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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날아라 펭귄>의 회식 장면.
 영화 <날아라 펭귄>의 회식 장면
ⓒ 국가인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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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인자 회의도 끝났응께 식사도 할 겸 송년회나 하러 가입시더."

그야말로 송년회 피크인 요즘입니다. 지난 금요일(23일)이죠. 제가 일하는 곳에서도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기 위한 회의가 있었습니다. 길고도 험난한 회의를 마치고 늦은 저녁 겸 송년회를 위해 인근 삼겹살 가게로 자리를 옮겼죠. 모처럼 만나는 얼굴들이라 별일 아닌 이야기에도 웃음이 넘쳐났고 매일매일이 오늘만 같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후 10시쯤 됐을 무렵, 배는 그만 채우고 신나게 노래라도 한 곡씩 뽑아보자며 자리를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요고 요고 옛날에 마이 묵던 건데, 우리도 오랜만에 요고나 하나씩 묵지요."

가게 입구에서는 추억의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더라구요. 일행 중 한 분이 한 다발의 아이스크림을 사서 하나씩 나눠주셨답니다. 일행은 총 6명, 연령은 30대 초반에서 50대 초반, 남녀 성비는 4:2 정도. 일행은 삼겹살집을 나와 문 밖 벤치 앞에 섰습니다. 그리곤 이 추운 겨울날,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입에 물고 연신 호호, 불어가며 시린 이를 부르르 떨어가며 정신없이 먹고 있었지요. 뭐가 그리 재미난지, 아이스크림 먹는 서로의 모습을 보며 히히호호 법석이었습니다.

즐거운 송년회, 하지만 험상궂은 청년들이 나타나자...

그때 "퍽"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한 청년이 삼겹살집에서 세워둔 입간판을 아무 이유 없이 주먹으로 때리면서 지나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여섯 명의 시선이 동시에 그 청년의 등짝을 향했고 멍하니 있는 순간, 또 다른 청년 한 명이 다가왔습니다. "마! 그래 가꼬 이게 오데 뿌사지겠나? 요래 해야지" 하며 신난다는 표정으로 "빡" 입간판을 내리쳤습니다. 결국 아슬아슬 버티던 입간판 한쪽이 부서지고 말았지요. 입간판을 살펴보는 사이, 청년들은 인근 편의점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의 일이었습니다. '뭐야 저 미친놈들' 하고 울컥하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당장이라도 가서 목덜미라도 잡고 나오고 싶었지만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청년들의 모습을 떠올려봤습니다. 180cm도 훨씬 넘는 키에 덩치도 크고 인상 또한 험상궂은 게 괜히 잘못 건드렸다간 큰일 나겠다는 생각부터 났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 무서웠습니다. 두려움을 느낀 순간, 제 스스로 자신이 초라하고 너무나 비겁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때 옆에 계시던 50대 초반의 일행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부서진 간판 취객이 난동 피우며 부순 입간판
▲ 부서진 간판 취객이 난동 피우며 부순 입간판
ⓒ 최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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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마, 저것들 저러면 안 되잖아. 어디 남의 가게 물건을 부수고 다녀."
"참으시소. 요새 아들 다 그렇다 아입니꺼."
"아니, 참긴 뭘 참아요. 간판 저게 뿌아졌다 아입니꺼. 어디 갔어요, 이놈들!"

그래도 한 분이 이렇게 쎄게 나오시니 괜히 힘이 나더군요. 여기저기서 "그래,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야들 어디갔노"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역시 일행들은 민주시민(?)이었던 거죠. 짧은 순간이었지만, 사실 입간판 조금 부서진 거 모른 척하고 둬도 대충 고치면 그만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편 내 눈앞에서 저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걸 모른 척하자니 마음이 불편할 것도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비상식적인 일이 툭하면 벌어지는 세상인데 이런 것까지 모른 척하자니 너무나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행 중 가장 젊은 남자분이 나서서 청년들을 불러세웠고 날렵한 여성들은 사장님을 불러왔죠.

"이거 당신들이 그랬잖아요. 그러면 안 되죠."
"맞아요, 이 간판 내가 때린 거 맞아요, 근데 와요?"
"여기 보세요. 간판이 부서졌잖아요."
"뿌사졌다고요? 근데 아이씨들이 요기 사장입니꺼?"
"당신들이 간판 뿌수고 가는 걸 우리가 다 본 목격자다 아입니까."
"사장도 아닌 3자가 와 상관이라요? 남자가 치사하게 이런 걸 와 고자질하고 그랍니까? 물리주면 될 꺼 아이요. 물리줄께요."

기가 막힙니다. 아무 이유 없이 타인의 물건을 손상시킨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없고 '고자질', '치사함'이란 단어를 어찌 저리 당당하게 내뱉을 수 있는지. 사람이 술을 마셔야 하는 건데 술이 사람을 마신 건지, 아니면 원래 이 청년들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술 취해 가게 입간판 부숴놓고... "물리주면 될 꺼 아이요!"

가게 사장님은 여성분인데 그동안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오늘도 그냥 넘어갈 순 없다고 변상을 원하셨습니다. 일행 중 연장자분께서 나서서 이 청년 중에 대표격인 한 사람을 잘 타일렀습니다. 그러니 이 청년도 죄송하다고 고개 숙이며 간판 수리비도 사장님께 드리더군요. 그렇게 잘 마무리되는 듯하여 일행 중 가장 건장한 두어 분이 이 청년을 길가까지 배웅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짧은 순간, 청년 중 한 명이 갑작스레 가게로 쳐들어왔습니다. 목격자라고 가게 앞에 진을 치고 사장님을 든든하게 치키던 무리 중에 그래도 건장해보이던 남자들이 사라지고 나니 갑자기 기세가 등등해진 모양입니다.

"사장 나와 봐!"

이젠 대놓고 반말입니다. 가게 안에는 연말을 맞아 손님도 제법 있었는데 말이죠. "이거 수리비가 4만 원이라고? 그래? 좋다, 잘됐네. 4만 원치마저 함 뿌사보까?" 그러더니 입간판을 무지막지하게 때려부수기 시작했습니다. 공포의 순간이었습니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저 힐끗거리며 위험한 순간을 피해갈 뿐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손쓸 방법이 없었죠. 힘으로도 안 되고 자칫 저 거친 행동을 말리다간 다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사장님요, 빨리 경찰서에 연락부터 하이소."

경찰에 연락한 지가 언젠데 술 취한 청년 하나가 입간판을 다 때려부수고 가게로 와서 소리지르고 위협적인 행동을 할 때까지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연말에 이런 화상들이 참 많나봅니다. 기다리다 못한 제가 다시 전화를 했습니다.

"여기 취객 한 명이 간판을 부수고 행패 부리고 있는데 빨리 좀 와주세요."
"가게 맞은편에 경찰차가 있는데 아직 안 왔습니까?"
"신고는 한참 전에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어서예, 저러다 지나가던 사람이라도 다치면 우짤라고 그라나 몰라예. 빨리 좀 오이소."

도로에 던져진 간판 일부 취객이 던지고 부순 간판 잔해
▲ 도로에 던져진 간판 일부 취객이 던지고 부순 간판 잔해
ⓒ 최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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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자는 말도 못 꺼내게 하던 경찰, 변호사란 소리에 '움찔'

그러고 길 건너편을 보니 경찰차 한 대가 보이더군요. 최선을 다해 손짓을 해서 경찰차를 사건현장으로 인도했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제가 맡은 유일한 임무였습니다. 경찰이 왔음에도 이 청년은 여전히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듯했습니다. 사장님과 우리는 이 청년이 지금껏 행패 부리고 업무방해한 내용을 소상히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차근차근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경찰관이 말합니다.

"선생님들은 목격자시라면서요, 일단 조용히 계세요."

경찰은 말도 못 꺼내고 막으면서 우리를 괜히 일 크게 만든 오지랖 넓은 사람 취급하더군요. 경찰이 오면 우릴 지켜줄 거라고, 저 못된 청년들을 앉혀놓고 혼쭐을 내줄 거라 믿었던 제가 순진했나 봅니다.

"사장님, 변상 받으시면 되겠죠?"

변상받으면 그만이지 않냐는 경찰입니다. 원래 절차가 이런 걸까요? 재물손괴죄라는게 변상만 하면 아무 죄가 안 되는 건가요?

"아니, 변상을 떠나서 이 친구들이 업무방해도 하고 위협적으로 굴었잖아요. 손님들도 못들어오고. 그런 거 철저히 조사를 하셔야죠. 변상했다고 끝났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일행이 따져물었습니다. 귀찮다는 표정의 경찰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재물손괴죄는 사장님이 처벌을 원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변상한다잖아요. 그리고 선생님들은 제3자잖습니까. 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경찰, 잘못 걸렸습니다. 일행 중에 직업이 변호사인 분이 계셨거든요. 그 사실을 간파한 경찰관이 일행 쪽으로 와서 갑작스레 낮은 자세로 임합니다. 아니 우리 일행을 향해서가 아니라 변호사님을 향해서 말이죠. 경찰이 뭔가 일처리를 잘못하긴 한 건가 봅니다.

"선생님들도 아시겠지만 저희가 이런 걸 일일이 다 입건하면 일을 못해요. 그래서 변상한다 하시니까 그렇게 처리하려고 한 건데…."

역시 알고 보니 재물손괴죄는 피해자가 고소를 해야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친고죄에 속하는 게 아니라서, 합의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행패 전담' 청년 하나는 가게를 들어와서 소리지르다 또 경찰한테 끌려나가고 그러다 또 사장 찾다가 끌려나가기를 반복합니다. 벌써 오후 11시가 훌쩍 넘은 시간입니다. 경찰이 청년들을 입건시키겠다고 하는 걸 믿고 우리 일행은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조금 뒤에 지하철역에서 그 청년들을 우연히 다시 보니 아무도 잡혀가지 않았더군요. 

다시 이런 일이 있다면... 오지랖 넓게 또 나서야 하나

<금금용의 택시일지> 택시기사 금금용(김경곤)이 파출소에서 취객(이명덕)과 다투고 있는 장면
 연극 <금금용의 택시일지>의 한 장면. 택시기사 금금용(김경곤)이 파출소에서 취객(이명덕)과 다투고 있다.
ⓒ 광주연극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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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즐겁게 아이스크림 먹던 1시간 전으로 돌아가서 청년들의 행동을 모른 척하고 지나갔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랬으면 저희는 어디선가 즐겁게 노래 부르면서 송년회 기분을 냈을 것이고 사장님은 밀려드는 손님에 즐거운 비명 지르면서 바삐 일하고 계셨을 테지요. 그리고 이 청년들 또한 내년에는 잘 살아보자며 으쌰으쌰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경찰관들은 더 중요한 현장에서 보람을 느끼면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구요.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사장님도 우리도 저 청년들도, 그리고 경찰관들까지 괴로운 순간임에 분명합니다. 모두에게 이 괴로움을 준 장본인은 누구일까요. 지금까지의 상황만 보면, 누군가가 아무 이유 없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는 것을 보고도 못 본 체하지 못하고 '고자질'한 우리 죄가 가장 큰 거 같더군요.

웃음만 나오는 이야기지요. 잘못된 걸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바로잡으려 했던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주제 넘는 짓이었습니까? 가장 상식적이고 가장 당연한 일을 하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힘들어야 하며 왜 자꾸만 후회가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일행 중에 변호사라는 든든한 '빽'마저 없었다면 우린 '무식한 시민' 취급받으면서 조용히 입 다물고 있었겠지요.

며칠이 지났지만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혹여라도 이 청년들이 나쁜 마음 먹고 가게로 찾아가 행패 부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이번에는 일행이 많아서 고개 빳빳하게 들고 있을 수 있었지만 만약 나 혼자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보면 아찔하기만 합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을 겪게 되면 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했습니다. 이번에 사건이 처리되는 전 과정을 지켜본 입장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도 오지랖 넓게 나서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만약 내 가족이 혹은 내 친구가 내 사랑하는 연인이 어디선가 피해를 당하고 있을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 마음이 어떨까 생각하면 숨구멍이 탁 하고 막혀옵니다.

2012년은 부디 상식적인 일들만 일어나는 한 해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유난스럽고 오지랖 넓은 일이 아니라 당연하고 가장 상식적인 일로 여겨지길 다시 한번 바라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말마따나 우리부터 쫄지 말고 당당해질 필요가 있을 거 같습니다. 내년에는 저도 좀 겁 없이 살아볼랍니다.

그건 그렇고 우리 송년회는 그렇게 경찰이랑 취객이랑 함께 한 걸로 끝날 운명이었을까요. 그러기에 너무 억울한 기분이 듭니다. 조만간 그 삼겹살집에서 다시 송년회라도 해야 될 거 같습니다. 취객, 경찰관과 함께한 이번 송년회는 무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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