시키는 좋은 소재였다.

이윤백의 실력은 학생 자전거계에만 갇혀 있기엔 좁았다. 1939년 8월엔 열린 일만교환싸이클대회에서는 500미터와 4000미터, 5000미터에서 모든 경쟁자를 따돌렸다. 500미터와 4000미터는 일본(당시는 조선과 일본 포함)신기록이었다. 언론은 이윤백의 활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조선싸이클계는 물론 전 일본에 일대 쇼크를 던져주고 있다." -<동아일보>(1939년 8월 10일 치)

과학이나 산업은 물론 국력이 훨씬 앞선 데다 인구까지 많았던 일본 자전거 선수들은 번번이 조선 선수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딴 건 몰라도 자전거만큼은'이라 위로했을까

허나 그 힘은 오로지 경기장 안에서였다. 자전거 경기장 안에선 수시로 조선이 일본을 이겼지만, 어디까지나 경기일 뿐이었다. 경기장을 벗어나면 식민지 백성이고 식민지 선수였다. 총독부도 그 사실을 알았다. 총독부는 자전거 경기를 규제하지 않았고, 온 나라가 전쟁체제로 돌아설 때까지 전국 각지에서 자전거 경기는 아무 탈 없이 열렸다.

어쩌면 조선 백성들은 일본에 대한 불만을 경기장 내에서 풀며 대리만족을 느낀 건 아닐까. 다른 건 몰라도 자전거만큼은 우리가 이길 수 있다며 애써 자위한 건 아닐까. 일본정부 또한 독립의지를 경기장 안에서 풀게 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애초에 자전거를 팔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게 자전거 경기였다. 자전거 경기가 인기를 끌면서 자전거는 눈에 띄게 늘었다. 자전거 선수 가운데는 자전거 판매점 점원이 많았고, 엄복동 또한 자전거 판매점인 일미상회 소속이었다. 자전거 경기를 주최하는 쪽은 자전거 상점들이나 신문사 지부들이었다. 1910년대 초, 1000대에 불과했던 자전거가 1938년 4월에 이르러 4만6천 대에 이르게 된 것은 마케팅의 승리였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흘렀다. 한일전은 여전히 뜨겁고, 자전거에 대한 인기는 점점 높아간다. 일본전에 나서는 선수들을 언론은 종종 전사로 만들고 싶어하며, 지구를 구할 영웅이라며 각국 정부는 자전거를 치켜세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한일전에서 승리하면 일본을 이기는 것이고, 자전거만 타면 지구를 구할 수 있나.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그 옛날 엄복동의 승리에만 만족하며 집으로 돌아간 이들과 다를 바 없다. 자전거 수는 계속 느는데도 에너지 소비는 전혀 줄지 않는다. 경기장에서 조선선수가 아무리 승리해도 현실에서 일본의 지배는 더욱 강해진 것처럼 자전거만 탄다고 지구를 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렇게 떠드는 건 엄복동의 승리가 곧 조선의 승리라고 믿는 것처럼 허무한 개그다. 결국 현실은 경기장 밖에 있지 않은가.

한일전 엄복동 자전거 자전거경기 이윤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