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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1980>
ⓒ 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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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생활을 잠시 접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3개월 후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지만 30년 넘게 부산을 벗어난 적이 없던 터라 적잖이 설렜고 두려움이 불쑥불쑥 찾아왔다. 가방 가득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빼곡이 채운 채로 지하철에 올랐다. 멍하니 바라보던 지하철 창 너머로 샛노란 포스터와 굵게 적힌 '1980'이란 숫자가 들어왔고 나도 모르게 지하철 차장에 두 손을 얹은 채 뚫어져라 바라봤다. 1980. 언젠가는 마주할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렇게 부산을 떠났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난 오늘, 서울에서 원 없이 본 은행나무 잎사귀 색깔을 한 책 <1980>을 품고 짧게나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샛노란 표지가 마음에 들어 한참 들여다 보고서야 알아챘다. 표지 아래쪽에 그려진 것이 교도소 담벼락이라는 사실을. 이제 이 책장을 넘기면 저 담벼락 안에서 청춘의 한 페이지를 쓰고 있는 '정우'를 만나게 되겠지. 그렇게 조심스레 그와의 인연을 시작했다.

<1980>은 1980년 전후 부산지역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자전적 소설이다. 1980년, 나는 새마을운동 노래가 모닝콜이 되던 그 시절에 태어났다. 뽀얀 살이 포동하게 오른 갓난쟁이가 아침마다 새마을운동 노래를 듣고 잠에서 깼다. 아마도 세상에 나서 가장 먼저 배운 노래가 아닐까한다. 내가 그렇게 매일 아침, "새벽종이 울렸네"를 듣고 있을 때 소설 <1980>의 주인공 정우는 부산대학교 학내를 구석구석 다니며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외쳤다.

1980년 '그날'을 살던 정우를 만나다

오빠를 따라 부산대학교에 간 적이 있었다. 그 기억 덕에 나는 소설을 읽는 동안 마음속으로, 정우와 함께 도서관 앞에서, 스탠드가 있는 운동장으로, 시계탑으로, 정문으로 뛰어다녔다. 그런데 정우는 알고 있을까? 지금의 부산대학교는 온갖 매장으로 꽉 찬 흉측한 건물에 가려져 있고 학교 입구로 들어서면 거대한 주차장으로 기분 나쁘게 빨려들어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긴 흉측하고 기묘하게 변한 것으로 따지면 어디 그뿐이겠는가.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외치던 정우에게 날아든 소식, 박정희의 죽음. 박정희는 죽었지만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이 학내 집회를 열었다는 이유 때문에 전국을 떠돌며 도망자로 살던 정우를 다시 고향 부산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스스로의 변화를 꿈꾸며 고향을 떠난 나와 세상의 변화를 꿈꾸며 고향으로 돌아온 정우, 그 이유는 달랐지만 가는 발걸음의 무게만큼은 서로 닮았을 거라 생각한다. 어찌되었건 '지금'이 최선이 아니라는 아쉬움이 가득 실렸을 테니 말이다.

정우를 저 음울한 잿빛 교도소 담장 너머로 옮겨놓은 사건이 남포동에서 터졌다. 20대 초반의 정우는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남포동 미화당백화점에서 뿌렸다. 내가 정우만 한 나이였던 어느 날, 나는 정우가 죽을 힘을 다해 도망치던 창선파출소 인근에서 햄버거 가게 유니폼을 입고 할인쿠폰을 뿌렸다. 정우가 경찰들을 피해 하루하루를 가슴 졸이며 살 때, 나는 학비라도 보탤 마음에 하루에 두 세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 잠을 쫓으며 살았다.

그날의 정우는 독재정권과 싸우다 상처 입으면 사람들과 연대하며 그 속에서 희망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매일매일 '자본'과 맞짱을 뜨고 있다. 그렇게 홀로 싸우다 한번씩 터질 때면, 못난 스스로를 탓하며 골방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하면서 말이다.

정우와의 동행이 쉽지만은 않았다. 애써 외면하고 싶은 순간 속으로 자꾸만 나를 끌어다 놓았고 거미줄처럼 얽힌 고민 속으로 몰아세우는 정우였다. 물고문에서 통닭구이까지 갖은 고문의 디테일한 설명에 나의 날개 달린 상상력은 멈출 줄 몰랐다. 급기야 그 자세를 직접 취해보기까지 했다. 그렇게 해보고 나면,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딱 하나다.

"이 미친놈들."

청춘에게 '로맨스'가 빠질 수 있나

이렇게 정우에게 끌려가다가는 마음이 너무 힘들 거 같았다. 이제는 내가 정우를 등떠밀고 싶었다. 그래, 미친 놈의 세상에 대한 고뇌? 좋다! 시대의 아픔? 좋다고. 그 가운데서도 빠질 수 없는 것이 '사랑'이지 않은가. 이 아픔의 기록들 한 장 한 장을 넘기면서도 단 하나의 기대가 있었다. 그 와중에 피어나는 청춘의 사랑 말이다. 정우의 친구 S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정우를 몰아붙였다.

"와 사랑하면 안 되노?"(280쪽)

숙영의 웃음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수줍은 듯 입술을 오므려 내밀고 웃는 모습이 정우의 마음을 즐겁게 했다.(210쪽)

여기에서는 학내를 다니며 군인들과 맞서던 정우는 없고 좋아하는 이 앞에서 수줍어하는 순진한 학생, 정우의 모습만 있었다. 내게는 그 모습이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본격적인 로맨스를 기대하기 시작했다.

숙영은 현관문을 열어 정우를 들어오게 하였다. "오늘은 아무도 없어요." 정우가 집 안 거실로 들어서는데 숙영이 웃으며 말했다. 정우는 집 안에 아무도 없다는 숙영의 말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들고 있던 가방의 무게 때문에 빨리 옮겨야 된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210쪽)

이쯤에서 답답해져왔다.

'아이고, 정우야. 숙영이가 괜히 아무도 없다고 했겠냐, 참 융통성 없다. 답답하다, 답답해.'

이게 끝이 아니다.

자꾸만 가라앉는 듯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웅크려 앉았다. 숙영이 급하게 정우를 부축하며 방 한쪽 옆에 펴 놓은 담요 위로 정우를 데려갔다. (줄임) 쓰러지듯 드러눕는 정우를 숙영이 부축하였다. 숙영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줄임) 숙영의 머릿결이 정우의 목과 귓불을 스치며 지나갔다. 들길 위의 풀 냄새처럼 풋풋한 향기가 났다.(211쪽)

이게 정우가 내게 밝힌 로맨스의 전부다. 전두환을 해골로 비유한 유인물을 뿌릴 용기는 있었으나 정우의 가슴을 설레게 한 그녀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용기는 없었던 걸까. 정우가 모진 고문을 받던 장면보다 더 기운 빠지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뭐 큰 걸 바란 건 아니다. 그저 정우의 솔직한 사랑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세상과 싸우면서도 그 속에서 억누를 수 없던 사랑의 감정을 어떻게 안고 살아갔는지, 너무나 인간적인 정우와의 마주침을 기다렸을 뿐인데 내 욕심이 너무 컸나 보다.

'잊을 수 없는 이름들'만 늘어간다

다시 만난 정우는 로맨스나 찾는 나와는 달리 지독한 역사를 떠올리고있었다.

지독한 역사, 그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더 지독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지나간 사실들은 뼈대만 남는다. 그 가운데서 살아남은 자들은 해골들이었다. 피와 살이 녹아 없어진 해골들에게는 눈곱만큼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불린 이름들, 그 이름들만 남아 또 다른 역사를 기다린다. 그 이름들을 정우는 기억하고자 했다.(193쪽)

정우는 다시 살아남아서 잃어버린 시간들, 잊힌 이름들을 되살리고자 했다. 정우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 한 가득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 또한 한 가득이라는 사실이 순간 나를 지치게 했다. 해가 갈수록 잊을 수 없는 이름들만 늘어가는 거 같아서 무서워졌다. 이런 내게 정우는 무슨 말을 할까. 

책을 덮을 무렵 TV에서 한미FTA 비준동의안이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에라이, 그럴 줄 알았어' 하고 한숨을 쉬자니 정우가 내게 속삭인다.

'니가 진짜로 원하는 세상이 그냥 올 줄 아나? 뭐라도 해라, 그래야 덜 미안할 끼다.'

그래, 정우는 감방 틈새로 스며든 버드나무 잎사귀를 보며 희망을 얻었다지. 난 기꺼이 물대포 맞으러 거리로 나서는 이웃들을 보며 희망을 얻게 된다. 에라 모르겠다. 그래, 가자. 집구석에서 한숨 그만 쉬고 목구멍 밖으로 소리라도 치러 나가보자. 정우야, 물대포나 맞으러 같이 가자! 됐나? 됐다!

덧붙이는 글 | <1980> 노재열 씀, 산지니 펴냄, 2011년 9월, 320쪽, 1만3000원



1980 - 노재열 장편소설

노재열 지음, 산지니(2011)


태그:#1980, #노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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