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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전직 장군의 국립묘지 안장을 놓고 논란이 뜨겁습니다. 예비역 육군소장 출신으로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낸 고(故) 안현태씨가 논란의 당사자입니다. 지난 6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에서 사망(6월 25일)한 지 40일 만에 그의 안장식이 열렸습니다. 이는 국가보훈처가 안장 결정을 내린 지 하루 만에 전격적으로 치러진 것으로, 이 자리에는 유족과 5공 인사 몇 명만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일각에서 '도둑 안장'이란 말이 나온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현행 국립묘지 관련규정에는 장관급 장교(장군)도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도록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안씨가 논란이 된 것은 그가 전두환 신군부의 핵심인사이자 '5공 비리'에 연루돼 실형을 살았다는 점입니다. 참고로 '금고 이상의 형을 받고 집행유예 중에 있는 자' 등 결격사유가 있는 경우 국립묘지 안장을 불허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주무부서인 국가보훈처는 그가 사면복권 됐으며,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대통령 경호실장을 지내며 국가안보에 기여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합니다.

"드골은 위대하지만 그도 한 명의 시민일 뿐"

대전지역 시민단체 회원들이 8일 안현태 씨 묘소 앞에서 이장 촉구 집회를 열고 있다
▲ 국립묘지에 안장된 '쿠데타 주역' 대전지역 시민단체 회원들이 8일 안현태 씨 묘소 앞에서 이장 촉구 집회를 열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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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프랑스의 나치 숙청 관련 글을 하나 쓰면서 나치협력자 재판을 총지휘한 드골 장군에 관한 글 한 편을 읽게 됐습니다. 필자는 여러 매체에서 오랫동안 파리특파원을 지낸 원로 언론인 주섭일(74)씨. 주씨는 파리특파원 시절인 1979년 드골 장군의 묘소와 고택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2008년 드골 기념관 개관을 계기로 2009년 첫 방문 이후 30년 만에 그곳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는 글 첫머리에서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학자 모리스 아귀롱의 책 얘기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주씨에 따르면, 좌파사학자로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아귀롱은 우파인 드골 장군에 대해서는 추호의 관심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촌구석 공동묘지 한구석에 '서민과 똑같은 높이와 넓이'의 드골 묘지를 방문한 후 충격을 받고서 <드골, 역사, 상징, 신비>라는 책을 썼다고 합니다. 물론 이 책에서 아귀롱은 드골에 대한 한없는 존경심을 담았구요.

드골의 묘소는 30년 전이나 마찬가지로 외국인이 혼자 찾아가기 힘든 촌구석에 있습니다. 드골의 묘소가 있는 '콜롱베 레 드제그리즈' 마을은 파리에서 250km 동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자가용이 없으면 갈 수 없는 그런 두메산골이라고 합니다. 파리발 급행열차로 쇼몽시에 내려 택시를 타고 20분 달려서 콜롱베 마을에 도착한 주씨는 택시기사에게 "셔틀버스라도 마련해야지 드골과 같은 위인 기념관에 버스도 없다니 말이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택시기사 왈, "드골은 위대하지만 그도 한 명의 시민일 뿐"이라고 답하더라는 겁니다.

흔히 드골은 '대통령'보다는 '장군'으로 불립니다. 그는 1912년 생시르 사관학교를 나와 제1차 세계대전 때 육군 중위로 참가해 최고훈장을 받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제5군단 소속 기갑여단을 이끌고 참전한 드골은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런던으로 망명하여 '자유프랑스'를 세웠습니다. 이후 연합군의 일원으로 나치독일과 싸우는 한편 프랑스 국내에 레지스탕스를 조직해 나치와의 내전을 총지휘하기도 했습니다. 1944년 파리 해방과 함께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한 드골은 나치협력자 청산에 진력하였으며, 이후 오늘의 프랑스를 만드는 데 기틀을 다졌습니다.

드골 장군
 드골 장군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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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개정 헌법안이 통과돼 이듬해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 드골은 7년간에 걸친 알제리 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였으며, 1965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었습니다. 그러나 1968년 5월 파리학생혁명이 일어나고 이듬해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패하자 '드골 시대'가 끝났다며 콜롱베 시골집으로 귀향했습니다.

이후 <희망의 회고록>을 집필하며 소일하던 그는 숨을 거두던 그날도 평소처럼 일어나 회고록을 쓰고 산보를 하고 아내와 차를 마시고 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텔리비전 저녁뉴스를 켜다가 의자에서 쓰러지자 그의 아내는 직감적으로 그가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알고 의사와 신부를 불렀습니다. 그로부터 두 시간 뒤 드골은 숨이 멎었습니다. 1970년 11월 9일, 프랑스의 '위대한 군인' 드골은 90세로 이렇게 삶을 마감했습니다.

드골은 자신의 장례식을 고향마을에서 조촐하게 가족장으로 치르도록 유언하였는데 이는 그가 죽기 18년 전인 1952년에 작성해둔 것입니다. 그때 장지도 아예 못 박아 뒀습니다. 프랑스에는 거물인사들이 묻히는 '판테옹'이라는 곳이 있는데 우리로 치면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이나 대통령 묘역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드골은 판테옹 대신 고향마을 공동묘지에 자신을 묻도록 유언했습니다. 그곳엔 20세에 폐결핵으로 죽은 딸 '안'의 무덤이 있었는데, 드골은 바로 '안'의 곁에 묻히길 원했습니다.

드골의 장례식을 보도한 당시 기사에 따르면, 고향마을에 안치된 드골의 유해는 길이 2미터 20센티미터의 참나무관(棺)에 입관돼 프랑스 군 장갑차에 실려 마을 교회로 옮겨졌고, 장례식 당일 마을청년 6명이 운구하였습니다. 이어 가족과 3군 의장대가 참석한 가운데 간소한 장례식이 치러졌고 그는 마침내 사랑하는 딸 곁에 묻혔습니다. 드골 묘소는 기념관에서 600m 거리인 동네 한복판 성당의 공동묘지에 있는데 십자가 말고는 아무런 장식물도 없습니다. 묘석에도 '샤를르 드골 1880-1970'이라는 그의 이름과 생몰연대 외에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주씨는 기념품 상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드골의 '유서'를 1부 샀습니다.

"장례식은 아들, 딸, 사위, 며느리가 간단히 치르기 바란다. 나는 국민장을 바라지 않으며,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관료들의 참석을 원하지 않는다. 오직 군대만이 참가하기 바라며, 어떤 음악, 어떤 군악 연주도 하지 말라. 어떠한 연설도 하지 말라. 침묵으로 의식이 집행되어야 한다. 나의 가족, 프랑스 해방의 레지스탕스 동반자, 콜롱베 마을 시의회 의원만이 장례식에 참석하라…."

그의 참나무관 길이 2미터20센티는 그의 아내 이본느 여사의 '명령'이었다고 합니다. 이 길이는 콜롱베 마을 시민들의 관과 똑같은 크기라고 합니다. 불과 368명의 동네 주민들과 프랑스 국민은 장군의 장례식을 치르며 "장군을 이렇게 보내서야"라며 울었다고 당시 언론은 기록했습니다. 주씨는 드골의 유서에 대해 '한 시민으로 태어나서 국민에게 봉사하고 다시 시민으로 돌아가 땅에 묻힌다'는 드골의 애국심이 읽혀진다고 적었습니다. 별다른 오점 없이 살았고, 또 오직 조국 프랑스의 번영과 영광만을 위해 산 드골이었지만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은 지극히 소박하고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가족장으로 치른 후 고향마을 공동묘지에 마련된 드골의 묘소. 주변의 다른 묘소와 아무런 차이도 없고 묘석엔 이름과 생몰연도만 적혀 있다.
▲ 드골 장군의 묘소 가족장으로 치른 후 고향마을 공동묘지에 마련된 드골의 묘소. 주변의 다른 묘소와 아무런 차이도 없고 묘석엔 이름과 생몰연도만 적혀 있다.
ⓒ 주섭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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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안중근 묘지, 용산구청이 '공원시설'로 관리

다시 글 첫머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드골도 안현태씨도 모두 장군 출신입니다. 물론 두 사람을 맞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명색이 '별'을 단 사람들로서 애국심이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자세는 근본적으로 별 차이가 없을 걸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마지막 가는 길은 너무도 차이가 크군요. 안씨가 국립묘지에 묻힐 자격이 충분하고 또 아무런 논란거리도 없었다면 모를까 세상 사람들 대다수가 적절치 않다는데도 굳이 논란을 일으켜가면서까지 국립묘지에 묻히는 이유가 대체 무엇입니까?(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혹 제3자들이 다른 이유로 강행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서 국립묘지에 묻히면 고인이 과연 흡족해 할까요?)

국립묘지를 일러 흔히 '민족의 성지(聖地)'라고 합니다. 나라와 민족 위해 몸바친 애국선열이나 호국용사들이 잠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 국립묘지는 '신성함'을 상실했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선열 옆에 버젓이 묻히는가 하면 민주헌정 파괴자나 범죄자들도 공공연히 묻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안씨 매장 관련 글에서 한 독자는 댓글을 통해 "국립현충원을 쓰레기 매립장으로 만들 것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국립묘지가 이런 자들의 묘지로 전락한다면 국가예산을 들여 국립묘지를 관리할 필요가 있는지, 또 국립묘지를 계속 운영할 것인지도 재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 묘소와 함께 용산구청에서 '공원시설'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비석이 없는 왼쪽 끝이 안중근 의사 가묘임
▲ 효창공원에 있는 3의사 묘소와 안중근 의사 가묘 백범 김구 선생 묘소와 함께 용산구청에서 '공원시설'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비석이 없는 왼쪽 끝이 안중근 의사 가묘임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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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탄할 일은 또 있습니다.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는 백범 김구 선생과 임정요인 세 분(이동녕, 차이석, 조성환), 그리고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묘역이 있고, 또 안중근 의사의 가묘(假墓)가 있습니다. 백범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냈으며, 3의사와 안 의사는 일제하 항일투쟁의 상징과도 같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이 분들의 묘지는 국가보훈처가 아닌 용산구청이 '공원시설'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곳 묘역을 '효창원'으로 바꿔 부르고 또 예우도 국립묘지 수준으로 격상시켜 성역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오래 전부터 있어 왔지만 관계 당국은 여전히 묵묵부답입니다.

벌써 국립묘지로 모셔왔어야 할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수유리묘지에는 성재 이시영(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해공 신익희(건국훈장 대한민국장), 가인 김병로(문화훈장, 건국훈장 독립장) 선생의 묘소가 있으며, 망우리 공동묘지에는 만해 한용운(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위창 오세창(건국훈장 대통령장), 소파 방정환(문화훈장, 건국훈장 애국장 ) 선생의 묘소가 쓸쓸히 방치돼 있습니다. 공(功)으로 치자면 안현태씨의 열배도 넘을 분들이 여태 국립묘지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래놓고도 보훈처는 애국선열에 대한 국가차원의 예우를 다했다고 주장할 것인가요?

안현태씨, 자칫하면 세번 죽는 셈

친일언론인 서춘
 친일언론인 서춘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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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국가보훈처는 친일행적이 드러난 독립유공자 19명에 대해 '서훈 취소' 결정을 내린 바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잘못 준 훈장을 다시 빼앗은 셈입니다. 당초 친일여부를 제대로 심사했다면 이들 19명에게 훈장을 주는 일 자체가 없었겠지요. 그런데 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서훈 취소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두 번쨉니다.

지난 1996년에도 친일언론인 서춘(徐椿) 등 5명의 서훈을 취소한 바 있습니다. 서춘의 경우 묘소가 당시 대전현충원에 있었는데 서훈이 취소되면서 묘소가 문제가 됐습니다. 서훈이 취소됐으니 국립묘지 안장 자격이 상실됐고, 국가보훈처는 유족에게 이장을 요구하였습니다. 당시 그의 후손은 '서훈 취소결정 취소' 소송을 냈으나 패소하였고, 결국 서춘의 후손들은 2004년에 그의 묘소를 이장하였습니다. 

이제 결론을 내릴까 합니다. 안현태씨의 경우도 마찬가지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안씨처럼 '오점'이 많은 사람도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도록 한 현행 법규가 개정되거나 또는 특별법이 만들어진다면 그는 언제든지 이장될 수 있습니다. 현행 합법을 이유로 매장했다면 또다른 합법을 근거로 다시 파낼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서훈 취소해서 이장시키듯이 말입니다. 물론 파내기 전에 유족 등 관계자들이 스스로 이장을 한다면 얘기는 간단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국회나 시민단체가 나설 수밖에요. 안씨는 이번 일로 두 번 죽은 셈입니다. 만약 강제로 그의 묘를 파낼 경우에는 세 번 죽는 셈이 될 것입니다.   

(첨언할 것은 국가보훈처의 문제입니다. 당초 국방부 소관이던 국립묘지 관리 업무가 보훈 유관 업무라고 해서 몇 년 전에 보훈처로 이관됐습니다. 그런데 광주5.18 행사 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질 못하게 하질 않나 이번에 안씨 매장의 경우엔 졸속 심의를 하질 않나 그야말로 본분을 망각한 처사를 연발하고 있습니다. 장차 좋은 세상이 오면 국가보훈처의 대수술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태그:#안현태, #드골 장군, #국립현충원, #효창원 , #주섭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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