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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제 때 만주군에 복무한 한 친일군인의 동상을 놓고 철거논란이 일었습니다. 문제의 인물은 김동하 전 마사회장.

경기도 과천시 마사회 본관 앞에는 그의 흉상이 서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10월 28일 마사회에 공문을 보내 김 전 회장의 흉상을 철거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연구소측은 김 전 회장이 일제 때 만주군에 복무한 경력을 들어 이런 인물의 흉상을 공공기관에 세워두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현재 마사회측은 이 문제를 놓고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조만간 자진 철거될 것으로 보입니다.

박정희의 만주군 1년 선배, 김동하

마사회 내 고 김동하 전 회장 흉상  경기도 과천 한국마사회 경내에 설치돼 있는 고 김동하(1920~1993) 전 마사회장의 흉상. 31일 민족문제연구소 등에 따르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김 전 회장의 흉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요구를 이 단체와 일부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제기하고 있다.
▲ 마사회 내 고 김동하 전 회장 흉상 경기도 과천 한국마사회 경내에 설치돼 있는 고 김동하(1920~1993) 전 마사회장의 흉상. 31일 민족문제연구소 등에 따르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김 전 회장의 흉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요구를 이 단체와 일부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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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장소에 건립돼 있던 친일 전력자들의 동상(흉상 포함)이 헐린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이들의 동상 철거가 사회적 논란으로 부각된 것은 지난 1995년 해방 50주년을 맞아 과거사 청산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부터입니다.
가장 먼저 철거된 것은 지난 1995년 경남 통영 남망산 기슭에 서 있던 친일 극작가 유치진의 흉상입니다. 이를 시작으로 이듬해 2월 청주시 상당구 3·1공원에 서 있던 친일목사 정춘수의 동상이 철거됐으며, 2000년에는 서울 문래동 문래공원에 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흉상이 철거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러면 이번에 흉상 철거시비에 오른 김동하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요? 각종 자료에 따르면, 김동하(金東河, 창씨명 金森武雄)는 1919년 함경북도 무산(茂山) 출신으로 만주에서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그는 1939년 만주 신경(新京, 현 장춘)에 위치한 4년제 육군군관학교(속칭  만주군관학교) 제1기로 입학했는데, 그의 조선인 동기생은 박임항, 윤태일, 방원철 등 총 13명이었습니다. 이듬해 제2기로 입교한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1기 후배인 셈인데, 이 때 맺은 유대를 토대로 이들은 나중에 5·16쿠데타 때 협력관계를 맺게 됩니다.

만주군 출신 가운데 더러는 일제 때의 행적이 밝혀졌습니다. 박정희와 함께 만주군 8단(團)에서 근무했던 이주일, 신현준, 방원철, 그리고 간도특설대에 근무했던 백선엽, 송석하, 또 간도헌병대 대장으로 근무한 정일권 전 국무총리 등이 그들입니다.

반면 김동하의 경우 해방 당시 만주군 상위(대위)였다는 기록 이외에는 이렇다 할 만한 행적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만주군에서 장교로 근무한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연유로 그는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고, 또 이 때문에 그의 흉상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김동하 장군
 김동하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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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 후 귀국한 그는 1946년 해병 소위로 임관해 한국군 장교로 변신했습니다. 육군참모대학을 수료한 후 1949년 해병대 창설 요원으로 참여했으며,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해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 도솔산 전투, 대우산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1951년 8월 31일부터 9월 20일까지 강원도 양구 북방의 해안분지(펀치볼)에서 벌인 소위 '펀치볼 전투'에서 수훈을 세운 공로로 을지무공훈장을 받았으며, 전쟁기념관은 2001년 12월 그를 '이 달의 호국인물'로 선정한 바 있습니다.
1957년 미국 버지니아주 해병참모대학을 수료하면서 장성으로 승진한 그는 이듬해  2월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해병 제1상륙사단장을 맡았습니다. 때는 이승만 정권 말기로 권력층의 부패가 극심하고 군부 내에서조차 상층부 숙청론이 나돌던 시기였습니다.

급기야 1960년 3·15부정선거를 기화로 4·19혁명이 촉발됐고 이승만 정권은 막을 내렸습니다. 새로 권력을 잡은 민주당은 민심을 수습하기는커녕 신구파간의 계파싸움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결국 이런 혼란은 야심 있는 군인들에게 쿠데타 명분을 제공했고, 마침내 박정희 일파는 군홧발로 민주당 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박정희의 5·16 쿠데타에 가담하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과 뜻을 같이 한 김윤근 해병 제1여단장(준장)의 지휘로 해병대가 쿠데타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이어 박치옥 대령이 이끄는 공수부대, 홍종철 대령이 이끄는 제6군단 포병대 등은 한강대교를 건너기 시작했는데 병력 규모는 3600명에 불과했습니다. 도중에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로 출동한 헌병 제7중대 병력과 약간의 교전이 있었으나 이들은 무난히 다리를 건너 서울시내로 진입했습니다. 이들은 육군본부를 접수한 제6군단 4개 포병대와 합류한 뒤 주력은 서울시청에 진주하고, 해병대는 치안국과 서울시 경찰국을, 공수단은 중앙방송국을 이날 상오 4시 30분경 각각 접수했습니다.

5.16군사쿠데타 주역들 쿠데타군을 이끌고 시청 앞에 도착한 박정희 소장과 일행들. 박정희 왼쪽은 박종규, 오른쪽은 차지철.
▲ 5.16군사쿠데타 주역들 쿠데타군을 이끌고 시청 앞에 도착한 박정희 소장과 일행들. 박정희 왼쪽은 박종규, 오른쪽은 차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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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군은 이날 새벽 5시 서울중앙방송국 첫 방송을 통해 "우리 군부가 궐기한 것은 현 정권과 기성정치인에게 더 이상 국가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방황하는 국가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는 '혁명공약' 6개 항을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군사혁명위원회' 명의로 입법·사법·행정 3권을 장악했으며, 당시 참모총장을 맡고 있던 장도영이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이틀 뒤 장면 총리는 은신처에서 나와 임시각의를 통해 내각 총사퇴를 결의했습니다. 이로써 정권은 쿠데타 세력들에게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고 장면 정권은 집권 9개월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1961년 5월 21일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내각수반에 장도영(전 육군참모총장), 외무 김홍일,내무 한신, 재무 백선진 등을 임명하는 등 혁명내각을 구성하고 한자리에 모여 기념촬영를 하고 있다.
 1961년 5월 21일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내각수반에 장도영(전 육군참모총장), 외무 김홍일(첫줄 왼쪽에서 네번째) ,내무 한신, 재무 백선진 등을 임명하는 등 혁명내각을 구성하고 한자리에 모여 기념촬영를 하고 있다. 첫줄 가운데 양복차림을 한 이가 김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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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한림 1군사령관 등은 쿠데타 세력들을 진압하려 했으나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급기야 미국 국무성은 이날 한국의 군사정부를 인정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나라 안팎으로 모든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명실공히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일파는 이날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는 의장에 장도영, 부의장에 박정희가 추대됐습니다. 최고회의는 5월 20일 이른바 '혁명내각'을 발표함으로써 군사정부를 수립했는데, 각료들은 쿠데타에 가담했던 군인들이 임명됐습니다. 그밖에 김홍일(金弘壹)·김동하(金東河) 두 예비역 장군은 고문에 추대됐습니다. 

여기서 고문으로 추대된 김홍일·김동하 두 사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김홍일은 중국에서 항일 독립투쟁을 벌인 인물로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요청으로 폭탄을 제작해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원한 바 있습니다.

해방 후 이승만의 특별지시로 육군 준장에 임명된 그는 한국전쟁 초기 1군단장을 맡아 참전하였으며 1951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후 1961년 5·16 직전까지 주 중화민국 대사로 근무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쿠데타 세력에 동조하여 '혁명내각'의 각료(외무부장관)를 지냈으며, 1965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하면서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했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 김동하. 그는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1년 선배로 5·16 때 박정희를 도와 쿠데타를 성공시킨 주역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고문과 최고회의 운영기획위원장, 재정경제위원장, 외무국방위원장, 대한체육회 회장 등을 역임한 후 1963년 해병 중장으로 예편했습니다.

5·16 때 '선봉장'격인 해병대의 참가를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그는 박 정권 초기 실세 중의 실세였으나 그의 삶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혁명공약' 이행을 놓고 박정희 일파와 갈등을 빚었기 때문입니다. '혁명공약' 6개항 가운데 마지막 6항은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무렵 '혁명주체들' 간에는 '원대 복귀' 문제를 놓고 의견 다툼이 있었습니다. '원대 복귀'는 그들의 공약사항이었습니다. 공화당 창당 과정에서 빚어진 잡음으로 김종필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외유를 떠나기 1주일 전인 1963년 2월 18일,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던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조건부 민정 불참'을 골자로 한 '시국수습에 관한 9개 방안'(2·18 선언)을 내놓았습니다. 그로부터 열흘 뒤인 2월 27일 박임항, 윤태일, 이주일, 김동하 등 '혁명주체' 몇 사람은 약수동 비밀요정에서 모임을 갖고 제1차 원대복귀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2·27 선언'입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초심'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종필 등 박정희 친위세력들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당초의 약속의 뒤로한 채 민정이양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급기야 '원대복귀'를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방원철의 증언에 따르면, 김종필은 "등기문서는 처음부터 내 이름으로 해야지 제3자 이름으로 했다가 나중에 다시 내 이름으로 하기는 어렵다"며 박정희에게 눌러 앉아 집권할 것을 권유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초대 공화당 조직부장을 지낸 강성원은 "군정 기간 중 집권 타성에 젖어 이미 권력의 단맛을 본 데다 박정희 주변에 직업정치인 등 집권구축 세력이 강하게 형성된 탓"이라고 필자에게 증언한 바 있습니다. 당시 박정희는 몇 차례에 걸쳐 민정불참 선언을 번복해 이를 두고 '번의(翻意) 대통령'이라는 불명이 붙여졌었습니다. 

선배도 가차 없었다... 박정희 정적된 김동하

박정희에게 이들은 군관학교 선후배들이자 목숨을 걸고 쿠데타를 감행한 동지들이었지만 절대권력 앞에서는 이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원대복귀'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이들은 졸지에 정적(政敵)으로 둔갑했고,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1963년 3월 11일 군일부 '쿠데타; 음모사건으로 구속되었던 김동하, 박창암 피고는 1963년 9월 27일 문향태중장을 재판장으로 하는 보통군재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다.
 1963년 3월 11일 군 일부 쿠데타 음모사건으로 구속되었던 김동하(왼쪽), 박창암 피고는 1963년 9월 27일 문형태 중장을 재판장으로 하는 보통군재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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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1일 중앙정보부(부장 김재춘)는 돌연 김동하, 박임항, 박창암, 이규광 등이 연루된 이른바 '반(反)혁명사건'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 사건에 연루돼 입건된 사람은 모두 21명으로, 이들을 포함해 방원철(신경 1기), 박준호(만주군 항공 중위), 김광식(신경 7기, 전 최고회의 전문위원), 김동하 장군의 동생 김영하(회사원) 등이 포함됐습니다. '혁명동지' 김동하 일행은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1년 가까이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반혁명사건에 연루돼 한 달여 고통을 겪은 김광식(전 여주대학장)은 지난 1997년 필자에게 "(무슨 모의를) 한 것이 없다. 그야말로 (죄를) 덮어씌운 것"이라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또 혁명검찰부 부장 출신의 박창암은 생전에 "재판장 문형태가 세 번이나 박정희에게 '처벌할 죄목이 없다'고 해도 박정희가 '박창암은 걸어 넣어라'고 해서 결국 불법무기 소지죄로 처벌 받았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또 당시 이 사건의 수사를 맡았던 이용택 전 중정 수사과장은 "수사를 해보니까 증거가 빈약해서 박 의장에게 사정을 보고했습니다. 그리고는 '협상재판'을 건의했는데, 당시 박창암 장군이 말하길 '불평 좀 한 걸 가지고 반혁명으로 몬 것은 지나치다'고 하더군요"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한편 그 무렵 박정희는 '혁명동지'들의 원대복귀 요구를 막아볼 요량으로 '꼼수'를 하나 부렸습니다. 이른바 '역(逆) 쿠데타'를 추진한 것이 그것인데 그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1963년 2월경 박정희는 군관학교·일본 육사 후배이자 5·16 쿠데타에 동참했던 최주종 8사단장(당시 의정부 주둔)을 장충동 의장 공관으로 비밀리에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민정이양이 순조롭지 않으니 다시 쿠데타가 필요하다"며 최장군에게 '역 쿠데타'를 제의했습니다.

박정희는 8사단이 서울로 진입할 경우 제3의 부대가 이를 진압한 후 최 사단장 이하 주요 간부들을 해외로 빼돌리고는 '나라가 어수선해 민정이양을 못하겠다'며 군정 연장을 선언할 요량이었습니다. (* '역 쿠데타'에 관계없이 박정희는 3월 16일 '군정 4년 연장'을 제의하며 정국을 긴장상태로 몰고 갔습니다)

 최주종 장군
 최주종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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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 그룹(대개 평안도 출신)에 이어 '반혁명사건'을 계기로 박정희에게 껄끄러운 존재들이었던 만주군관학교 인맥들이 군부에서 대거 제거됐습니다. 이들 두 집단은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들이 대부분이어서 흔히 이들의 제거를 두고 '알래스카 토벌작전'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부 내의 중심추는 이북세력으로부터 영남세력으로 옮겨지기 시작했고, 바로 이 무렵부터 '하나회'가 서서히 싹을 틔우기 시작했습니다. 5·16 때 해병대를 이끌고 한강다리를 건넜던 김윤근(신경 6기, 일본 육사 60기, 해병 중장 예편)은 "박정희는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동문 가운데서 단 한 명도 육참총장을 배출하지 않았다"며 "이는 박정희가 동문 선후배들을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박정희는 5·16쿠데타 당시 이를 반대하였거나 혹은 5·16에 동참했으나 나중에 사이가 틀어진 선후배들에게 한직이나마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5·16 당시 1군사령관으로 쿠데타군을 진압하려 했던 만주군관학교 및 일본육사 동기생 이한림(예비역 육군 중장)에게는 건설부장관을, '역(逆)쿠데타' 제안을 거절했던 최주종(예비역 육군 소장)에게는 주공 사장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최주종과 함께 반혁명사건에 연루돼 1년여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난 김동하에게는 1971년부터 7년간 한국마사회 회장 자리를 배려하였습니다. 이번에 철거논란을 빚은 문제의 흉상은 그가 경마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사 1996년 마사회가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후배 박정희의 배신에 이어 그는 또다시 역사의 심판대에 서는 불운을 맞게 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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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