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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에 소재한 전북 기념물 제21호인 이정직선생 상가
▲ 이정직생가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에 소재한 전북 기념물 제21호인 이정직선생 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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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에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초가가 한 채 있다. 이 집은 150년 전에 지어진 농가로, 어느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초가이다. 일반적인 민초들의 초가보다도 비좁은 이 집은, 조선조 말기의 뛰어난 유학자인 석정 이정직(1841~1910) 선생이 살다가 운명한 집이다.

석정 이정직 선생은 조선조 말 헌종 7년인 1841년 김제에서 태어나, 뛰어난 유학자로 27세에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수행하여 북경으로 갔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선생은 중국의 시문학에 대한 고증과 논평, 양명학 등을 두루 섭렵하고 귀국하였다. 이러한 석정 이정직 선생의 생가를, 3월 13일 이른 아침에 찾아갔다.

대문 위에 붙여놓았다. 미리 연락을 하고 와달라는 안내문이다
▲ 안내문 대문 위에 붙여놓았다. 미리 연락을 하고 와달라는 안내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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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닫힌 문, 들어갈 길이 없다고

아침 일찍 석정 선생의 집을 찾아보고, 바쁜 일정을 보내기 위해 서둘러 나선 길이다. 그런데 집 앞으로 가니 문이 자물통으로 굳게 잠겨있다. 대문 위에는 종이에 써 붙인 안내지가 붙어 있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탐방객들의 방문일정을 사정에 통보해 주시면 석정 이정직 선생님 관련 자료를 설명해 드립니다. 대상 : 단체, 개인, 기타 등

그리고 전화번호까지 친절하게 적혀있다. 우선 적힌 전화번호에 전화를 해보았다. 받지를 않는다. 주변을 돌아보면서 들어갈 방법을 연구해보지만 철옹성이다. 들어갈 곳이라고는 대문밖에 없다. 잠시 주춤거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ㄱ 자 집으로 꾸며진 이정직선생의 생가 안채. 한 단의 기단 위에 집을 올렸다
▲ 안채 ㄱ 자 집으로 꾸며진 이정직선생의 생가 안채. 한 단의 기단 위에 집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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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오마이뉴스에서 왔는데요. 이정직 선생님 생가 좀 취재하려고요."
"죄송합니다. 지금 멀리 있어서요."

"그럼 들어갈 길이 전혀 없나요?"
"예, 없습니다. 그러면 딴 곳을 먼저 돌아보시고 나중에 오시면 안 될까요?"

"일정이 바빠서요."
"죄송합니다. 멀리 있어서요."

오려면 몇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문화재를 안내하고 자료설명을 해 주는 것은 좋은데, 여행을 다니거나 답사를 다니다가 들리는 사람들은 난감해지겠다. 어떻게 계획된 것이 아닌데, 일일이 사전에 연락을 취할 수가 있을까?

윗방과 안방이 있고, 꺾인 부분에 부엌을 두고 있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담 밖을 돌면서 촬영을 하였다
▲ 안방 윗방과 안방이 있고, 꺾인 부분에 부엌을 두고 있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담 밖을 돌면서 촬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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툇마루가 없이 봉당으로 나오게 되어있다. 선생은 이방에서 운명을 하셨다고 한다
▲ 머릿방 툇마루가 없이 봉당으로 나오게 되어있다. 선생은 이방에서 운명을 하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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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대로 돌아설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집 주변을 돌면서 알아보는 수밖에. 그것도 정면을 볼 수 있는 곳에는, 담벼락에 구조물이 붙어있어서 접근을 할 수도 없다. 결국에는 두 방향에서 이리저리 목을 빼고, 까치발을 떼 가면서 집을 보는 수밖에. 20cm 정도의 기단 위에 지은 석정선생의 안채는 ㄱ 자 집이다. 정면으로 두 칸의 방이 있고, 꺾인 부분에 부엌을 두었다. 그리고 부엌의 남쪽에 머릿방을 두었다. 이러한 형태는 호남지방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이다.

앞으로는 툇마루를 놓았는데, 안방과 윗방 앞으로 연결이 되었다. 안방에서도 문을 달아 부엌으로 드나들 수가 있다고 한다. 뒤편으로 돌아가니 안방의 문이 뒤로도 나 있는데, 그 벽의 두께가 상당하다. 아마 보수를 할 때마다 덧바른 것 같다.

안방과 윗방의 뒷편벽은 목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껍게 벽을 발랐다
▲ 뒤편 안방과 윗방의 뒷편벽은 목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껍게 벽을 발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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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밖에서 본 부엌의 뒤편이다. 판자문을 뒤편에 달고, 까치구멍을 벽에 내었다
▲ 부엌 담밖에서 본 부엌의 뒤편이다. 판자문을 뒤편에 달고, 까치구멍을 벽에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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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칸 부엌에 달린 머릿방은 툇마루가 없이, 안쪽으로는 두짝문을 측면으로는 작은 한 짝문을 달아냈다. 그저 평범할 수밖에 없는 시골집이다. 석정 선생은 바로 이 머릿방에서 운명을 하셨다고 한다.

대문채보다도 못한 사랑채

안채 정면에는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사랑채가 있다. 평면은 한 칸의 부엌과 두 칸의 방으로 구성이 되었다. 대문에서 보면 대문 쪽으로 두 칸의 방을 두고, 모서리 부분에 한 칸의 부엌을 두고 있다. 그 중 대문 쪽의 한 칸은 밖으로 툇마루를 놓아, 주변 경관을 둘러볼 수 있도록 꾸몄다.

그저 이 방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 집안의 머슴들이 사는 대문채 정도로 여길 만하다. 바깥쪽 방 앞에 툇마루가 놓여있어 사랑채의 구실을 하고 있지만, 여느 집처럼 그렇게 사랑채답지는 않다. 집 안 어디를 들러보아도 가난한 선비의 집 같기만 하다. 아마도 평생 학문을 연구하고 저서를 남기다가 보니, 이런 청빈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었는지.

집안쪽이 사랑채. 두 칸의 방과 한 칸의 부엌으로 꾸며졌다
▲ 사랑채 집안쪽이 사랑채. 두 칸의 방과 한 칸의 부엌으로 꾸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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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벼락에 붙여지은 사랑채의 밖으로 낸 사랑마루. 이곳에서 주변 경관을 둘러 보았는지
▲ 사랑마루 담벼락에 붙여지은 사랑채의 밖으로 낸 사랑마루. 이곳에서 주변 경관을 둘러 보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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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행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안채와 사랑채 세 칸으로 여느 양반집 행랑채만도 못한 집이다. 담 밖으로 돌면서 들여다 본 석정 선생의 생가. 청빈한 삶이 그대로 배어있다. 이런 삶을 살면서도 그 많은 저서를 남겼다는 것에, 새삼 삶이 피곤하다고 투덜거린 내가 부끄러워진다.

더불어 '빨리 가지 못해 죄스럽다'는 생가를 관리하는 분에게도 고마움을 느낀다. 이렇게라도 볼 수 있고, 그 안에서 깨달은 바가 있으니. 3월 13일의 이른 봄이 오는 날, 아침날씨인데도 참 따듯하다.


태그:#이정직선생 생가, #김제, #기념물, #석정, #청빈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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