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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안암동 소재 고려대학교. 대학본관과 인촌 김성수 동상.
 서울 성북구 안암동 소재 고려대학교. 대학본관과 인촌 김성수 동상.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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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고대 본관 앞에 있는 설립자 인촌 김성수의 동상에 쇠줄을 걸었다. 일제의 황국신민화에 협력했던 전 <동아일보> 사장 인촌 김성수를 '민족대학'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고대에서 추방해야 했다. 5천여 명의 학생이 모여 동상을 끌어내리려고 쇠줄을 걸고 싸웠다. 하지만 고대에서 인촌 김성수의 이름을 지워내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고대생이 된 1990년대 초반에는, 고대 안에 있는 '인촌기념관'을 '제2학생회관'이라고 불렀다. 친일파 인촌 김성수를 고대에서 기념하고, 인정하기가 싫어서였다. 그때의 고대생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민족고대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자 싸웠던 그 기억을 말이다.

2011년, 20여 년이 흘렀다. 정부에서는 도로명을 바꾸고 있다. 고대 출신의 대통령이 지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행정부의 행정구역 정비사업을 이르는 말이다. '○○로' 하면서 명망가들의 이름들이 속속 우리의 친근한 동네 이름들을 대신하고 있는 것.

내가 사는 서울 성북구 안암동 주변 개운사 들어가는 길도 예외는 아니었다. '개운사길'이 '인촌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친일파의 이름을 길 이름으로 쓸 수는 없다고 시민단체와 개운사 관계자들 그리고 주민들이 반발했다. 비난 여론에 못 이긴 성북구청은 길 이름을 다시 '개운사길'로 되돌리겠다고 5월 26일에 발표했지만, 여전히 뭔가 찜찜하다.

일단락된 일처럼 보이지만 언제 다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인물들이 도로명에, 우리의 주택가 길의 이름에 등장할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에게 현실의 이름으로 역사의 망각을 강요할지 모른다.

2005년에 만들어진 고려대 총학생회 산하 일제청산위원회의 기자회견 모습. 뒤로 인촌 김성수의 동상이 보인다.
 2005년에 만들어진 고려대 총학생회 산하 일제청산위원회의 기자회견 모습. 뒤로 인촌 김성수의 동상이 보인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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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설립자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대학생들

난 1989년 인촌 김성수의 동상에 쇠줄을 걸었던 학생들의 패기와 고대의 자부심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이번 '인촌길 명명사건'도 적어도 고대 학생사회에서는 빅이슈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 인촌로 명명사건은 학생들의 관심 밖이었다. 관심 있는 학생들도 일부 있었지만 많은 학생들은 도로명 따위(?)에는 관심을 둘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물론, 관심 있는 학생들이 한가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등록금 천만 원 시대다. 대학에는 학과 공부에, 아르바이트에, 취업 준비에 시달리는 학생들로 가득하다. 고대라고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 고대 경영학과 학생 김예슬은 "대학은 사회와 거리를 두는 비판적 지성과 진보의 요람이 될 수 없다"라는 회의적인 결론을 내리고, 어렵게 잠 못 자가며 들어온 대학을 그만두었다.

과연 우리 사회에서 대학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인촌길 명명사건을 보면서 다시 하게 되었다.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친일파의 이름이 도로명으로 공공연하게 등장하는 모습과 자본에 포위된 대학이 비판적 지성인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현실이 참 안타깝다.

이러한 대학의 모습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현 정부는 특히나 그런 젊은이들이 고마울 것 같다. 대학생들이 등록금에, 생활비에 시달리느라 딴 생각할 겨를 없어서, 적어도 대학생들한테서는 역사를 바로잡자는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무관심 속에 얼렁뚱땅 '인촌로'를 만들려고 하는 행정당국의 모습을 우리는 계속 지켜봐야한다. 그리고 역사를 기억 저편에 묻으려는 일당의 세력과도 싸워서 정확하게 기록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29일에는 반값 등록금 공약 이행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70여 명을 강제로 연행하면서, 과거는 묻고 대학생들의 요구를 묵살하는 2011년 대한민국 정부는 우리의 어떤 요구를 실현하고 있는가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5월이다.


태그:#친일청산, #김성수, #안암동, #인촌로,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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