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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 문제를 다룬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의 한 장면.
 학교폭력 문제를 다룬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의 한 장면.
ⓒ KT&G 상상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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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학교폭력 논의가 뜨거운 적은 없었다. 연일 교육 관련 단체들은 성명을 내놓고, TV에서는 교육 전문가들을 모아 놓은 토론회가 열린다. 하지만 학교폭력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학교 4학년인 내가 중학생이던 2000년대 초반에도 학교폭력은 존재했다.

서울시 관악구 D중학교는 소위 '일진' 문화로 유명한 학교였다. 모든 학년에 6~8명의 일진 그룹이 있었고, 학내 흡연이나 폭력, 왕따는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이런 문화는 자연히 학습 분위기에 영향을 끼쳐서 "D초등학교-D중학교-D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을 못 간다"는 의미의 '3D'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학교에서 폭력을 줄이고 좋은 문화를 만든 건 꾸중이나 처벌보다는 사려 깊은 몇몇 선생님들의 현명한 대처였다.

#1. 어머니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했던 담임 선생님

중학교 1학년 때, 부끄럽지만 같은 반 친구를 왕따 시킨 일이 있다. 반에서 다섯 명 정도의 친구들과 어울렸는데, 그 중 한 명을 왕따시킨 것이다. 왕따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다. 여자이니 때리지도 않고, 그저 친구였던 관계 사이에서 당사자들만 느낄 수 있는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평소에 우리가 무리 지어 몰려 다니는 것을 유의해서 관찰하던 담임 선생님이 왕따 사실을 알게 되셨고, 우리의 부모님들이 학교로 소환되었다. 평소에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했던 선생님이었고, 또 한 번도 나쁜 문제로 학교에 찾아 온 적이 없었던 부모님이 받을 충격이 걱정되었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과 면담을 마치고 온 날 밤, 어머니는 나에게 왕따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안 하시고 그저 나를 꼭 안아 다독이셨다. 또 평소에는 직장 생활을 하시느라 챙기지 못 했던 아침을 차려 주시거나 스타킹과 교복 와이셔츠를 자주 빨아주시는 등 바뀐 모습을 보이셨다.

나중에 어머니에게 들어 보니, 담임 선생님은 어머니에게 "딸에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 달라"라고 조언하셨다고 한다. 첫 시험에서 반 2등을 했던 성적이 갈수록 하락하고, 교복을 입는 매무새가 단정하지 않았던 것을 보고 어머니가 직장을 다니시며 신경을 못 쓰고 계신 것을 짐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부모님의 방치가 결국 친구들과 어울리며 한 친구를 왕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도 말이다.

선생님 본인이 여자였기 때문에 직장 생활을 병행하던 어머니에게 "공부 잘 하던 딸이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했느냐"고 문책하는 것이 아니라 "바쁘더라도 딸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아침이나 교복 등을 챙겨주라"는 진심 어린 조언이 가능했던 것 같다.

이 일이 있은 후, 친구들과 내가 더 이상 그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부모님과의 관계도 향상되어 1학년을 마칠 때에는 성적도 상당히 회복되었다.

#2. 화장실 앞에서 1인 시위한 생활지도부장 선생님

'학교폭력 희생자 추모 및 학생인권조례 시행촉구 촛불집회'가 16일 오후 서울 광화문빌딩앞 원표공원에서 학생인권조례제정서울본부, 곽노현교육감 석방·서울혁신교육지키기범대위 등 청소년·인권·교육관련 시민단체 주최로 열렸다.
▲ '죽음의 학교'를 넘어 '인권의 학교'로! '학교폭력 희생자 추모 및 학생인권조례 시행촉구 촛불집회'가 16일 오후 서울 광화문빌딩앞 원표공원에서 학생인권조례제정서울본부, 곽노현교육감 석방·서울혁신교육지키기범대위 등 청소년·인권·교육관련 시민단체 주최로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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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중학교가 학교폭력으로 유명했던 만큼, 학교폭력을 담당하는 생활지도부의 위상도 대단했다. 특히 50대 남성의 생활지도부장 선생님은 지각과 같은 사소한 일에서부터 교내 폭력, 흡연까지 모든 종류의 '일탈'을 엄격하게 처벌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 선생님도 어쩌지 못 하는 일이 있었는데, 바로 화장실 흡연이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쉬는 시간이면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일이 발생했는데, 선생님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방치하고, 때때로 소지품 검사로 담배 가진 학생을 색출해내 처벌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그 무섭던 생활지도부장 선생님께서 "미래의 건강한 나를 위해서"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화장실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평소에 편안한 복장으로 다니시던 선생님이 양복도 차려 입고, 입에는 마스크를 한 채였다. 평소와 같이 담배를 피우러 화장실에 들어가던 아이들은 선생님이 서 계신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도망갔다. 하지만 선생님은 담배를 피우러 오는 학생들을 보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화장실 앞에서 피켓을 들고 일주일 동안 서 계셨다.

이 일은 학생들에게 매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동안 매를 앞세워 교문이나 생활지도부실에서 학생들을 때리거나 벌 주던 선생님이 교사로서의 권위를 버리고 대신 피켓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선생님 자신이 학교에서 자주 담배를 피우기도 했는데, 1인 시위 때부터는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는 피우지도 않았다.

1주일여의 1인 시위가 끝나고, 화장실 흡연은 눈에 띄게 줄었다. 학생들은 '들킬까 봐 무서워서'가 아니라 '1인 시위까지 한 선생님께 미안해서' 담배를 안 피우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매서운 매와 호통보다 자그마한 피켓이 효력을 발휘한 셈이다.

#3. 일진과 왕따를 똑같이 대했던 담임 선생님

중학교 3학년 당시 우리 반에는 소위 일진으로 불리는 친구도, 왕따를 당해본 친구도 있었다. 지적 장애를 지닌 친구도 있었는데, 특히 남자였던 그 친구는 학교 남학생들 사이에서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학교폭력은 일진과 왕따라는 학생들 사이의 권력구조에서 생겨난다. 그런 점에서 중학교 3학년 반은 폭력이 일어나기에 매우 적합한 환경이었지만, 현명한 담임 선생님 덕분에 학생들 사이의 권력구조가 없는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도덕을 가르친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은 외모는 여성스러웠지만 성격은 굉장히 털털해 학생들과 잘 어울렸다. 학생들에게 관심도 많았던 선생님은 학생들 사이의 미세한 관계도 잘 알고 있었다. 누가 반에서 권력을 쥐고 있고, 누가 반에서 소외당하고 있는지 말이다.

사실 학생들 사이의 권력관계를 아는 선생님들은 많지만, 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선생님은 많지 않다. 일진 학생들은 보통 선생님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보통 선생님들은 일진 학생들이 예의 없게 굴거나 나쁜 행동을 해도 모르는 척하고, 반대로 왕따를 당하는 학생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3학년 담임 선생님은 일진이든 왕따든 똑같이 대했다.

특히 선생님은 또래 친구들이나 선생님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 했던 일진 친구들에게도 농담을 건네며 친근하게 다가갔다. 왕따를 당하기 쉬운 소극적인 친구들에게도 특별히 우대하거나 무시하는 모습 없이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선생님이 학급 아이들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이니까, 자연히 우리 사이에 있던 일진과 왕따 같은 권력관계도 허물어졌다.

학생들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모두를 똑같이 대했던 담임 선생님의 배려 속에서, 우리 반이 아니었다면 친구들로부터 일상적인 폭력을 당했을 법한 지적 장애를 지닌 친구도 친구들과 잘 어울리게 되었다. 학급 분위기가 좋으니 자연히 학습 분위기도 조성되었고, 나도 처음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의 성적을 회복하고 졸업할 수 있었다.

요즘 학교폭력에 대한 대안으로 학생들에 대한 처벌 강화가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중학교 때 일진 친구들이 숱하게 징계를 당하며 선생님들에게 맞고, 학교를 청소하고, 교화 캠프를 다녀온 것을 보았지만, 그 어느 것도 그들을 바꿔 놓지는 못 했다. 오히려 그 친구들은 그런 처벌을, 자신들이 '일진'이라는 걸 확인시켜주는 훈장처럼 여기기도 했다.

오히려 이들에게 폭력과 왕따를 막은 건 처벌이 아닌, 선생님들의 학생에 대한 진심 어린 관심과, 권위를 버리고 다가가는 소통 자세였다.


태그:#학교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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