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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대사에서 관운(官運) 좋기로 유명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남들은 일생에 한 번 하기도 어려운 자리를 수차례 역임한 사람들로, 세간의 부러움을 한 몸에 샀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 자리에 오르기까지 개인의 노력도 없진 않았겠지만 비단 노력만으로 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그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 몇을 꼽자면, 정일권 전 총리, 민복기 전 대법원장, 고건 전 총리, 전윤철 전 감사원장, 이용섭 민주당 국회의원(현 대변인), 그리고 박희태 현 국회의장 등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혹자는 대통령을 지낸 사람을 최고로 칠 수도 있겠습니다만, 관운으로만 보자면 이들을 따라가기 어렵습니다(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기서는 생략키로 미리 밝혀둡니다).

우선 절대 권력자였던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우 육군대장에서 바로 대통령이 되다 보니 사실 이렇다 할 감투는 별로 없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야당 지도자 출신으로 국회의원은 여러 차례 지냈지만 장관이나 국회의장 한 번 지낸 적이 없습니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잠시 판사를 지낸 후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국회의원 두 차례와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낸 정도이며,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현대건설 회장과 국회의원 두 차례, 그리고 서울시장을 지낸 것이 전부입니다. 최규하 전 대통령의 경우 대통령이 되기 전에 외무부 통상국장, 주말레이시아 대사, 외무부 장관, 국무총리 등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최 전 대통령이 관료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관운 짱' 베스트 5

1991년 3월 6일 정일권 전 국무총리가 대한항공편으로 하와이로 출국하기 위해 김포공항을 나서며 한강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정인숙씨의 아들 정성일씨의 친자 확인 소송에 대해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다.
 1991년 3월 6일 정일권 전 국무총리가 대한항공편으로 하와이로 출국하기 위해 김포공항을 나서며 한강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정인숙씨의 아들 정성일씨의 친자 확인 소송에 대해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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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관운 좋은 사람들'의 화려한 경력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요?

우선 정일권 전 총리부터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1917년생인 정 전 총리는 일제 때 만주(봉천)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졸업 후 만주군 헌병대위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는데 이후 한국군에 입대해 군인으로 공직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전쟁 직후 당시 33세 때 육군참모총장 겸 3군총사령관에 발탁됐는데, 1957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후 주터키 대사를 시작으로 관계(官界)에 진출했습니다. 이후 그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주프랑스 대사와 주미 대사를 지냈으며, 1963년 3공화국 출범 후 초대 외무부장관에 임명됐습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1964년 한일회담이 말썽이 돼 물러난 최두선 총리에 이어 국무총리에 임명된 그는 1970년 12월까지 무려 6년 7개월 동안 총리직에 재임했습니다. 그러다가 세칭 '정인숙사건'으로 구설에 오르자 그는 총리직에서 사임했는데, 이후엔 민주공화당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1971년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제8대 국회에 진출한 그는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통과될 때 민주공화당 의장을 맡았으며, 1973년~1979년까지 국회의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또 전두환 5공 정권에서는 국정자문회의 위원, 노태우 6공 정권에서는 한국자유총연맹 총재와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을 지냈습니다. 대통령 자리 하나 빼고는 당·정의 고위직 전부 지냈습니다.

민복기 전 대법원장. 경성지법 판사를 역임했던 그는 197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민복기 전 대법원장. 경성지법 판사를 역임했던 그는 197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다음은 민복기(1913년생) 전 대법원장. 법조인의 경우 최고로 높이 올라갈 경우 판사는 대법원장, 검사의 경우 검찰총장이나 법무부장관이랄 수 있습니다(물론 분야를 달리하여 국회로 진출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민복기의 경우 보통 법관들과는 달리 다양한 행정부 경력도 갖고 있습니다. 일제 때 경성제대 출신으로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일제 때부터 판사를 지낸 그는 해방 무렵 경성복심법원(현 서울고등법원) 판사로 근무하였습니다.
미군정 당시 사법부 법률기초국장 겸 법률심의국장을 역임한 그는 이승만 정권 하에서 법무부 검찰국장 겸 대검찰청 검사, 서울지검 검사장, 대통령 비서관, 법무부 차관을 역임하였습니다. 1954년 외자구매처 차장으로 자리를 옮겨 1955년 잠시 해무청장을 지내다가 1955년 검찰총장에 기용됐습니다.

1956년 변호사 개업 후 잠시 공직에서 물러나 있었으나 1961년 장면 정권 하에서 대법원판사에 임명됐습니다. 이어 박정희 정권 출범 직후 법무부장관에 임명되었으며, 1968년부터 두 차례에 걸쳐 정년퇴임 때까지 무려 10년간 대법원장을 지냈습니다. 검찰, 법원의 최고위직과 내각의 각료까지 지낸 법관은 그가 유일합니다.

정일권·민복기·고건·전윤철·이용섭, 그리고...

2009년 5월 29일 서울 경복궁에서 열린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에 참석한 고건 전 총리
 2009년 5월 29일 서울 경복궁에서 열린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에 참석한 고건 전 총리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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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관(民官)을 두루 망라한 인물로는 고건(1938년생) 전 총리를 들 수 있습니다.
1961년 제13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여 관계에 진출한 그는 1975년 도백(전남도지사)에 올랐으며, 이후 청와대비서실 정무제2수석비서관, 교통부 장관, 농림부 장관 등을 지냈습니다.

1985년 12대 국회의원이 된 그는 내무부 장관을 거쳐 1988년부터 2년간 서울시장을 지냈습니다. 이후 공직에서 물러나 명지대 총장,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를 지낸 그는 문민정부 말기에 국무총리에 발탁됐습니다.

1998년 민선 서울시장에 당선된 그는 임기를 마치고 2003년 참여정부 첫 총리로 두 번째 총리직에 올랐으며, 퇴임 후 에코포럼 공동대표, 기후변화센터 이사장,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기도 했습니다.

공직근무 시절 그는 장관 3회, 서울시장과 국무총리 2회,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국회 탄핵 때는 두 달여 동안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도 했습니다.



순수 관료 출신으로서 고건 전 총리에 버금가는 인물로 전윤철 전 감사원장을 들기도 합니다.

1939년 전남 목포 출신인 그는 1966년 행정고시 합격 후 경제기획원에서 경제관료로 출발했습니다. 1994년 경제기획원 기획관리실장(1급)에 오른 그는 이듬해 수산청장, 2년 뒤 장관급인 공정거래위원장에 발탁됐으며, 국민의정부 시절 기획예산처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잠시 지내기도 했습니다.

참여정부에서 재정경제부 장관 및 경제부총리에 오른 그는 2003년 말 19대 감사원장에 발탁돼 이를 연임하였습니다. 그는 박정희 정권에서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4개 정부부처에서 무려 7차례나 장·차관 등 고위직을 지냈습니다.

퇴임 이후엔 경원대학교 석좌교수를 거쳐 현재 조선대 법과대학 석좌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총리 하마평에 오르내리기도 했으나 딸의 외교부 특채과정에서 특혜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었죠.

끝으로, 앞에서 거론한 인물들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현역' 가운데서 한 사람을 꼽자면, 이용섭(1951년생) 민주당 의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전윤철 전 감사원장(자료사진).
 전윤철 전 감사원장(자료사진).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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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제1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경제관료로 출발한 그는 2000년부터 국세심판원 원장을 거쳐 이듬해 재정경제부 세제실장(1급)으로 승진하였습니다. 2002년 차관급인 관세청장에 발탁된 그는 이듬해 국세청장에 발탁된 이후 참여정부 시절 내내 승승장구하였습니다.
2005년 4월 대통령비서실 혁신관리수석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 지 채 1년도 못돼 2006년 3월 내무행정의 수장인 행정자치부 장관(현 행안부 장관)으로 승진하였으며, 그해 연말에는 다시 건설부 장관에 임명됐습니다. 2008년 5월 광주에서 제18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올해 만 61세로, 현재 '현역'으로 활동 중입니다.

이밖에 '관운 좋은 사람들'로는 3공 당시 장관 5차례와 10대 국회의원을 지낸 박경원씨, 3~5공 시절 도지사, 장관과 국회의원 두 차례, 아시아나항공 회장, 국무총리, 민주자유당 총재를 지낸 황인성씨, 5공 시절 외무부 장관, 안기부장, 국무총리를 역임한 노신영씨 등도 만만찮습니다. 또 서로 바통을 주고받으며 잇달아 국무총리를 지낸 '3한(韓)', 즉 한명숙(37대)-한덕수(38대)-한승수(39대)씨 등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한명숙씨는 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16·17대 국회의원, 여성부 장관, 환경부 장관, 국무총리를, 한덕수씨는 특허청장, OECD대표부 대사, 산업연구원장, 국무조정실장,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국무총리, 주미 대사(현직)를, 한승수씨는 13·15·16대 국회의원, 상공부 장관, 주미 대사, 대통령 비서실장, 재정경제원 장관 겸 부총리, 외교통상부 장관, 유엔총회 의장, 국무총리, OECD 각료이사회 의장 등을 지냈습니다.

박희태 국회의장을 위한 <노자>의 한마디

이용섭 민주당 의원(자료사진).
 이용섭 민주당 의원(자료사진).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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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보니 서론이 너무 길어졌는데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이 글의 주인공은 요며칠 부쩍 이름이 자주 거론되고 있는 박희태 국회의장입니다. 박 의장은 최근 비서가 선관위 디도스 공격사건에 연루돼 이름이 거론되더니, 이번엔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에 다시 이름이 거명되고 있습니다. 고승덕 의원이 8일 오후 검찰에 출두해 "2008년 7월 전대 2∼3일 전에 의원실로 현금 300만 원이 든 돈봉투가 전달됐으며, 봉투 안에는 '박희태'라고 적힌 명함이 들어 있었다"고 발언했다고 합니다.
이런 가운데 박 의장이 어제 19대 총선 불출마를 시사해 세간의 의혹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박 의장은 올해로 공직생활 51년째를 맞고 있는데, 평자(評者)들은 박 의장이 그간 '양지만을 쫓아온 인물'이라며 비판적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습니다. 앞에서 열거한 인물들 못지않은 박 의장의 화려한 경력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938년 경남 남해 출신인 박 의장은 올해 74세로 1961년 제1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여 공직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 일선 검찰청에서 검사로 근무하다가 1983년 '검찰의 별'인 검사장으로 승진하였습니다. 춘천·대전·부산지검 검사장을 거쳐 1987년 부산고검 검사장이 된 그는 이듬해 민정당 공천으로 고향에서 출마해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래 현재 6선 의원에 이르고 있습니다.

문민정부 시절 초대 법무부장관을 거쳐 국회에서는 법사위원장, 운영위원장, 제17대 국회 부의장, 제18대 후반기 국회의장에 선출됐습니다. 당직으로는 원내총무 두 차례와 2002년엔 한나라당 최고위원을, 2003년과 2008년엔 대표 최고위원을 각각 지냈습니다. 18대 총선 때는 중진 의원 물갈이 대상에 포함돼 공천에서 탈락했으나 2009년 10월 보궐선거 때 지역구를 옮겨 경남 양산에서 당선돼 6선을 기록했습니다.

박 의장에 대해 사람들은 몇 가지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 '명대변인'과 폭탄주. 초선 때인 1988년 12월 당3역 가운데 하나인 대변인을 맡아 이후 4년 3개월간 정당사상 최장수 대변인을 지냈는데 '정치 9단', '총체적 난국',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 등의 유행어를 만들어 큰 인기를 누렸지요.

'폭탄주'도 그가 처음 제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검사장으로 승진해 첫 부임한 춘천지검장 시절, 강원지역 기관장 모임에서 군 장성들이 맥주잔에 양주를 가득 부어 강요하자 이에 대항하여 고안한 것이 바로 '폭탄주'라고 합니다.

부정적인 기억도 몇 있습니다. 문민정부 초대 법무장관에 기용됐을 때 이중국적을 가진 딸의 특례입학이 말썽이 돼 10일 만에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과도한 재산(97억, 2011년 기준)과 탈세 의혹, 게다가 지역구(경남 남해) 경쟁자인 김두관 전 행자부장관(현 경남도지사)을 "이장 출신"이라며 폄하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었습니다.

'유종의 미'라는 말이 있듯이 한 사람의 일생이든 아니면 어떤 작업이든 끝마무리를 잘 짓는 것이 중요합니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여야 할 것 없이 특정지역을 기반으로 해서 다선(多選)을 한 몇몇 의원들이 눈총을 받고 있습니다. '다선'을 한 게 죄는 아니겠지만 그게 특혜의 결과라면 어느 단계에서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과욕은 늘 화를 부르기 십상이거든요. 박희태 의장도 지난 18대 총선 공천 탈락 때 정계 은퇴를 결단했더라면 아마 이런 험한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끝으로 <노자(老子)>의 한 구절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칠까 합니다. 지족불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을 당하지 아니하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아니하느니라. 그리하면 욕되고 위태롭기는커녕 오히려 '가이장구(可以長久)', 즉 오래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비단 정치인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가슴에 새겨야 할 경구(警句)라 하겠습니다.


태그:#정일권, 민복기, 고건,전윤철, 이용섭, , #박경원, 황인성, 노신영, #한명숙, 한덕수, 한승수, #박희태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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