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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치권 뉴스가 봇물을 이루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른바 '벤츠 여검사 사건'이 그것입니다. 지난 1월 27일 부산지법 형사합의5부(김진석 부장판사)는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기소됐다가 보석으로 석방된 이아무개 검사에게 징역 3년, 추징금 4462만여 원, 샤넬 핸드백 및 의류 몰수를 선고했습니다.

유사사건에 비해 상당히 중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여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더군요. 이날 재판부는 "형사사건의 공소제기와 유지, 사법경찰관을 지휘하는 검사로서 고도의 청렴성이 요구되는 피고인이 내연 관계에 있는 변호사로부터 청탁과 함께 알선의 대가를 받아 죄질이 매우 나쁘다"며 "장기간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실형을 선고하는 게 마땅하다"고 중형 선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검사는 권력의 상징이자 대우나 급여 또한 최상위에 드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검사는 초임부터 행시 합격자(5급, 사무관)들이 15년 이상 근무해야 승진할 수 있는 3급(부이사관)에 해당하는 지위를 누립니다. 지난해 1월에 공포·시행된 '검사의 보수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따르면, 11년 차 검사의 경우 봉급 487만 원과 유사 급여인 직급보조비 75만 원을 합해 총 560여만 원을 월급으로 받고 있습니다.

이 금액이면 여타 직종에 비해 결코 급여가 적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검사는 '공익의 대변자'라는 명분과 함께 수사 사건의 공소권을 갖고 있으며, 그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는 독립 권력기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검찰은 대체 어떤 모습입니까? 공신력은 차치하고 뇌물과 사건 청탁 등으로 인해 대중들의 손가락질과 함께 비판의 도마에 올라 있습니다. '스폰서 검사' '그랜저 검사'에 이어 최근 '벤츠 여검사'까지 등장하면서 검찰은 이제 비리 집단의 대명사가 돼버렸습니다.

지난 시절 권력자의 시녀 노릇을 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아직도 비리와 불공정한 수사로 본분을 망각한 처사는 검찰의 존립기반조차 뒤흔들고 있습니다. 최근 민주통합당의 한명숙 대표와 문성근 최고위원은 검찰개혁을 당의 최우선 과제로 표방한 바 있어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검찰사(史)에는 '롤 모델'로 삼을 만한 바람직한 인물이 과연 없었던 것일까요?

'대쪽 검사'의 상징, 최대교 검사

전주 덕진공원에 있는 '법조 3성' 동상. 왼쪽부터 김홍섭 판사, 김병로 대법원장, 최대교 검사
▲ 전북지역 '법조 3성' 전주 덕진공원에 있는 '법조 3성' 동상. 왼쪽부터 김홍섭 판사, 김병로 대법원장, 최대교 검사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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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내 덕진공원에 가면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동상(좌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동상은 전북 출신의 훌륭한 법조인 3인의 삶을 기려 1999년 11월 건립됐는데, 이 지역에서는 이들을 '법조 3성(聖)'이라고 부릅니다.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전북 순창), '사도(使徒) 법관'으로 불린 김홍섭(전북 김제) 전 대법원 판사, '검찰의 양심'으로 불린 최대교(전북 익산) 전 서울고검장 등이 그 주인공입니다. 가인은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의 무료 변론을 한 공로로 법조인으로는 드물게 건국훈장을 받았으며, 가톨릭에 귀의한 김 판사는 재판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재판철학으로 실천한 분으로 유명합니다. 마지막 한 사람, 최대교(崔大敎·1901~1992) 고검장. 그는 우리 검찰사에서 '대쪽 검사'의 상징으로 불리는 분입니다.

1980년대 후반, 저는 '백범 김구 선생 시해사건' 관련 취재차 최대교 변호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는 서울 신문로(새문안길), 현 씨티은행 자리에 있던 2층 건물에서 다른 원로 변호사 몇 분과 함께 공증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그는 일주일에 한두 차례 출근하고 있어 사전에 약속하고 만났습니다.

당시 90에 가까운 고령에도 기억력이 좋았던 걸로 기억납니다. 백범이 안두희가 쏜 흉탄에 서거한 1949년 6월 26일, 그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이날 집에서 점심을 먹고 낮 1시경 검찰청으로 출근한 그는 반 시간쯤 지나 당직 중이던 이원희 부장검사로부터 백범이 암살당했다는 보고를 접했습니다. 그는 현장 검증을 하기 위해 즉시 이 검사와 함께 지프를 타고 백범이 머물렀던 경교장으로 내달렸습니다.

경교장으로 가던 중 그는 관할경찰서인 서대문경찰서에 잠시 들러 서장을 찾았더니 서장은 숙직실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가 호통을 치면서 사건 현장에 가지 않고 뭘 하느냐고 물었더니 서장은 손을 내저으며 "검사장님 모…못 갑니다. 헌병들이 지켜 서서 절대 못 들어가게 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길로 그는 경교장으로 향했는데 서장의 말대로 입구에서 헌병들이 제지해 경교장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검찰청사로 돌아와 분을 삭이고 있는데 얼마 후 헌병대위가 찾아와 현장 검증을 해도 좋다고 해서 다시 경교장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도착했을 때 백범은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으며, 시신은 경교장 2층 집무실에 흰 광목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소신 굽히지 않은 최 검사... 이승만의 미움을 사다

전주 덕진공원에 있는 최대교 검사 동상
▲ 화강 최대교 검사 전주 덕진공원에 있는 최대교 검사 동상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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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0분 동안 현장검증을 마친 후 그는 곧바로 권승렬 장관과 함께 이범석 국무총리를 찾아갔습니다. 마침 이 총리는 사냥을 나가고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바로 공덕동에 있는 신성모 국방장관을 찾아갔는데, 신 장관은 백범 서거 소식을 듣고는 "이제 민주주의가 됐군!"이라며 뜻 모를 말 한마디를 던졌다고 합니다.

문제는 용의자에 대한 영장청구. 당연히 담당 검사장인 그의 몫이었는데 뜻밖에도 김익진 검찰총장이 직접 영장청구를 하자 그는 김 총장을 찾아가 따졌습니다. 그러자 김 총장은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경무대 쪽을 가리키며 "저 영감태기(이승만)가 노망이 들었지…, 저 영감이 최 검사장한테는 일체 비밀로 하라고 해서 그리된 거요. 양해해 주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즉각 사표를 제출했으나 권 장관이 집까지 찾아와 반려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여 뒤인 1949년 9월, 그는 결국 사표를 쓰고 검찰을 떠나게 됐습니다. 발단은 당시 '이승만의 양녀'로 불린 임영신 상공부 장관의 독직사건(사기 및 수뢰혐의)을 기소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해 4월 초 감찰위원회는 임 장관에 대해 업무상 횡령·사기·수회 등 혐의사실을 잡고, 파면 결의와 함께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그는 즉시 강석복 검사에게 수사 지시를 내렸는데, 수사 과정에서 임 장관이 경북 안동 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 상공부 직할 적산 메리야스 공장 관리인으로부터 270만 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 등을 밝혀냈습니다. 이에 대해 임 장관은 "선거사무장이던 여동생(임영선)이 이 돈을 받아 선거비용으로 쓴 것"이라면서 자신은 무관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증거 인멸을 우려해 임영선을 구속했습니다.

동생이 구속되자 임영신 장관은 여동생의 세 살짜리 어린애를 안고 경무대로 달려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동생의 석방을 호소했습니다. 결국 이승만은 이인 법무장관을 불러 석방을 지시하고 이인은 다시 권승렬 검찰총장에게, 권 총장은 다시 그에게 임영선을 석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기소 불기소 결정은 검사의 전속권한이고 형사소송법에 규정돼 있다. 법무부장관이 검사의 구체적 사건의 기소, 불기소에 관여하는 것은 불가한 것으로 생각되니 재고하라"며 이 장관의 요구를 뿌리치고 임 장관을 전격 기소했습니다. 이 일로 이 대통령의 미움을 산 그는 결국 얼마 뒤 옷을 벗어야 했습니다. 그는 법과 양심에 비춰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불의와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정치권력에 당당히 맞설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청렴한 생활과 그에 바탕을 둔 올곧은 기개였습니다. 서울지검장 시절 그의 월급은 1만7000원, 당시 쌀 한 가마 정도를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의 봉급만으로는 가계를 꾸려 나가기가 어렵게 되자 그의 아내는 몰래 봉투를 만들어 내다팔기도 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도시락을 쌀 형편이 못돼 점심시간에 누룽지를 밥 대신 먹다가 출입기자들에게 들켜(?) '누룽지 검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4·19 혁명 후 10년 만에 서울고검장으로 검찰에 복귀한 그는 당시 학생들이 당시 기름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나라에 관용차가 너무 많다고 시위를 벌이자 '백 번 옳다'며 그날로 서울고검장 차를 없애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이튿날부터 아현동 집에서 서소문 검찰청까지 걸어 다녔습니다.

가장 본받을 만한 청백리 법조인

생전의 최대교 검사
 생전의 최대교 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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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강직한 기개는 일제하 총독부 검사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23년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를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호세이(法政)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그는 1932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법조인이 됐습니다.
초임인 부산지검 검사 시절 그는 사표를 던져 총독부의 압력을 물리친 적이 있는데, 당시 조선 법조인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됐습니다. 사연인 즉, 일본인 순사가 조선인 절도 피의자를 때려 숨지게 한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는데 총독부 경무국은 법무국을 통해 담당검사인 그에게 기소하지 말도록 압력을 가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일본인 순사에 대한 기소장과 자신의 사표를 동시에 검사정(檢事正·현 검사장)에게 올리고 출근을 하지 않았고, 이 일로 그 순사는 결국 재판에 회부됐습니다.

이승만 정권에 의해 반 강제로 검찰에서 물러난 그는 4·19혁명 후 서울고검 검사장으로 복직했습니다. 그는 3·15 부정선거사범과 4·19 혁명 당시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한 책임자들을 기소해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부세력은 그에게 혁명검찰부장을 맡아 달라고 제의했으나 그는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했습니다.

당시 군부세력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른바 '혁명정부'에 협조했다면, 그는 검찰총장이나 법무장관 자리는 떼놓은 당상이었을 것입니다(민복기 대법원장의 경우를 감안하면 그같은 추론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는 5.16 이전부터 당시 맡고 있던 서울고검장 자리를 한동안 지키다가 1963년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나와 대통령이 되자 미련없이 검찰을 떠났습니다.

그의 아호는 화강(華岡)입니다. 이 아호는 '강화(江華)에 본관을 둔 강직한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위당 정인보 선생이 지어준 것입니다. 위당은 그의 강직한 기개를 두고 '가을 강은 맑지만 부드러워, 배를 띄우지 못하는 얼음 강과 다르다(秋水之淸淸而柔 不如氷江不可舟)'라고 시를 지어 읊은 바도 있습니다.

또 저명한 형법학자인 유기천 전 서울대 총장은 법대생들에게 화강을 '가장 본받을 만한 청백리 법조인'으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05년, 검찰은 검사의 표상으로 삼고자 '이준 검사상'과 함께 '최대교 검사상'을 제정한 바 있습니다.

최근 중견 검사들이 법복을 벗자마자 고액 연봉과 함께 대기업으로 직행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공익의 대변자를 자처하다가 하루아침에 재벌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검사들을 보면서 새삼 기개와 청빈의 삶을 살았던 화강이 그립고 또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태그:#화강 최대교 변호사, 대쪽 검사, 임영신 독직사건, , #최대교, #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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