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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람이라면 누구나 치료받을 권리, 돈 때문에 목숨을 저울질하지 않아도 될 권리가 바로 무상의료다. 영국은 국가가 재정을 조달하고 의료 서비스를 관리하는 대표적인 무상의료의 나라다. 의료 서비스의 질과 재정 문제 등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60년 넘게 무상의료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의료 불평등과 의료시장 민영화 등 한국사회 의료 문제의 해법을 영국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딸이 영국에서 피검사 받는데 간호사 셋이 달라붙었다. 내가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데 간호사가 책을 읽어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 피를 다 뽑고 난 다음 다른 간호사가 딸에게 괜찮냐, 아프지 않냐며 위로해 줬다. 잘했다고 스티커도 붙여주고. '피 뽑는 데 왜 이 난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감동적이었다. 반면 아들은 한국 서울대병원에서 피검사 받았다. 간호사들이 '어허, 가만히 있어' '너 때문에 다시 뽑아야 하잖아' 이러면서 혼내더라. 아이는 얼어서 가만히 있고..."

영국 런던의 뉴몰든에 거주하는 박현미씨는 아들의 천식과 딸의 아토피 때문에 병원엔 이력이 난 사람이다. 그에게 영국과 한국 병원은 이렇게 달랐다. 

지난 10일(현지시간) <오마이뉴스> 유러피언 드림 특별 취재팀은 영국의 한인들을 만났다. 직접 겪은 영국의 NHS(National Health Service)에 대해 듣기 위해서였다. 참석자들은 생소한 영국 의료 시스템에 대해 불편을 호소하기도 하고 한국 의료 시스템에 대해서는 따끔한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방담에는 김문경·김의식 부부(영국 생활 5년차), 김용수 오마이뉴스 시민기자(5년차), 박현미씨(21년차), 한현수씨(29년차)씨가 참석했다.

알아서 다 낫는다? 의사가 하는 게 뭐야

"아이가 귀앓이를 심하게 했다. 아이의 베개를 봤는데 염증 터진 진물이 귀에서 흘러나와 흥건하더라. GP에게 갔더니 그냥 가라고 하더라. 이미 진물이 나왔으니 약 안 먹어도 된다고, 그냥 면봉에 올리브 오일 발라 닦아주라고 하더라, 자연치유될 거라고. 나중엔 정말 괜찮아졌다."(박현미)

영국의 GP(주치의, 일반의)는 환자들을 1차 진료해 경중에 따라 약을 쓸지, 상급 병원에서 치료할지 등등을 결정한다. 하지만 감기 같은 경우는 자연치유를 유도하고 약이나 주사 사용을 최소화한다. 김문경씨는 "눈이 아파 GP에게 갔더니 '모니터 많이 보지 마라' '스트레스 받지 말고 푹 자라' 등등 누구나 다하는 얘기를 해주더라"며 "처음엔 많이 답답했다"고 전했다. 한현수씨는 부인 사례를 들었다.

"아내가 너무 허리가 아파서 GP한테 MRI 찍어보겠다고 의뢰서 써달라고 했는데 죽어도 안 해주더라. 디스크는 아니니까 필요 없다고. 통증 완화하는 약 주고 운동하라더라.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어디가 아프다고 하면 이것저것 검사를 시키는 한국과는 확실히 다르다. 다행히 GP의 말대로 한씨의 아내는 좋아졌다. 그는 "당시엔 답답했는데... 정확히 짚어준 거였다"고 말했다.

약을 처방하지 않는 것도 의료행위라고 보는 듯

영국 생활 5년차  김문경씨.
 영국 생활 5년차 김문경씨.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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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GP)가 주사도 잘 안 놔주고 감기 걸려도 항생제 절대 안 주고... 한국 사람들은 처음엔 되게 어색해 한다." (한현수)

안구건조증이 심한 김문경씨도 "한국 안과에선 항생제 처방 받는 게 일상"이었다며 "여기서는 항생제 부작용 얘기를 많이 해서 그런가 무서워지더라"고 전했다.

"GP에게 항생제 처방해 달라고 하면 효과가 확실치 않은데 꼭 그래야 하냐, 안 먹어도 된다고 한다. 한국은 의료행위라고 하면 약 처방을 당연히 여기는데 여기선 약을 처방하지 않는 것도 의료행위라고 보는 것 같다."(김용수)

약물 사용을 최소화하기 때문에 정말 필요한 땐 효험(?)을 보기도 한다. 박현미씨는 "약을 잘 안 먹기 때문인지 약을 조금만 먹어도 잘 듣는다. 열이 날 때 가끔 아동용 해열제를 먹는데 아주 좋다"고 전했다.

GP의 존재 이유, 바로 이것 때문이야

"고혈압 때문에 GP한테 처음 진찰 받을 때였다. 가족력이나 식습관, 흡연-음주 여부까지 자세히 물어보고 다 기록해 두더라."(김의식)

영국 생활 5년차 김용수 해외통신원
 영국 생활 5년차 김용수 해외통신원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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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는 등록된 환자들의 건강 상태를 꼼꼼히 살핀다. 초진의 경우 30분 정도를 쓰는데 환자의 건강에 대해 전체적으로 파악한다. 개인별 건강기록은 컴퓨터로 저장되며, 우리나라처럼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분산되지 않고 개인별(혹은 가족별)로 관리된다. 김의식씨는 "건강기록은 다른 의사를 만날 때도 공유된다. 내 의료기록이 한 번에 관리되는 건데 다음에 진찰 받으러 가면 정말 편하다"고 전했다.

김용수씨는 "GP의 역할을 치료에만 한정하는 건 협소한 접근"이라며 "영국 의료의 중심은 GP"라고 지적했다. 치료뿐만 아니라 1차적인 건강관리, 병원 사이에서의 문지기, 지역사회기관과의 연계 등 다양한 역할을 한다는 것. 만성질환자의 건강관리도 GP의 몫이다.

"아이 천식 때문에 천식 담당 간호사를 정기적으로 만나야 한다. 오랫동안 가지 않으면 GP가 체크해서 꼭 만나라고 알려온다."(박현미)

고혈압이 있는 김의식씨는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당뇨 검사를 받기도 했다. 김씨는 "한국에선 관리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신경도 안 썼을 텐데... 참 좋았다"며 "이 나라가 내 건강을 염려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샌드위치 쿠폰도 주고... 정말 친절한 의료진

"영국 간호사들 참 친절하다. 마음에 드는 간호사들 참 많더라(웃음)."

한현수씨는 영국 의료진에 대해 '매우 만족'을 표했다. 담당하는 병상수가 적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환자 중심의 의료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아들의 천식 발작 때문에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에 갔다. 근데 처음 간 병원에 어린이 전용 중환자실이 없어서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 다음날 처음 갔던 병원 간호사가 우리 아이 병실로 전화를 해왔더라. 아이가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연락했다면서... 또 한 간호사는 내가 근심 어린 얼굴으로 있으니까 불쌍해 보였는지 샌드위치 사먹으라고 쿠폰을 주더라(웃음). 그런 세심한 배려가 참 좋았다."(박현미)

김문경씨는 "영국 의대생들은 모든 것을 환자 입장에서 처치하도록 교육 받는다고 들었다"며 "진심이든 아니든 그렇게 훈련을 받아서 친절한 것 같다"고 말했다.

수술실에서 걸어나온 환자... 순위에서 밀렸네

건강관리해 주는 GP에 친절한 의료진까지... 그런데 왜 한국 사람들은 영국 의료 서비스를 싫어할까. 바로 악명 높은 '대기시간' 때문이다. GP가 2차 병원에 진료를 의뢰하면 증세에 따라 진료순서가 정해진다. 중앙에서 관리하는 NHS에서나 생기는 문제다. 이 대기시간은 전문의 치료는 물론 수술실과 응급실에도 적용된다.

영국 생활 29년차 한현수씨.
 영국 생활 29년차 한현수씨.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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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옆구리 종기 때문에 수술을 받았다. 마취 끝나고 수술실 들어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더 급한 아이가 와서 먼저 수술을 시키더라. 물론 당시엔 좀 의아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우리 아이가 받을 수술이 그렇게 급한 게 아니었던 거다."(김용수)
"턱에 종양이 생겨 수술 날짜를 잡았는데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다음 달에 수술 받으면 안 되겠느냐고. 지금 암 환자가 들어왔는데 넌 암은 아니지 않느냐, 조금만 미뤄 달라 이러더라. 결국 미뤘지 뭐."(한현수)

생명엔 지장이 없다 해도 다만 5분이라도 빨리 통증을 없애고 싶은 게 환자의 마음이다. 때문에 위급성에 따라 순서를 정하는 NHS 시스템은 구조적으로 불만을 낳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역으로 시급하지 않은 수술이나 처치 때문에 다른 사람을 구할 기회를 놓치는 일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농담처럼 '기다리다 죽는다' 이런 경우가 있긴 하더라. 그런데 위급하다고 확인되면 바로 처리되는 것 같다. 생명이 위급한 사람 먼저다. 다리가 부러졌어도 생명에 지장이 없으면 일단 제쳐놓고 위급한 사람 먼저 해준다."(김의식)

주영 한인들의 건강관리 : 검사는 한국-치료는 영국

"어르신들이 한국에 들어가면 위 내시경부터 검사 싹 받고 온다더라. 영국에는 좀 이상하다고 해서 검사 못 받으니까. 그래서 잘못된 게 발견되면 영국에 와서 치료 받는다(웃음). 검사는 한국에서 받고, 치료는 영국에서 하는 거다."(박현미)

주영 한국인들은 한국 의료제도의 좋은 점으로 받고 싶은 의료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꼽았다. 박현미씨는 영국에서 실명한 한 아이의 사례를 언급하며 "한국에 갔을 때 조금이라도 빨리 치료를 받았다면 그나마 시력을 살릴 수 있었을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더라"고 전했다. 영국에서는 국가가 관리하기 때문에 고가의 의료장비를 들여오기 힘들다.

영국 생활 5년차 김의식씨.
 영국 생활 5년차 김의식씨.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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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의 욕구는 무한정인데 영국은 국가에서 관리하니 의료장비 등에 마음껏 투자할 수 없다. 환자 입장에선 단점일 순 있다."(김의식)

김의식씨는 "한국에선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정도로 경제력 있는 사람들에겐 이런 영국의 무상의료 시스템이 매력적이지 않을 것 같다"며 하지만 "영국은 최소한 돈이 없어서 진료를 못 받거나 어르신들이 돈 걱정 때문에 아파도 참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한현수씨도 "일반 국민 입장에선 NHS를 지지할 수밖에 없을 거다. BUPA 등 민간의료보험을 들려면 엄청 비싸다. 웬만한 경제력 아니면 하기 힘들다"며 "옛날엔 여행자까지 무료로 치료해 줬다는데 그런 면에선 굉장히 인간적인 제도"라고 평했다.

"어떤 제도든 완벽할 순 없다. 과소진료가 문제라곤 하지만 영국에선 의료행위에 치료 목적 이외의 다른 판단은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한국은 영리적인 목적이 많이 개입된다. 하지만 영국에선 경제적인 상품성을 이유로 환자들의 대우가 달라지지 않는다."(김용수)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영국편 특별취재팀
:  남소연·박순옥 기자, 송주민 시민기자


태그:#유러피언 드림, #N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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