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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갑작스런 격발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K-2 소총을 가슴께에 움켜잡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던 부사수의 눈동자였다. 시간이 지난 지금, 그 부사수의 이름은 잊혀졌지만, 나는 아직도 그날 일을 잊지 못한다.

 

2010년 8월, 나는 육군 소속 상근예비역으로 군생활을 마쳤다. 상근예비역은 '**방위', 'UDT(우리 동네 특공대)' 등의 애칭(?)으로 현역병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받았던 '방위병'의 후예로, 간단히 정리하면 '출퇴근하는 징집 군인'쯤 되겠다.

 

내 고향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이라 인력과 물자의 수송이 원활할 수 없었던 탓에 예전부터 지역의 징집대상자들을 방위병으로 써왔고, 나 역시 그러한 전통(?)에 따라 상근예비역으로 복무한 것이다.

 

5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집에서 버스로 10분 거리에 있는 대대 본부로 자대 배치를 받은 나는 그곳에서 이등병 생활을 하다가, 이후 소집해제까지 1년 반 정도를 해안 소초에서 근무했다. 내 임무는 그곳에서 현역병들과 같이 조를 이루어 경계 근무를 서는 것이었다.

 

해안 소초는 열상감지장치(TOD)나 해상레이더 등으로 감시할 수 없는 사각지대의 주야간 경계 임무와, 적의 접안 침투 시 일차적으로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곳이다. 내용과 형태 면에서 군사분계선 부근의 소초들과 동일하다. 주변의 해안선을 따라 흔히 지피(GP)라고 부르는 감시 초소가 곳곳에 세워져 있고, 민가를 불과 수백 미터 거리에 두고 일주일에도 몇 번씩 해안 사격훈련을 한다.


매일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경계 근무를 서는 것은 상당한 인내심을 요구한다. 지루해질 만하면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이 쑤시고 들어오는 통에 항상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다. 밤낮이 바뀌는 생활과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과도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외부와 차단된 채로 생활하는 것 자체가 현역병들에겐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처음 한두 달 멀쩡하던 사람들도 교대를 앞두고는 점점 신경이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져갔다. 히스테리가 거의 최고 수준인 소초 근무자 교대 무렵이면 상근예비역인 나로서는 조용히 근무를 서고 퇴근하는 것이 현역병들과의 괜한 시비를 막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나를 향한 총소리...그날 해안초소에선 무슨 일이?


소집해제가 눈앞에 아른거리던, 계절로는 딱 이맘때의 일이다. 바로 뒷편에서 '탕' 하고 총 쏘는 소리가 났을 때 나는 초소 창가에 바짝 기대 바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사수한테는 한 걸음쯤 뒤에 서서 측후방 감시를 지시해놓은 상태였다. 자대 배치를 받고 소대로 전입을 온 지 얼마되지 않은 현역병 부사수와의 첫 근무 날이기도 했다.

 

다행히도 부사수가 쏜 것은 실탄이 아닌 공포탄이었다. 이등병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급된다 하더라도 실탄이 든 탄알집을 상대방의 탄입대에 넣고 자물쇠로 잠근 후 서로 열쇠를 교환하도록 되어 있다. 근무 중에 사수나 부사수가 상대방 몰래 혼자서 실탄을 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자 땅딸막한 체구의 부사수는 더듬거리며 "모르겠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방아쇠 뒤에 끼워 놓은 격발 방지목이 빠져 있고 조정간이 격발 가능 상태로 바뀌어 있는 것이 좀 의아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실수로 방아쇠를 당긴 모양이었다.

 

일단은 나보다도 더 놀라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 부사수를 안심시켜야 했다. 곧 근무자가 교대되었고 근무 후 상황실로 돌아온 나는 소초장과 잠시 이야기를 했다. 바로 알려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실탄이 아니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별 생각 없이 퇴근을 했다. 문제는 다음 날에 벌어졌다.

 

아침에 출근을 했는데 현역병 동기 한 녀석이 다가와서는 대뜸 "걔, 자살 시도했어"라고 말했다. 어제 같이 근무를 섰던 부사수의 손목에 날카로운 것으로 베인 듯한 자국이 발견되어 소초장과 상담 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놀라운 일이 있었다. 자해 시도를 한 부사수의 필체로 소초원들을 다 죽이고 소초를 탈출하겠다는 내용이 쓰인 메모가 발견되었고, 거기에는 같이 근무 서는 나를 기절시킨 후 실탄을 꺼낸다는 아주 상세한 계획이 담겨 있었다. 녀석의 개인 사물함에서는 종이로 싼 커다란 돌멩이가 나오기도 했다. 그 신병은 이튿날 국군병원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갔고, 나는 그 사건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역을 했다.

 


끊임없는 총기사건의 원인은 '고립감'이 아닐까


해병대 총기사건을 뉴스로 접하자마자 내게는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정작 그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잘 몰랐고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지금에 와서 기억을 더듬다보면 심장이 쿵쿵거린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구상을 하던 어젯밤에도 잠을 설쳤다. 나는 그때 죽을 수도 있었다.


그 친구가 정말로 나를 기절시킨 다음 실탄을 빼내어서 소초를 뒤집어엎으려고 했는지, 아니면 그냥 상상으로만 그러고 만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공포탄을 발사했던 순간에도 정말 실수로 격발을 한 건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내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 나를 겨냥해서 쏘았던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이 있다면, 어느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을 더듬고 안절부절 못하는 버릇이 있던 그 신병은 굼뜨기까지 해서 전입오자마자 고참들한테 답답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국방부는 이번 해병대 총기사건에 대해 '기수열외'를 가장 큰 원인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번 사건과 2005년 연천 군부대에서의 총기 난사 사건, 내가 겪었던 일은 모두 외부와 고립된 소초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일어났다. 폐쇄적인 환경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가혹행위 혹은 심리적 압력을 받는 개인이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한 것이다.

 

기수열외와 같은 왕따 문화와 더불어 구타와 가혹행위 등을 뿌리뽑는 것은 물론 필요하지만, 소초라는 극도로 단절된 상황과 어느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끔찍한 사고를 낳은 중요한 원인이라는 점에서 조금 더 거시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군대는 조직의 특성상 구성원의 자유가 일정 정도 제한되고 이는 개인에게는 큰 스트레스이다. 따라서 조직 내에서 구성원 간의 원활한 소통과 갈등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번과 같은 사고는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항상 큰일이 터진 다음에야 부랴부랴 뒷수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는 병영문화가 조성되었으면 한다.

 

지휘관뿐만 아니라 민간의 전문가들이 극단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병사들의 어려움을 들을 수 있는 창구도 더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병사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부당한 행동이 언제든지 처벌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분위기가 부대 내에 형성되어야 한다. 가슴 아픈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김정현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생 기자단 '오마이프리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해병대, #총기사건, #국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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