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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 미선씨는 3년 전 구입했던 아이팟 터치에 문제가 생겨 애플의 고객서비스센터를 찾았다. 이어폰과 기계 간 접촉이 불량해 한쪽 음이 들리지 않았을 뿐 다른 문제는 없었다. 고장난 부분만 수리해서 쓸 생각이었던 미선씨에게 다음과 같은 담당자의 답변이 돌아왔다.

"이미 보증기간이 끝나서 무상수리는 안 됩니다. 그리고 문제가 있는 부품만 교체하거나 수리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기기로 교체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기기, 즉 중고 기기로 교체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비용이 듭니다."

수리비 20만 원, 신상품은 28만 원, 뭘 선택하라는 건가

아이팟 터치
 아이팟 터치
ⓒ 애플사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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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선씨는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세계 최첨단 기술을 자부하는 회사가 '이어폰 잭'을 고칠 수 없다니…. 더군다나 애플사가 제시한 중고 기기 교체 비용은 20만 원으로 최신형 기기가 28만 원대인 것을 감안하면 터무니 없는 금액이었다. 나중에야 애플의 A/S 정책은 '기기의 수리가 아닌 교환이며 이것을 리퍼비시라고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미선씨는 20만 원으로 주고 중고 기기를 받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온라인 중고장터에서 미선씨와 같은 기종의 기기들을 4만~5만 원이면 살 수 있었다). 그녀는 이 참에 새것을 사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교체비에 조금만 더 보태 최신형을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씩 최신형 기기에 대한 흥분과 기대가 마음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결국 사고 싶은 모델과 색깔 가격대도 결정했다.

그러다 그녀는 혹시나 해서 수리하는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예상 외로 애플사의 기기들을 고쳐주는 사설수리소가 여러 곳 있었다. 수리소 직원의 말에 의하면 "이 기기 사용자 거의 100%가 2~3년 사이에 미선씨와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고 한다. 수리소에서 접촉이 불량해진 칩을 교체하니 미선씨의 아이팟도 5분 만에 수리가 돼 멀쩡해졌다. 든 비용은 2만8000원에 불과했다.

뭘 고쳐 써, 그냥 새 걸로 사지 뭐

H&M 사 누리집
 H&M 사 누리집
ⓒ H&M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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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발달로 인해 사람의 생활이 획기적으로 편리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에 온갖 종류의 상품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눈앞에 등장한다.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내는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 물건들을 소비해 주는 것이 기업 생존의 필수 조건이다. 대량 소비의 시대는 마케팅 전략을 학문으로 만들었고, 광고는 우리 삶의 배경음악이 돼 늘 곁에 머물게 됐다.

기업들이 새로운 물건을 선보이는 방식은 참으로 놀랍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의류회사인 스웨덴의 H&M은 빠르고 저렴한 패션으로 유명하다. 예전에 패션업계에서는 보통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휴가 이렇게 다섯 개의 시즌으로 나눠 새로운 상품을 선보였다. 그러나 H&M은 많게는 한 해 26개의 패션 시즌을 제시한다(<너무 늦기 전에 알아야 할 물건 이야기> 참고). 한 시즌이 겨우 2주 밖에 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쉴 새 없이 새로운 물건을 선보인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 물건들은 사라진다.

사람들은 새로운 물건의 홍수 속에서 이미 가지고 있는 소유물이 점점 구식화된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물건뿐만 아니라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신까지도 남들보다 뒤떨어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사용하기에 불편함은 없지만, 디자인이 뒤떨어졌다든가, 아니면 남들 것보다 조금 더 크거나, 조금 더 무겁다는 이유로 새로운 모델을 선택하게 된다.

그 결과, 멀쩡히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버리는 것에 대한 마음 속의 거부감, 망설임 등은 조금씩 사라졌다. "고쳐 쓴다"라는 말은 구두쇠에게나 해당되는 말로 느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동네마다 있던 전파상(요즘 아이들은 이 단어를 알고 있을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패션이나 유행을 따라가다 보니 옷장 속에는 늘 옷이 한 가득이지만 막상 입을 옷은 없다. 올 겨울 유행 아이템을 쇼핑해야 할 것만 같다. 신상 부츠와 거기에 맞는 바지도 사고 싶어진다.

미선씨의 경우 고쳐 쓰는 것을 선택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고장'은 새것을 갖고 싶은 욕망을 합리화 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이왕 고장 난 김에 새것으로 바꾸면 그나마 있던 약간의 망설임도 쉽게 털어버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실 기업들이 노리는 지점도 바로 이것이다. 업체들은 수리를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상품을 사고 싶어하는 욕망을 합리화시켜주고, 소비자에게 신상품으로 바꾸라고 은밀하게 충동질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를 파괴하는 소비를 포기해야 할 때

세계 생태발자국 그래프. 앞으로 지금처럼 소비를 계속 한다면, 2050년에는 지구가 2개 이상 필요하다.
 세계 생태발자국 그래프. 앞으로 지금처럼 소비를 계속 한다면, 2050년에는 지구가 2개 이상 필요하다.
ⓒ Ecological Footpr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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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쳐 쓰거나 가지고 있는 것을 쓰지 않고, 새로 사서 쓰는 라이프 스타일의 확산은 당연히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첫 번째는 돈 문제, 두 번째는 환경 문제이다. 돈 문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런데 돈만의 문제라면 돈 많은 사람이 그렇게 소비하고 사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은 두 번째 문제다. '우리가 항상 새것을 써도 될 만큼 지구가 충분한 자원을 생산해 낼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세계생태발자국네트워크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는 1년에 지구 1.4개가 생산해 내는 만큼의 자원을 쓴다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40%의 지구가 더 필요한 것이다. 지금 모자라는 40%는 미래에 써야 할 것들을 미리 꺼내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세계생태발자국네트워크에서는 '지구 생태 초과소비 기점일'이라는 조사도 한다. 지구가 지탱할 수 있는 수준, 즉 지구 1개가 생산할 수 있는 수준으로 소비한 첫해는 1986년이라고 한다. 이때 생태초과소비 기점일은 12월 31일이다. 그 이후 이 기점일은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 1995년은 11월 21일, 2005년은 10월 2일, 2011년은 9월 27일이었다. 이 기점일로부터 12월까지 남은 3달 동안 우리가 쓰는 물건들은 지구를 파괴하면서 생산하는 물건이라는 의미다.

우리처럼 소비하면 지구가 몇 개나 필요할까

한국의 생태발자국 그래프(1961년부터). 소비량은 늘어나고 있는데, 자원 공급량은 떨어지고 있다.
 한국의 생태발자국 그래프(1961년부터). 소비량은 늘어나고 있는데, 자원 공급량은 떨어지고 있다.
ⓒ Ecological Footpr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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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이렇게 해마다 지구가 생성해 낼 수 있는 것보다 많이 소비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과연 인류가 얼마 동안이나 생존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나 보았던 상상이 실제로 현실화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장의 우리나라를 둘러싼 기후변화, 기상이변을 우리는 피부로 느끼고 있지 않은가?

많은 물건들이 일회용품화돼 멀쩡한 상태로 그냥 버려진다. 이같은 라이프 스타일을 개인의 취향과 선택의 문제로만 여기기에는 지금 생태계와 환경의 파괴는 너무나 심각하다. 고쳐 쓰고 아껴쓰는 삶은 따라서 돈을 절약하는 것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인류가 이 지구에서 생존하는 것과 새 물건을 끊임없이 취하는 것은 서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인이 미국사람들처럼 소비하려면 지구가 5.4개나 필요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소비한다면 2개가 필요하다고 한다. '아나바다'라는 말이 있다.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 쓰고'라는 뜻이다. '아나바다'의 정신은 일부 근검절약하는 사람들만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소비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자 모토가 돼야 한다. 그래야 내가, 그리고 내 아이들이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비의 형태가 바뀌어야 하는 지금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말을 떠올려 보는 것은 어떨는지.

"사람은 그것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물건의 수만큼 부자다." (그의 저서 <월든> 중)

덧붙이는 글 | 이지영 기자는 현재 (사)여성의일과미래 재무상담센터에서 경제교육 강사와 재무상담 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태그:#소비, #수리,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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