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호와 허정무, 박지성과 이영표, 이청용과 기성용 등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많은 단짝들이 있지만, 한국 축구가 낳은 최고의 단짝은 단연 홍명보와 황선홍이다.

홍명보와 황선홍은 최후방 수비수와 최전방 공격수로 경기 중에 패스를 주고 받을 일은 별로 없었지만, 20년 이상 대표팀에서 동고동락하며 무려 4번의 월드컵에 함께 출전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황선홍이 부상을 당해 경기에 나서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다시 호흡을 맞춘 2002년에는 4강 신화를 이룰 수 있었다. 두 선수는 대표팀 은퇴식마저도 한날 한시(2002년 11월 20일)에 열었을 정도로 남다른 우정을 과시했다.

축구에 홍명보와 황선홍이 있다면 야구에는 이들이 있다.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부터 30년 넘게 때로는 라이벌로 때로는 동료로, 함께 그라운드를 누볐던 이들은 2012년 친정팀에서 다시 뭉쳐 호랑이 군단의 11번째 우승을 위해 힘을 모을 예정이다. 바로 KIA 타이거즈의 선동열 감독과 이순철 수석코치다.

호남야구의 라이벌, 해태에서 뭉쳐 한국시리즈 6회 우승 합작

 이순철은 프로 14년 동안 무려 8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순철은 프로 14년 동안 무려 8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 KIA 타이거즈


선동열과 이순철은 고교시절부터 호남야구를 대표하는 스타 선수로 명성을 떨쳤다. 사실 나이는 1961년생 이순철이 1963년 1월생 선동열보다 많지만, 이순철이 전남고에서 광주상고로 전학을 가는 과정에서 1년을 유급하면서 두 선수는 동급생이 됐다.

또래 중 최대어로 꼽힌 선동열이 고려대로 스카우트되면서 이순철은 라이벌 연세대로 진학한다. 광주일고와 광주상고, 그리고 고려대와 연세대. 고교시절부터 시작된 선동열과 이순철의 라이벌 관계는 이들이 야구를 그만 둘 때까지 계속되는 듯했다.

하지만 두 선수 모두 호남에 연고가 있었고, 연고지 출신 선수를 모두 데려갈 수 있었던 당시의 신인지명제도에 따라 선동열과 이순철은 1985년 나란히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다.호남야구의 라이벌이 프로에서 동료가 된 것이다.

프로에서 먼저 두각을 나타낸 쪽은 이순철이었다. 해태와의 갈등으로 시즌 개막 직전에 입단계약을 체결했던 선동열이 7승 8세이브(평균자책점 1.70)에 그친 것이다. 반면에 입단 첫해부터 해태의 주전 3루 자리를 꿰찬 이순철은 타율 .304 12홈런 50타점 31도루의 빼어난 성적으로 그 해 신인왕을 차지한다.

10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동안 일일이 손에 꼽기도 힘들 만큼 수많은 전설들을 탄생시킨 타이거즈의 30년 역사에서도 신인왕은 1985년의 이순철이 유일하다.

하지만 1986 시즌을 앞두고 해태는 커다란 변화를 맞는다. 바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 3점 홈런의 주인공 한대화가 트레이드를 통해 해태에 입단한 것이다. 한대화의 입단은 곧 이순철과의 포지션 중복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순철은 쿨하게 3루 자리를 선배 한대화에게 양보하고 외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중견수 이순철'은 공격과 수비, 그리고 폭발적인 주루플레이를 겸비한 프로야구 최고의 1번 타자로 군림한다.

사실 이순철은 현역 시절 뛰어난 실력에 비해 팬들에게 많은 오해를 받는 선수이기도 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근심을 혼자 짊어진 듯한 짜증 섞인 표정으로 플레이를 했기 때문이다. 극적인 홈런을 치거나 심지어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에도 이순철은 그라운드에서 좀처럼 웃지 않았다.

특히 수비할 때는 마치 동네 가게에 라면을 사러 가는 '동네형의 포스'를 내뿜어 팬들로부터 '라면수비', '매점수비'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순철은 타구의 소리만 듣고도 낙하지점을 정확히 예측해 내던 '수비의 달인'이었다.

입단 첫해 명성에 비해 잠시 주춤했던 선동열 역시 1986년부터 4년 동안 무려 75승을 올리며 리그를 초토화한다. 해태는 선동열과 이순철이 맹활약한 4년 동안 한국시리즈 4연패라는 전무후무한 대위업을 달성한다.

선동열과 이순철은 함께 활약한 11년 동안 6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만들어 내지만 1996년 선동열이 일본의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며 이별을 맞는다. 이순철은 이후에도 두 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더 차지하고 1998년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지만 그 해 34안타에 그치며 14년의 프로 생활을 마감한다. 하지만 둘의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고의 투수 조련사' 선동열 감독과 '모두까기인형' 이순철 해설위원

 현역시절 '국보투수'로 군림하던 선동열은 감독으로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현역시절 '국보투수'로 군림하던 선동열은 감독으로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 삼성 라이온즈


선동열은 1999년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한다. 선동열은 은퇴하기 직전까지 일본에서 28세이브 평균자책점 2.61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며 '국보 투수'의 자존심을 지킨다.

당시 선동열의 은퇴소식을 접한 한신 타이거즈의 노무라 카츠야 감독(현 라쿠텐 골든이글스 명예감독)은 "시속 150km를 던지는 투수가 은퇴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선동열의 이른 은퇴를 아쉬워하기도 했다.

은퇴 후 한국야구위원회(KBO)의 홍보위원으로 활약하던 선동열은 2004년 삼성의 수석코치로 부임한 후 2005년부터 삼성의 사령탑을 맡는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LG트윈스를 이끌던 이순철 감독과 적장으로 재회하게 된다.

당시 삼성은 2004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후 '헤라클레스' 심정수(은퇴)와 '국민 유격수' 박진만(SK 와이번스)을 영입하며 최강의 전력을 구축한 상황이었다. 모두가 삼성을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치켜 세웠지만, 이순철은 달랐다.

이순철은 2005 시즌 개막을 앞둔 인터뷰에서 "삼성의 전력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은 거 같다"며 선동열을 도발했다(훗날 이순철은 팬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일부러 설전을 유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선수로서는 최고의 라이벌이자 동료였지만 감독으로서의 역량에서는 다소 차이가 났다. 이순철은 계약기간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중도사퇴한 반면에 선동열은 두 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포함해 무려 6년이나 삼성을 이끌었다. '좋은 선수는 좋은 지도자가 되기 힘들다'는 스포츠 격언도 선동열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푸른 피의 에이스' 배영수를 비롯해 '끝판대왕' 오승환, '국노' 정현욱, '쌍권총' 권오준과 권혁, '힙합전사' 안지만, '특급 유망주' 정인욱 등이 모두 선동열 감독의 지도를 받고 일취월장한 투수들이다.

이순철은 지도자가 아닌 해설위원으로서 야구팬들에게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특히 선수들의 실수나 안일한 플레이를 거침없이 지적하는 독설로 '비난계의 거성', '모두까기인형' 같은 별명이 붙기도 했다.

KIA 타이거즈의 감독과 수석코치로 재회, 또 다른 전설을 만든다

 수석코치와 감독으로 7번째 우승을 만들어 내려는 이순철(왼쪽)과 선동열

수석코치와 감독으로 7번째 우승을 만들어 내려는 이순철(왼쪽)과 선동열 ⓒ KIA 타이거즈


1996년 선동열의 일본 진출 이후 16년 동안 떨어져 있던 선동열과 이순철은 2012년 다시 같은 유니폼을 입고 야구팬들을 만날 예정이다. 작년 10월18일 KIA 타이거즈의 감독으로 부임한 선동열이 현역 시절 6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함께 만들어낸 이순철을 수석코치로 내정한 것이다.

2006년 LG트윈스 감독 중도사퇴, 2008년 히어로즈의 수석코치 해임 후 3년 동안 중계석에서 마이크를 들었던 이순철이 다시 현장으로 복귀해 선수들을 지도하게 된다. 그것도 오랜 동반자인 선동열과 함께.

선동열은 올 시즌 탄탄한 마운드 구축을 선언했고 이순철도 빠른 발을 가진 신종길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는 등 '강한 타이거즈'를 만들기 위한 초석을 다지고 있다.

선동열과 이순철. 비록 포지션도 다르고 같은 학교를 다닌 적도 없지만 30년 넘게 경쟁하고 힘을 합쳐 온 프로야구 최고의 콤비는 2012년, 함께 만드는 7번째 우승을 위해 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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