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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기념하라> 표지
 <악을 기념하라> 표지
ⓒ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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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산시 평산동에 있는 코발트광산. 이른바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의 현장이다. 그런데 한때 이곳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유명해진 일이 있었다. 젊은이들 사이에 '공포체험' 장소로 알려진 것. 아직도 인터넷에는 이곳을 "'등골 오싹' 공포체험 성지 베스트 10"으로 소개하는 기사가 버젓이 검색된다.

수천의 원혼이 잠들어 있는 곳이 몰지각한 이들의 놀이터가 돼버린 것. 그들의 치기에 화가 나는 한편, 부끄러운 마음을 지울 길이 없다. 우리는 국가폭력의 상처를 '기념'하는 일에 어찌 이토록 무심했나. <악을 기념하라>(김성환, 보리, 2021년)라는 책의 제목은 그래서 내게 마치 채찍처럼 느껴졌다.

저자 김성환은 독일 곳곳의 강제 수용소 기념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나치와 동독 공산주의 체제가 저지른 참혹한 국가폭력의 역사를 확인했다. 그리고 고통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독일이 어떻게 과거를 기념하는지 이야기하며, 그것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와 해답을 주는지 끊임없이 모색했다.
 
"라벤스브뤼크의 피에타를 과거 세대, 호수 건너 마을을 현재 세대, 또는 미래 세대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이에는 큰 호수가 가로막고 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이곳의 피에타가 늘 마을을 향해 애타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이 책을 쓴 뜻이 바로 거기에 있다."(477쪽)

"가해자의 삶도 낱낱이 기록해야 한다"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경산 코발트 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의 진실을 규명했다. 1950년 7~8월 국민보도연맹원 및 대구형무소 재소자들이 경찰과 군인에 의해 집단 사살된 사건. 전체 희생자 수는 1800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했고, 그중 127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또한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 사과 ▲위령사업 지원 ▲명예회복 조치 ▲평화인권교육 등을 국가에 권고했다. '평화인권교육' 권고가 제대로 이행됐다면, '공포체험 명소'와 같은 촌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과거를 기억하는 주체는 오늘을 사는 피해자 세대가 아니라 미래 세대라고 생각한다. (…) 미래 세대의 행복 조건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과거와 같은 국가폭력이 다시는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국가폭력의 현장을 보존하고 그곳에서 지속적인 시민 교육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476쪽)

그런데 한 가지, 책을 읽으며 답답한 마음이 들었던 때가 있다. 바로 '가해자'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다. 우리 사회의 과거사 정리 작업이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바로 '가해자에 대한 기록' 문제이기 때문이다.

긴 세월이 지나 국가폭력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더라도, 가해자들은 여전히 공개되지 않는다. 여전히 사과하지 않고, 여전히 처벌받지 않는다. 저자 역시 "가해자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 피교육자들이 스스로 판단하는 시대가 오기까지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일까"(475쪽)라고 탄식했다.

저자는 남영동대공분실인권기념관추진위원회 상임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남영동은 한국 현대사의 '드러난 상처'가 되어야 한다"(194쪽)는 생각으로, 독일에서 얻은 교훈들을 한국의 남영동으로 연결시켰다.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가 걸은 삶의 과정도 낱낱이 기록해야 한다. (…) 불의한 권력에 대한 시민 사회의 무관심과 용인, 나아가 지지가 있었다면 그러한 우리 사회에 대해 함께 반성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때 비로소 기념관은 과거를 박제화하지 않고 오늘의 교육 현장으로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194쪽)

국가폭력 사건에 대한 과거사 진실규명은 단순히 과거에 머무르는 일이 아니다. 바로 현재 우리 사회의 정의의 기준을 세우고 지키는 일이다. 우리는 자라나는 세대에게 '속죄 없는 용서'만을, '기념 없는 추모'만을 남길 것인가. <악을 기념하라>가 우리 공동체에 던져놓은 숙제는 무겁기만 하다.

악을 기념하라 - 카체트에서 남영동까지, 독일 국가폭력 현장 답사기

김성환 (지은이), 보리(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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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는 사람. <사다 보면 끝이 있겠지요>(산지니, 2021) 등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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