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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여행 영재와 생후 50일도 되지 않아 난데 없는 기차여행을 하게 된 아기와 '철없는 아빠'
영재가 넘쳐나고 영재여야만 하는 세상에서 우리 아기는 기차여행 만큼은 최고로 영재일 듯.
▲ 기차여행 영재와 생후 50일도 되지 않아 난데 없는 기차여행을 하게 된 아기와 '철없는 아빠' 영재가 넘쳐나고 영재여야만 하는 세상에서 우리 아기는 기차여행 만큼은 최고로 영재일 듯.
ⓒ 박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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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차게(사실 그리 당차진 않았지만) 집을 뛰쳐나왔지만, 모아둔 적금에 여기저기 빌린 돈 다 모아 300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이 나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 돈으로 당장 함께 기차를 타고 가는 그녀와 우리 아이가 살아남아야 했다. 가재도구를 살 돈조차 없기에 풀옵션 원룸을 구해야 했다. 그 돈으로 서울에서는 반지하방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결국 처가도 가깝고 그녀가 중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수원에서 방을 구했다. 보증금 300 만원에 월세 34만 원(관리비 포함, 그나마도 딱한 처지라 만 원을 깎아서)으로 작은 원룸을 계약했다.

할 일이 없다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쉽지 않았다. 27이란 나이는 아르바이트 시장에서 그리 선호할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수원에서 서울소재의 대학에 통학하며 할 수 있는 일이란 심야 업무밖에 없었다.

술집은 모두 제외했는데, 나이가 많으면 선호하지 않는 대표적인 업종인데다가 술집 아르바이트는 '꺾기'가 횡행해 실제 계산한 벌이보다 늘 수입이 적다. 심야 아르바이트의 경우 새벽 5시까지 근무라고 되어 있지만 손님이 없으면 2시에도 아르바이트생을 보내거나 일찍 영업을 마치기도 한다. 일하지 않은 시간에 대한 시급은 없다. 더욱이 식당이나 술집 일은 생각보다 상당히 고되다. 술 마신 사람 '꼬장'받다 보면 스트레스도 많다. 이래서 한잔, 저래서 한잔 하다 보면 수입의 3분의 1 이상은 동료들과의 술값으로 쓰게 된다.

남은 곳은 대부분이 편의점이었다. 최저시급인 4320원으로 오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꼬박 일해 봐야 하루 일당 5만 원 남짓이다. 서울 시내의 번화가가 아니고서야 심야라고 돈을 더 주지도 않는다. 명백히 불법이지만 바뀌지는 않는다. 최저시급이라도 정상적으로 챙겨주면 다행이다. 평일, 주말 모두 근무해도 150만 원 남짓, 하루도 쉬지 못하고 한 달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 그렇다.

어렵지 않아요 "적게는 5천, 많게는 2억이 드는 4년제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시급 4320원을 주는 편의점에서 숨만 쉬고 바코드만 찍어야 한다"는 것이 지금 20대의 삶이다.
▲ 어렵지 않아요 "적게는 5천, 많게는 2억이 드는 4년제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시급 4320원을 주는 편의점에서 숨만 쉬고 바코드만 찍어야 한다"는 것이 지금 20대의 삶이다.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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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편의점은 절대로 한가하지 않다. 30분 이상 물건이 판매되지 않을 경우 본사에서 '사고(점원이 졸고 있다던지 문을 잠궈놓고 딴짓을 하는 것은 아닌지)'가 있진 않은지 확인 전화를 한다. 즉, 30분 안에 '반드시' 단 한 명이라도, 라이터 하나 사러왔더라도 손님은 있다는 말이다.

손님이 없는 틈틈이 물건 채우기, 청소, 쓰레기 비우기, 검수 및 정산을 하면 어느새 동이 튼다. 혹여 계산이 맞지 않으면 자기 돈으로 채워 넣어야 한다.(나중에는 일부러 돈을 남게 해 돈을 챙겨가는 꼼수를 배우게 되기도 하지만) 그러고 나면 아침 출근 전, 간단한 식사대용품을 사러 오는 손님을 보게 된다.

이렇게 하나 둘 따지다 보니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거의 하나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 중에 '할만한'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잉여인력 

남은 것은, 몇 개월 전 한 대학생이 죽어나갔다던 저온냉장창고, 대형유통마트의 심야 파트, 경기도 인근의 심야택배창고 등이었다. 냉장창고와 심야택배창고는 도저히 몸이 버텨줄 것 같지 않았다. 절대로 자식에게 허투로 돈을 주지 않는 것이 인생철학이신 아버지는 대학 3학년이 될 때까지 책 창고에서 하루 일을 하면 5만 원을 줬다.

한 겨울 책 창고의 기억 덕분에 심야의 저온냉장창고와 심야택배창고가 얼마나 악몽 같은 일일지 해보기 전에 알 수 있었다. 더욱이 '사장 아들'이 일할 때와 아르바이트생이 일할 때의 차이는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방학까진 한 달여밖엔 남지 않았지만 낮에는 학교도 가야 했고 집에 와서도 편히 쉬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쉽고 돈 많이 버는 아르바이트를 찾아야 했다. 결국 학과 전공과도 들어맞는 대형유통마트가 제 겪이라 판단했다. 주 6일 하루 10시간 근무에 심야수당도 적용돼 월수입도 최저 150만 원 정도였다. 휴일 외에 월 2회 추가 휴무도 있었다.

일이 얼마나 고될지는 몰라도 적어도 '손님을 위해' 온도 조절 되어있는 실내에서 하는 일이었다. 해보지 않았지만 동계 방학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방학이 오면 주말 아르바이트를 더해 두 개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고 월 200만 원 가까운 수입을 벌수 있으리라.

몇 군데 이력서를 넣었다. 그렇게 집을 나온 지 일주일 가까이 흘렀다. 연락은 오지 않았고, 초조했다. 수능이 끝나고 나면 막대한 수의 잉여인력들이 노동시장에 쏟아져 나올 것이었다. 난 아르바이트 시장에서 그들에 비해 현저히 경쟁력 떨어지는 '비선호' 대상이었다.

대학 생활 8년의 굴레

2004년부터 지금까지 대학을 떠나지 못하고 돌로 굳어버린 화석마냥 대학에 남아있었다. 그냥 남아있던 게 아니라 '골수 좌빨'로 남았다. 학교에 '큰일'이 벌어지면 인근 경찰서 정보과 형사와 안부를 주고받을 정도가 됐다. 정확히는 일방적인 캐물음과 일방적인 짜증이었다.

김예슬 선언 그녀는 멋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 할 수많은 학생들에게 '그녀는 000이기 때문에'란 여러 이유들이 생겼다. 그녀의 선언은 그녀가 전혀 의도치 않았을 않을 좌절감을 주기도 했다.
▲ 김예슬 선언 그녀는 멋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 할 수많은 학생들에게 '그녀는 000이기 때문에'란 여러 이유들이 생겼다. 그녀의 선언은 그녀가 전혀 의도치 않았을 않을 좌절감을 주기도 했다.
ⓒ 나눔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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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점부터 대학 졸업장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고, 대학은 운동으로 조직해야 할 대상이 있는 공간일 뿐이 되었다. 그러던 때에 고려대의 김예슬, 서울대의 필명 '공현', 그리고 연세대, 국민대 … 자퇴 선언이 줄을 이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학은 반드시 졸업하자고 했다. 이제 몇학기 안 남았다며.

그녀는 내가 혹여 대학 졸업을 포기하게 되면, 그것이 자기 때문이라 여겨 미안해했던 것 같다. 온갖 사건들의 중심에 있었던 나에겐 오히려 굴레가 될지도 모를 'OO대학교 박용석'이란 이름이다. 주요 인터넷 검색 포털 사이트에 검색되는 그 이름은 나에게 이름을 지워달라던 그들이 두려워했던 굴레를 만들 것이다. 그래서인지 일주일이란 기다림에도 대형유통마트 그 어느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000에 검색해보세요 인터넷 포털 검색 사이트에 이름을 검색해보면. 이것이 이름을 지워달라던 이들이 두려워했던 것이다.
▲ 000에 검색해보세요 인터넷 포털 검색 사이트에 이름을 검색해보면. 이것이 이름을 지워달라던 이들이 두려워했던 것이다.
ⓒ 박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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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 예감이 적중한 것이리라. 무노조 경영으로 유명한 S기업, 족벌경영으로 유명한 L기업, 한때 비정규직 탄압의 상징이었던 E기업에서 '모태 빨갱이'인 나 같은 걸 쓸 리 없지 않은가. 지금처럼 잉여인력이 넘쳐나는 때에. 결국 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방을 구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날이.

'막일'이라도 구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저온냉장창고만은 한사코 말렸다. "몸 성한 사람도 쓰러지는데 오빠는 반드시 쓰러질 거"라며. 그녀가 무얼 걱정하는지 알기 때문에 하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한참을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를 뒤적였다.

24시간 운영하는 헬스클럽에서 주 6일, 하루 10시간 카운터를 보는데 월 120만원이라는 공고가 눈에 띄었다. 공고가 난지 몇일이나 지나있었다. 당장 이력서를 들고 달려갔다. 아르바이트 경력이 10곳도 넘고 한번 일하면 최소 3개월 이상 일한다는 나를 사장은 반겼다. "어린놈들보다 어느 정도 나이 든 녀석이 말도 통하고 책임감도 있다"며. 이렇게 저렇게 자기소개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면접이 거의 끝날 즈음, 그 물음이 나왔다.

"군대는 다녀오셨어요?"

난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다. 선천적 척추 기형을 가지고 태어났고 2004년과 2006년에 세 번의 대수술을 했다. 그리고 겉으로는 알 수 없는 장애도 지니고 있다. 대자보에 이름을 지워달라던 이들이 모두 두려워했듯 나 역시 삶에 '장애'가 될까봐 장애등급을 받지도 가족 외의 다른 이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몸에 무리가 오면 바로 신장염이 온다. 신장염의 주 증상은 40도가 넘는 고열로 인한 실신이다. 실신을 하지 않더라도 무기력증이 올 수도 있다. 2009년 대학 노동자들의 부당해고투쟁에 연대해 천막 농성장에서 지내던 때엔 그래서 늘 신장염과 무기력증에 번갈아가며 시달렸다. 난 이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있는 그대로 다 밝히진 않았지만 허리 수술을 했고 군대를 면제 받은 것에 대해 말했다. 집에 돌아왔고 연락은 오지 않았다.

 ▲ 투쟁 240여일만에 복직합의를 이끌어낸 투쟁의 성과를 축하하고 평가하는 자리에 걸렸던 수백명의 이름이 빼곡했던 대형 현수막. 부당해고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지지한다던 학생들은 한명, 두명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했다. 나중에 저 현수막은 도저히 걸 수 없는 지경이 됐다.  
ⓒ 대학노조 명지대지부
 ▲ 투쟁 240여일만에 복직합의를 이끌어낸 투쟁의 성과를 축하하고 평가하는 자리에 걸렸던 수백명의 이름이 빼곡했던 대형 현수막. 부당해고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지지한다던 학생들은 한명, 두명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했다. 나중에 저 현수막은 도저히 걸 수 없는 지경이 됐다. ⓒ 대학노조 명지대지부
ⓒ 박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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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두려워하는 '좌빨'로 찍히는 것 외에도 나에겐 두려워야 할 것이 있었던 것이다. '좌빨'로 찍혀 있는 이름을 지우기엔 너무나 이름을 여기저기 흩뿌려 놓았기에 소용없는 일이고 그러고 싶지 않다. 난 그것이 자랑스럽기에.

하지만 나에겐 그들이 대자보의 이름을 지우고 싶었던 것처럼 '장애인'의 명단에 내 이름을 쓰고 싶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좌빨'과 '장애'를 지닌 이에게 지우는 죗값을 알고 있기에. 그 둘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감당해야 하기에. 이름을 지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었다.

"그렇게 지우다 보면 대체 뭐가 남지?"
"결국, 나는 어디에도 없는 거잖아?"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기사 송고 후 게재되면 제 개인 블로그 (ppoppogle.tistory.com)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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