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아픈 사람이라면 누구나 치료받을 권리, 돈 때문에 목숨을 저울질하지 않아도 될 권리가 바로 무상의료다. 영국은 국가가 재정을 조달하고 의료 서비스를 관리하는 대표적인 무상의료의 나라다. 의료 서비스의 질과 재정 문제 등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60년 넘게 무상의료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의료 불평등과 의료시장 민영화 등 한국사회 의료 문제의 해법을 영국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영국 런던의 2차 진료기관인 세인트 조지스 병원(St. George's Hospital)의 치과 전문의 리차드 포터(Richard Porter)씨가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며 상담하고 있다.
 영국 런던의 2차 진료기관인 세인트 조지스 병원(St. George's Hospital)의 치과 전문의 리차드 포터(Richard Porter)씨가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며 상담하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글 : 송주민 기자
공동취재 :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영국편' 특별취재팀

지난 6일부터 16일까지 <오마이뉴스> 유러피언 드림 영국 특별취재팀의 일원으로 영국에 머물렀다. 영국의 의료제도인 NHS(National Health Service)가 "영화 <식코>에서 비춰지는 것만큼 유토피아냐"고 묻는다면 나는 선뜻 "그렇다"고 답하진 못하겠다.

하지만 단언할 수 있는 건 NHS가 한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괴담, 악담'으로 매도될 형편없는 제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괴담으로 치부되던 것들이 현지에서는 꽤나 합리적으로 보였다. 거의 정반대의 원리로 의료제도가 운영되는 두 나라 영국과 한국을 보며, 그동안 당연히 여겨왔던 통념과 인식들이 바뀐 것이다. 그 바뀐 생각들을 정리해 봤다.

[바뀐 생각 ①] '병원 이용 적게' 유도하는 영국, 더 합리적일수도

"다들 한두 군데는 아프면서 산다, 이렇게 태연한 인식으로 변하게 되더라(웃음)."

영국 생활 5년차인 김문경씨의 말이다. 약 처방에 인색하고 "지켜보자"는 말을 자주하는 GP(General Practitioner, 일반의). 그리고 (2차) 병원 진료는 생명이 위독한 경우가 아니면 최소 몇 주를 기다려야 하는 사회에 살다보니, 사소한 병에는 태연해지더라는 농담 섞인 말이었다.

처음에는 웃어 넘겼다. 그러나 약에 대한 부작용만 1시간을 설명한다는 NHS 병원 전문의. 무조건 병원 의뢰를 하지 않고, 큰 문제가 없어 보일 경우 심리적인 안정을 주는 게 급선무라며 환자와의 대화를 중시하는 GP. 약 부작용에 매우 민감하고, (급하지 않을 경우) 병원진료에 두 달을 기다려도 큰 불만이 없다는 영국인들을 접하며 '약 편히 구하고 병원을 자주 이용하는 게 마냥 옳은 걸까'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영국 생활 21년차인 박현미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한국 사람 입장에선 느리고 답답하다 욕하는 영국식 의료가 어쩌면 더 합리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딸이 아토피가 심했다. 한국서 병원에 갔는데 약 먹더니 싹 나았다. 영국에 오니 금방 재발했는데, 항생제 3~4병을 먹어도 효과가 없었다. 알고 보니 한국서 먹은 약이 어린이에겐 너무 센 2단계였다. 센 약에 내성이 생겨서 영국서 아무리 약을 먹어도 낫질 않았던 거다."

박씨는 "결국엔 약을 끊고, 자연식하고 생활습관을 교정했더니 나중엔 저절로 치료됐다"며 "스스로 면역력을 키우게끔 해서 나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약을 과잉처방하는 한국보다 웬만하면 약보다는 생활습관 교정을, 약을 쓰더라도 부작용을 면밀히 고려하는 영국식이 더 옳은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야채도 약 안 뿌리고 키운 유기농이 좋은 것 아닌가? 애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한국과 영국 모두에서 의사 생활을 한 우이혁 NHS 정신과 전문의도 "병원을 자주 이용하게 하는 시스템이 결코 좋다고 볼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입장 바꿔 영국인들이 한국인들을 보면, 툭하면 병원 찾고 약 먹는 모습에 '웬 호들갑?'이라 여기진 않을까.

한국에서는 환자가 자기 판단만으로 각종 병원을 '척척' 찾아간다고 하자,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던 한 GP의 표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실제 한국의 의료 이용량은 객관적으로도 매우 높다. 한국의 국민 1인당 외래 내원일수(2008년 기준)는 13일로 OECD 평균 6.8일의 약 2배다(OECD Health Data 2010).

사후치료보다 예방에 적극 투자하는 NHS

영국의 NHS(National Health Service)는 국가가 조세로 부담하고 관리하는 의료 서비스다. 아프면 누구나 담당 GP(General Practitioner, 일반의)의 처방을 받아 2,3차 진료기관에서 치료받을 수 있다.
 영국의 NHS(National Health Service)는 국가가 조세로 부담하고 관리하는 의료 서비스다. 아프면 누구나 담당 GP(General Practitioner, 일반의)의 처방을 받아 2,3차 진료기관에서 치료받을 수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그렇다고 영국 NHS가 국민들을 마냥 '방치'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꼭 필요한 사람은 비용 걱정 없이 신속하게 병원 서비스를 받게 함은 물론, 평상시의 건강관리도 세심하게 신경쓰고 있었다.

조세로 NHS 예산을 조달하는 정부 입장에서는, 국민들이 병에 덜 걸리도록 장려해 국민건강증진과 더불어 의료비 지출을 최소화하는 게 효과적이다. 때문에 영국도 비용이 많이 드는 사후적인 질병치료보다는, 비용대비 효과가 큰 예방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었다.   

국민 모두에게 배정된 GP는 일상적인 건강관리를 책임지는 첨병이다. GP 세리언 초이(Cerian Choi)씨는 자신을 '친구 같은 의사'로 표현하며 "일상적·지속적 환자 관리가 최대 장점"이라고 말했다. 에바-마리아 헴프(Eva-Maria Hempe, 케임브리지대 박사과정)씨는 "영국에선 1차 진료를 확충하기 위해 GP 양성에 힘을 쏟는다"며 "GP 급여 수준이 전문의에 비해서도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국민에게 꼭 필요한 건강검진의 경우, 정부가 꼼꼼히 챙기고 있었다. 박현미씨는 "여성의 경우, 2년에 1번씩 자궁경부암 검사를 하라고 NHS에서 연락이 온다"며 "1번 통보하고 마는 게 아니라 몇 번씩 귀찮게 연락이 와 결국엔 받게 만든다"고 말했다. 고혈압 치료를 하고 있는 영국 생활 5년차 김의식씨는 "정기적인 혈압검사는 물론, GP가 당뇨검사 등도 먼저 받으러 오라고 해서 받았다"며 "한국에 있었으면 신경도 안 썼을 텐데 영국에선 합병증 예방 차원에서 관리해 주는 것 같더라"고 전했다.

정부는 GP에게 지역 주민들의 건강 상태가 좋아질수록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유인책을 쓰기도 한다. 주민들이 담배를 끊거나 살을 빼거나 혈압/콜레스테롤 수치 등을 낮추면 추가수당을 받는 식이다. 지난 7월 영국을 방문한 김창보 시민건강증진연구소장은 "평소에도 '술·담배 끊어라, 식습관 조절해라'는 GP의 잔소리가 나오는 이유"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일까. 느려 터졌다고 조롱받는 영국의 평균수명은 한국에 비해 약간 길다. UN이 발표한 국가별 평균수명(2005~2010)에 따르면 영국은 79.0세, 한국은 78.2세였다. CIA(미국중앙정보국)이 발표한 월드 팩트북2011(World Factbook 2011)에서도 영국은 80.05세, 한국은 79.05세를 기록했다.

[바뀐 생각 ②] '국가계획' 의료, 효율적인 것도 많네

'국가의료'와 '국가계획'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한국에서는 국가가 주도한다고 하면 비효율적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러나 NHS를 유심히 살펴보니, 예상과 달리 효율적인 면이 상당히 많았다. 그 핵심은 의외(?)로 시장에 맡겨지지 않은 국가계획 중심의 의료제도 설계에 있었다. 대략 3가지 정도가 인상에 남는다.

우선, 영국에서는 한국 같은 '수도권 유명대형병원 쏠림현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우수 의료진과 환자들이 죄다 서울로 쏠리는 현상은 국가 전체적으로 보면 매우 낭비다. 가벼운 병이든 중한 병이든 대형병원으로 몰리는 현상도 환자 개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권'이 비합리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영국의 경우는 국가의 전체적인 계획과 가이드라인을 기초로 GP와 병원이 배치된다. 오지로 갈수록 의료접근성이 떨어지는 한계가 없진 않았으나, 한국에 비하면 지역격차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덜했다. 또한 정부에서 '오지 근무 GP에 인센티브', '이동진료소 확충' 등의 정책 마련을 통해 지역격차를 해소하려는 노력도 하고 있었다.  

특정 질병/대상(당뇨, 소아, 신경정신질환, 암 등)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특성화 병원 또한 지역별 인구수에 비례해 배치한다. 우이혁 전문의는 "영국은 어디에 살든 동일한 수준의 서비스를 받도록 하는 게 국가의 역할이라는 인식이 강하다"고 말했다. 또한 영국에선 GP가 '문지기'로서 꼭 필요한 환자만 (2차) 병원에 의뢰하기 때문에, 경하든 중하든 무조건 큰 병원을 찾는 현상은 구조적으로 발생할 수가 없었다.

둘째, 국가가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의료시스템이기에, 환자의 과거병력/가족력/신체정보 등의 기록공유를 통해 체계적인 건강관리가 가능했다. 한국에서는 병원을 옮길 때마다 증상이나 과거병력 등을 다시 설명하고 기록하는 게 일반적이다. 각종 검진 또한 병원별로 제각각 실시해 중복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반면 영국에서는 1-2차 의료기관 간 기록공유는 물론 협진 계획까지 함께 구성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김의식씨는 "GP에게 초진을 받을 때 각종 정보를 세세히 다 물어서 기록해 두더라"며 "나중에 다른 의사나 전문의를 만날 때도 공유가 돼 일괄적인 관리를 해줘서 편리했다"고 말했다. 영국생활 29년차 한현수씨도 "(2차) 병원에서 치료받은 기록도 다시 GP에게 넘어와, 환자가 무슨 병원에서 어떤 처치를 받았는지 한눈에 관리가 되더라"고 말했다. 물론, 기록공유는 환자의 동의가 반드시 전제된다.

통합적 환자관리, 소외되지 않는 응급·외상치료

영국 런던 시내의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에서 내려다 본 거리 풍경.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영국 런던 시내의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에서 내려다 본 거리 풍경.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환자가 병원에 입원할 때나 퇴원 시에는 GP가 NHS병원에 직접 방문하기도 한다. 전문의를 만나 추후진료계획을 함께 세우기 위해서다. 1~2차 의료기관의 협진체계가 자연스럽게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셋째, 런던의 앰뷸런스 서비스와 중증외상센터를 방문했던 순간도 인상 깊었다. 그곳에는 국민을 챙기는 국가가 살아 있었다. 한국은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투자가 미약해, OECD국가 중 외상센터가 없는 유일한 나라다. 많은 외상환자들이 응급 서비스의 대처가 늦고 받아줄 병원도 없어, 길거리를 떠돌다 죽어가고 있다. 정부의 방기 하에 시장에 내맡겨진 의료시스템의 어두운 단면이다.

응급치료 서비스나 중증외상센터와 같이 수요가 불확실하고, 상대적으로 저소득·노동자계층이 이용할 확률이 높은 분야는 국가가 나서야 한다. 영국 NHS는 당장의 '손익'에 급급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긴박한 위기상황이 닥치면 그 즉시 앰뷸런스 혹은 헬기까지도 의료진과 함께 출동시키고 있었다.

더 인상 깊었던 건, 이런 서비스의 제공을 전혀 낭비로 보지 않고 오히려 투자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로열런던병원 외상전문의 카림 브로히(Karim Brohi) 교수는 "외상환자는 만성질환에 비해 젊은 층들의 비중이 높다"며 "그들이 완치 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건 외상센터 운영 등의 치료 비용보다 훨씬 많다"고 강조했다.

보건복지 교과서에도 자주 적혀 있듯, 시장은 '근시안'일 가능성이 크다. 영국에선 국가가 그 공백을 메워, 촘촘히 사회안전망을 깔고 장기적으론 국가적인 손실을 미연에 방지하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다.

생소한 NHS 살펴보며, '인식의 전환' 계기 됐으면

물론 나의 모든 생각이 'NHS 친화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NHS는 사회전체적인 적절성에선 높은 점수를 받을지 모르나, (여러 현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개개인의 욕구에 따른 다양한 서비스 제공에서는 취약할 수밖에 없는 한계도 보였다.

이번 유러피언 드림 영국 취재는 단순히 영국과 한국식 의료제도의 우월을 논하려는 취지는 아니었다. 영국식을 그대로 가져오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익숙지 않은 대상을 살펴봄으로써 익숙한 우리 현실을 되돌아 보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NHS에는 그냥 무시하고 넘기기에는 아까운 장점과 특별함이 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제쳐두더라도, 추방 당하는 외국인이 중병에 걸렸을 경우 모든 추방 절차를 멈추고 치료부터 시키는 것 하나만으로도 NHS는 박수 받을 만했다. 취재 과정 동안 나의 생각이 여럿 바뀌었듯, 독자 여러분들도 생소한 의료제도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살펴보며 사유의 영역을 넓히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영국편 특별취재팀
:  남소연·박순옥 기자, 송주민 시민기자


태그:#NHS, #유러피언드림, #영국, #무상의료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