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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영월광업소에는 이곳에서 영월화력발전소로 석탄을 실어 나르던 케이블카가 있었답니다. 그 길이가 무려 12km나 되는데, '삭도 바구니'에 1톤이나 되는 석탄을 실어서 날랐다고 해요. 그런데 이 삭도 바구니에는 석탄 뿐 아니라 몰래 사람도 탔다고 하네요.
▲ 삭도 바구니 옛 영월광업소에는 이곳에서 영월화력발전소로 석탄을 실어 나르던 케이블카가 있었답니다. 그 길이가 무려 12km나 되는데, '삭도 바구니'에 1톤이나 되는 석탄을 실어서 날랐다고 해요. 그런데 이 삭도 바구니에는 석탄 뿐 아니라 몰래 사람도 탔다고 하네요.
ⓒ 손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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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두두둑!!!
"앗! 조심해! 탄 떨어진다!"
"하하하 오늘은 횡재 날이네."
"얼른 가서 석탄 줍자."

하늘에서 석탄 벼락이 떨어진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하늘에서 석탄이 떨어진다고요? 궁금하시죠? 그 옛날, 강원도 영월 마차리 탄광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답니다. 앞서 기사로 소개한대로 영월에는 '영월광업소'가 있어 탄광 일을 하는 광부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답니다. 1966년도의 영월 광업소의 석탄 생산량은 30만7254톤이나 되었어요. 영월화력발전소의 석탄 소비량이 35만3034톤으로 영월 광업소에 생산된 석탄 대부분이 화력발전소에서 소비되었다고 하네요.

이렇게 마차리에서 화력발전소로 석탄을 실어 나를 때 아주 남다른 시설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삭도'라고 하는 것이랍니다. 공중에 케이블카를 놓아서 바로 옮길 수 있었는데, 그 길이가 무려 12km나 된다고 합니다. 그 모양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솔개와 닮았다고 해서 '솔개 바가지'라고 했다네요. 바구니 하나에 석탄을 1톤씩 실어서 날랐는데, 이렇게 석탄이 옮겨지는 가운데 때때로 바구니가 뒤집어져서 석탄이 우르르르 쏟아지는 날이 있었답니다.

탄광촌 사람들의 삶이 모두 그러했지만, 늘 위험 속에서 일을 해야했답니다.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도 많았고, 메탄가스에 중독되는일, 또 탄가루 때문에 진폐증으로 고생하는 일이 허다했지요. 지금도 진폐나 규폐를 앓는 분들도 많다고 합니다.
▲ 광부들의 삶 탄광촌 사람들의 삶이 모두 그러했지만, 늘 위험 속에서 일을 해야했답니다.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도 많았고, 메탄가스에 중독되는일, 또 탄가루 때문에 진폐증으로 고생하는 일이 허다했지요. 지금도 진폐나 규폐를 앓는 분들도 많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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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리에 쓰이던 교통수단 '삭도 바구니'

"아, 글쎄 안 된다니까."
"그러지 말고 좀 태워줘요. 이거 갖고 꼭 나가봐야 한다니까요."
"아이 참, 안 된다니까 그러네. 정 그러면 물건만 실어 보낼 테니까 이리 줘. 대신에 물건 잃어버려도 나는 책임 못 지네."

석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날은 이 마을 주민들한테는 횡재 날이었지요. 석탄을 주워서 집집이 난방연료로 썼고요. 또 그 덕분에 주먹탄이나 19공탄 연탄을 만들어 쓰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이런 좋은 일만 있었던 게 아니고, 안전사고도 많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마을 주민들이 이 '삭도' 바구니에 몰래 숨어 타고 가거나 물건을 실어서 나르기도 했다는데, 너무나 위험한 일이라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태워 달라', '안 된다' 실랑이를 펼치는 일이 종종 있었지요. 케이블카로 옮겨지다가 석탄이 쏟아지는 사고도 많았는데, 실제로 이렇게 삭도 바구니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겪는 일도 더러 있었다고 합니다.

광부들의 삶은 언제나 고되고 힘들었지요. 사는 게 늘 팍팍했지만, 이곳에도 계급층이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광부들이 살던 일반 사택은 방 한 칸, 부엌 한 칸이 다였지만, 양반사택이라고 하는 곳에는 소장, 차장, 과장 등 높은 직위를 가진 이들이 살았대요.
▲ 탄광촌 양반사택 광부들의 삶은 언제나 고되고 힘들었지요. 사는 게 늘 팍팍했지만, 이곳에도 계급층이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광부들이 살던 일반 사택은 방 한 칸, 부엌 한 칸이 다였지만, 양반사택이라고 하는 곳에는 소장, 차장, 과장 등 높은 직위를 가진 이들이 살았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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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촌 마차리 사람들의 삶

영월광업소는 일제강점기 때 처음 생겨나 일본 사람들이 꾸리던 곳이었지요. 그러다가 1950년 '대한석탄공사'가 세워지면서 '조선전력주식회사'에서 이관하여 운영을 하게 되었고, 이 마을 주민들 대부분은 이곳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지요. 광부들의 사택이 따로 있었는데, 지금도 모습은 달라졌지만, 역사를 간직한 채 자리하고 있답니다.

광부들의 사택은 거의 방 한 칸, 부엌 한 칸이었고 식구가 많아도 한 방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 집들이 한 집에 20가구씩 다닥다닥 붙어있으니, 독립된 생활은 할 수도 없는 매우 힘겨운 삶이었답니다. 양반사택도 따로 있었는데, 2가구가 한 집을 쓰고 정원에 변소와 목욕탕까지 딸린 환경이 매우 좋은 집이었지요. 그러나 이곳에서 살 수 있는 권한은 탄광촌 사람들의 최고계층인 소장, 부장, 차장, 과장, 항장과 같은 직위를 가진 이들이 사는 곳이었답니다. 대부분의 광산근로자들은 이렇듯 열악한 환경에서 삶터를 꾸리고 살았다고 합니다.

지난날 영월광업소에서 일했던 광부들은 월급을 돈이 아닌, 배급표를 받았다고 합니다. 어떤 때엔 개인의 근무 성적에 따라 전표를 받기도 하고, 또 쌀과 잡곡으로 따로 배급을 받기도 했답니다. 사진은 배급소에서 삯을 계산하는 모습이랍니다.
▲ 배급소 지난날 영월광업소에서 일했던 광부들은 월급을 돈이 아닌, 배급표를 받았다고 합니다. 어떤 때엔 개인의 근무 성적에 따라 전표를 받기도 하고, 또 쌀과 잡곡으로 따로 배급을 받기도 했답니다. 사진은 배급소에서 삯을 계산하는 모습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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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들의 삶 또한 참으로 어렵고 가난했는데, 무엇보다도 한 식구들끼리 한 집에서도 모두 얼굴을 마주보며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답니다. 탄광일이 모두 그렇듯 3교대 근무를 하기에 밤과 낮이 바뀌어 사는 일이 허다하지요. 그러다 보니, 아이들과 아버지가 함께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어려웠고, 규칙 있는 생활을 할 수 없어 부부관계, 가족관계를 해치는 일이 흔했지요.

이곳에서는 일을 하고 돈으로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전표를 받거나 쌀을 배급 받았답니다. '배급소'가 따로 있어서 개인의 근무 성적에 따라 쌀이나 잡곡을 배급받았는데, 그걸 도로 현찰과 바꾸어서 쓰기도 했다네요. 이발을 하거나, 식료품을 살 때에도 배급받은 전표와 바꾸거나, 사번을 불러주면 나중에 공제하는 방법으로 했답니다. 또 상인들은 그 전표를 광업소에서 돈으로 맞바꾸었고요.

'배급날'이 가까이 오면, 난전에 천막을 치고 큰 대야에 쌀을 내와 파는 광부들과 또 광부들한테서 쌀을 사려는 장사치들도 많이 생겼답니다. 급한 돈이 필요하면, 쌀을 헐값에 내다팔고 그걸 산 장사치들은 또다시 비싼 값에 광부들한테 되파는 것으로 이문을 남기는 이들이 많았대요. 그러다 보니, 광부들의 삶이 언제나 어려움에 허덕이며 살아갈 때가 많았지요.

옛 영월광업소가 있던 자리에 '탄광문화촌'이 세워졌답니다. 지난 2009년에 문을 열었는데, 많은 이들이 관람을 하고 간다고 해요. 갱도체험관 안에는 옛 광부들이 일하던 모습이 전시되어있고, 광부 체험도 할 수 있도록 했어요.
▲ 갱도체험관 옛 영월광업소가 있던 자리에 '탄광문화촌'이 세워졌답니다. 지난 2009년에 문을 열었는데, 많은 이들이 관람을 하고 간다고 해요. 갱도체험관 안에는 옛 광부들이 일하던 모습이 전시되어있고, 광부 체험도 할 수 있도록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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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들의 삶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갱도체험관

마차리 탄광문화촌 안에는 지난날 광부들이 막장에서 일하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놨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체험해볼 수 있도록 마련해놓기도 했답니다. 광부들이 쓰던 안전모, 옷, 장갑, 장화들을 손수 써볼 수 있고요. 또 막장에서 갱도를 만들 때, 세우던 '동발'이라고 하는 나무 둥치를 짊어져볼 수도 있어요. 물론 실제로 광부들이 쓰던 무거운 것은 아니지만요. 굴진, 발파, 동발세우기, 채탄, 선탄에 이르기까지 석탄을 캐내는 과정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보고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더군요. 또 코너마다 그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광부들의 대화 중심으로 이야기를 엮어서 들려주는데 퍽이나 실감나더군요.

▲ 영월 탄광문화촌 광부들의 삶 강원도 영월군 북면 마차리, 지난날 영월광업소가 있던 자리에 '탄광문화촌'이 세워졌답니다. 날마다 갱도 안에서 힘겹게 일하던 광부들의 삶을 엿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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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릉쾅쾅쾅'
"앗 깜짝이야!"
"휴우~ 진짜 놀랬다."

갱도 안을 한참 동안 재미나게 살펴보며 구경을 하는데, 느닷없이 굉음을 내며 가만히 있던 벽이 한순간에 틀어지더니 무너질 듯한 모양으로 뒤틀리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갱도가 무너지는 걸 실감나게 재현해놓은 곳인데, 너무나 놀라서 구경 잘 하다가 뒤로 나자빠질 뻔 했어요. 실제로 그 옛날 이곳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겠지요.

갱도 안은 좁고 어두컴컴해요. 재현을 해놨지만, 그 옛날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힘겹게 일을 한 광부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느껴볼 수 있어요.
▲ 갱도 갱도 안은 좁고 어두컴컴해요. 재현을 해놨지만, 그 옛날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힘겹게 일을 한 광부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느껴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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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위험한 일을 하는 광부들의 삶은 참으로 날마다 가슴 졸이며 살았을 거예요. 또 남편이나 아버지를 막장에 보낸 그 식구들은 얼마나 불안해하며 살았을까? 가늠이 됩니다. 탄광문화촌의 안내 글에 따르면,

『석탄 산업은 특성상 높은 사망재해율과 직업병을 지니고 있다. 지난 1978년부터 1987년까지 10년간 석탄산업 재해로 사망한 수는 총 1천7백49명으로 매년 평균 1백75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중경상을 입은 수는 총 5만4천5백 명으로 매년 평균 5천4백50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수치는 2일에 1명의 탄광노동자가 사망하고, 매일 15명이 다치는 셈이다. 특히 연간 생상규모가 10만 톤 미만의 소규모 탄광일수록 재해율이 더 높았다.

탄광의 재해는 가족들의 불안으로 이어지고 있다. 가슴 졸이며 살아가는 탄광노동자 아내는 그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갱내에서 사고가 났다는 소문이 들리면 가슴부터 철렁했다. 갱내 사고가 난 날은 남편이 집에 있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렇게 불안한 가슴으로 살다보니 내 신세도 불쌍하고, 남편도 불쌍하게 여겨졌다. 늘 살아도 불안하게 살았다.』

이렇듯 광부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겠지요. 막장 안에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까 말이에요. 메탄가스 사고나,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갱도에서 힘든 일을 하며 살아야하니, 그 식구들조차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으리라 짐작이 되어요. 이런 '막장'에서 터 잡고 사는 그들의 삶속에서 탄광에 들어갈 때 해서는 안 될 금기사항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 휘파람 부는 것을 삼간다.
◎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 부부싸움 후 가급적 갱내에 들어가지 않는다.
◎ 갱내에서는 뛰거나 큰소리를 내지 않는다.
◎ 갱내에서 담배는 금물이다.

갱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곳이에요. 작업 공정을 파악하고 지원장비, 지원인원 등을 총괄하는 곳이지요.
▲ 갱도 안 사무실 갱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곳이에요. 작업 공정을 파악하고 지원장비, 지원인원 등을 총괄하는 곳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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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옛 광부들도 모두 떠나고 없지만

탄광문화촌에서 지난날 광부들의 삶과 갱도 안에서 힘겹게 일을 하며 살아왔던 그들의 삶을 올곧게 다 느끼지는 못했지만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구경을 마치고 다시 마차리 시가지로 돌아 나와서 버스정류장이 있는 '의성상회'에 잠깐 들렀어요. 가게 이름이 의성이라서 궁금해 여쭈었더니, 고향이 바로 경북 의성이라고 하시네요. 구미에서 왔다고 하니 주인아저씨가 무척이나 반가워하시더군요.

아저씨도 지난날, 고향을 떠나 돈벌이를 하려고 이곳 영월 마차리까지 들어왔다고 했어요. 영월광업소 관리과에서 일을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던 아저씨는 그때를 돌이켜보며 우리한테 부지런히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광부들의 삶이 힘들기는 했지만, 그 때만 해도 탄광에 취직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래도 우연히 줄이 닿아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석탄 산업이 활발했던 그 시절에는 이 마을 사람들의 경제생활이 매우 좋았다고 하더군요.

광부들이 일한 삯을 전표로 받았지요. 그 전표를 가지고 마차상회에 가면 갖가지 식료품을 살 수 있었답니다. 지나날엔 꽤나 호황을 누리던 곳이라지요.
▲ 마차상회 광부들이 일한 삯을 전표로 받았지요. 그 전표를 가지고 마차상회에 가면 갖가지 식료품을 살 수 있었답니다. 지나날엔 꽤나 호황을 누리던 곳이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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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마다 장사는 호황을 이루었고, 오가는 이들도 많았답니다. 그러나 탄광이 문을 닫자, 광부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대요. 마을을 떠난 이들이 많았고, 아직까지 남아있는 분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하셨어요. 아저씨 또한 젊은 시절을 탄광에서 보냈지만 오랫동안 정이 들어 제2의 고향이 되었다면서 다른 일을 하면서 이곳에서 터를 잡고 살아오셨다고 하시네요.

그리고 지난 2011년 10월 29일, 바로 이곳, 영월 광업소 탄광에서 일을 하다 갱도사고와 진폐증으로 숨진 안타까운 광부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제를 처음으로 지냈다고 합니다. 위험한 탄광에서 식구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 목숨을 잃은 광부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진폐증으로 순직한 분들만 해도 45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또 아직도 진폐증과 규폐로 고생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고 해요.

그분들을 위로하고 산업의 역군으로 일하다 순직한 분들의 넋을 기리는 그런 문화제로 행사를 꾸렸다고 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아까 탄광문화촌 언덕배기에 세워놓은 위령탑을 봤는데, 바로 그곳에서 위령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이 행사는 '영월 탄광문화제'라는 이름을 걸고 지난해 처음 열린 거라고 하더군요. 올해에도 이 문화제를 할 거니까, 그때 다시 꼭 와보라고 말씀하셨어요.

지난날 광부들이 살던 마차리에 있는 집이에요. 벽에다가 예쁜 그림을 그려놨네요. 한줄로 쭉 늘어선 이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요. 지금 그 옛날 광부들은 많이 떠나고 없지만, 그들이 살던 집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빈집도 더러 있는 듯했고 사람이 사는 곳도 있었어요.
▲ 마차리 광부사택 지난날 광부들이 살던 마차리에 있는 집이에요. 벽에다가 예쁜 그림을 그려놨네요. 한줄로 쭉 늘어선 이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요. 지금 그 옛날 광부들은 많이 떠나고 없지만, 그들이 살던 집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빈집도 더러 있는 듯했고 사람이 사는 곳도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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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여러 해 앞서부터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영월 마차리, 구미에서 가자니 워낙 먼 거리라서 계획을 세우기가 힘들어 미뤄놨던 곳이었지요. 이번 나들이로 마차리 사람들의 삶과 너나할 것 없이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광부들의 삶을 돌아볼 수 있어 매우 남다른 시간이었답니다.


태그:#영월 탄광문화촌, #광부들의 삶, #영월광업소, #영월군 마차리, #강원도 탄광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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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다가, 이젠 자동차로 다닙니다. 시골마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정겹고 살가운 고향풍경과 문화재 나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지요. 때때로 노래와 연주활동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노래하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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