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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재갑 작가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05년에 나온 <또 하나의 한국인>(눈빛)이라는 사진집을 통해서다. 표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흑인 혼혈소녀의 얼굴. 그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내게는 너무도 강렬해서 한동안은 어딜 가나 그 눈빛이 떠올랐다. 전쟁과 분단이라는 우리 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대변하는 그들의 삶을 사진에 담으면서 이재갑은 이 사회가 애써 외면하려 하는 기억을 마음속에 되살려냈다.

 

2011년에 이재갑이 꺼내든 기억은 바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의 역사다. <일본을 걷다>(살림). 1996년부터, 일본에 남아 있는 조선인 강제징용의 흔적들을 찾아나선 작가는 그 서러움 가득한 땅을 제목 그대로 한 발 한 발 걸으며 뼈저린 기억들을 사진에 담고 글로 썼다. 모두 다섯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후쿠오카에서 시작해 나가사키, 오사카, 히로시마를 거쳐 오키나와에서 끝나는, 16년에 걸친 '다크 투어리즘'의 기록이다.

 

사실 이런 책의 결론은 뻔하다. '이런 역사가 있었으니 잊지 말자'는 식. 하지만 '이런 역사'가 생생한 사진과 후손들의 절절한 증언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뻔한 결론으로 가는 길이 결코 뻔하지 않다. 강제징용의 흔적은 곧 죽음의 발자국이다. 사진이 절반, 글이 절반이라 하룻밤에도 내처 읽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죽음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동안 가슴을 짓누르는 '진실의 무게' 때문에 몇 번이나 책장을 덮고 쉬어야 했다.

 

 

강제징용 조선인의 피를 먹고 자란 '일본'

 

일본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약 100만 명의 조선인을 일본으로 강제연행했다(군속으로 전선에 동원한 37만여 명, 조선 국내에서 동원한 485만여 명을 더하면 약 600만 명을 강제연행한 셈이다). 탄광이 많은 후쿠오카 지쿠호 지역은 조선인 강제징용의 역사적 거점이었다. 그 가운데 1만여 명의 조선인을 강제징용한 아소 탄광. 그곳의 창업주는 2008년에 일본 총리를 지낸 아소 다로의 증조부다.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해서 한 것", "위안부 강제동원의 증거는 없다" 등 '망언 제조기'로 유명한 아소 다로. 아소 가문은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에게 지금껏 단 한 번도 사죄한 적이 없다. 그리고 당시의 아소광업과 지금의 아소시멘트는 같은 회사지만, 법인이 소멸됐다고 해서 법적 책임도 지지 않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또 하나 나온다. 군수업을 바탕으로 일본 굴지의 재벌로 성장한 미쓰비시. 미쓰비시 소유의 탄광이 있던 나가사키 지역의 하시마 섬은 당시 노동자들로부터 '지옥섬'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리고 그 가까이에 있는 미쓰비시 조선소에서는 500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 가운데 122명이 죽었다.

 

하지만 미쓰비시 역시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이른바 '99엔 소송'의 주인공도 바로 미쓰비시다. 2009년 일본 후생성은 조선인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에게 후생연금 탈퇴수당 99엔을 66년 전 액면가 그대로(약 1300원) 지급했다. 미쓰비시가 체불한 임금까지 합하면 지금 돈으로 무려 4조 원이 넘는다. 이 사건이 한국에서 논란을 일으키자 미쓰비시는 협상을 약속했지만,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다.

 

죽음의 기억을 지키는 이들은 왜 우리가 아닌가

 

억장이 무너진다. 하지만 그들에게 분노하면 할수록 더 부끄러운 우리의 알몸을 확인하는 것 같아 비참하다. 계속되는 그들의 '만행'을 나무랄 자격이 우리에게 있나? 그들이 강제징용 역사의 공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 하고(나가사키 하시마 탄광) 놀이공원으로 만들 때(후쿠오카 야하타 제철소), 우리는 친일 부역자들이 그대로 권좌에 앉아 나라를 차지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꼴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던가.

 

일하다 죽은 강제징용 조선인의 주검은 그대로 버려졌다. 누가 언제 왜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게. 함께 일하던 동포들이 밤을 틈 타 몰래 주검을 수습해 산속에 묻고는, 그들만이 알 수 있는 작은 흔적을 남겼다. 그래서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무덤을 찾아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현지에 남아 있는 재일조선인들이나 그 슬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일본인 활동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다.

 

이 책을 읽으며 그래도 희망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들의 존재 때문이다. 우리는 까맣게 잊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한스런 죽음. 하지만 그 죽음을 기억하는 일을 평생의 과제로 삼고 살아온 이들의 존재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후쿠오카 강제징용 조선인 추모시설 '무궁화당'을 세운 배래선 선생, '조선인 강제연행을 생각하는 모임'의 오노 세츠코 선생, 히로시마 강제징용 역사를 기록하는 우츠미 선생 등.

 

그리고 기금을 후원하거나 진상규명 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이들 덕분에 희생자 유해 발굴이 이뤄질 수 있었고 작은 추모비나 기념관이라도 지어질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망간 탄광 강제징용자들을 기리는 단바망간기념관 건립이나 우토로 조선인 마을 재건도 그들의 손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 이들의 존재가 한없이 고맙고 다행스럽게 느껴졌지만, 그만큼 우리를 돌아보는 시선은 더욱 부끄러워졌다.

 

 

일본에 가거든 10초만이라도 이들 앞에 고개 숙이자

 

돌 하나 풀 하나까지 과거와 물리적으로 연결해 재해석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은 큰 부담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인간의 존재 이유를 되묻게 하는 증거들은 때때로 무서운 통증으로 다가온다. - 본문 324쪽

 

이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작업을 해낸 작가의 말이 변명처럼 들리지 않는다. 16년이 걸린 작업, 70년 전의 역사, 그리고 그 속에 담긴 100만 명의 삶과 죽음. 350쪽짜리 책 한 권의 무게가 천 근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손쉽게 책상 앞에 앉아 진실을 만날 수 있도록 그 무게를 견뎌낸 작가의 '희생'이 존경스럽다.

 

우리가 일본을 여행하면서 많이 찾는 오사카궁에도 강제징용 조선인들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지척에 우토로 마을이 있고 '제2의 우토로'인 아파치 마을이 있다는 사실을 몇이나 알까. 작가는 작업을 하는 동안 "계속 무언가 따라다니는 환영을 지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강제징용 조선인들의 원혼 아닐까? 그들은 자신의 후손들이 일본을 '온천과 라멘의 나라'로만 기억하는 것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일제강점기 재일조선인의 삶은 한마디로 표현됩니다. 현재 일본 내에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철도 침목 하나가 조선인 한 명'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 재일조선인 배래선 선생의 말, 본문 105쪽)

 

일본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보고, 그들의 여행코스에 조선인 강제징용 유적을 한 곳만 포함시키면 좋겠다. 조선인의 목숨과 바꿔 만든 철길을 따라 일본을 여행하는 조선인의 후손들이 그 침목에 담긴 자신의 역사를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무래도 죄스럽다. 살아서 버림받고 죽어서 잊힌 그들을 위해 단 10초만이라도 그들의 흔적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 우리의 망각을 사죄하는 작고도 무거운 실천이 될 거다.

덧붙이는 글 | <일본을 걷다> 이재갑 씀, 살림 펴냄, 2011년 8월, 342쪽, 1만4800원


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 - 생생한 사진으로 만나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잔혹사

이재갑 글.사진, 살림(2011)


태그:#일본을걷다, #강제징용, #이재갑, #살림, #일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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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는 사람. <사다 보면 끝이 있겠지요>(산지니, 2021) 등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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