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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사지에 남아있는 석조. 한편이 깊게 파여졌다
▲ 석조 고달사지에 남아있는 석조. 한편이 깊게 파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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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자리하고 있는 고달사지. 남아있는 문화재들로 짐작컨대, 상당한 규모의 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달사지 앞에는 '신털이봉'이라 부르는 작은 동산이 있다. 고달사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신발에 묻은 흙을 털어낸 것이 쌓였는데, 그것이 봉우리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고달사는 혜목산 기슭에 자리한다. 마을에서는 이 산을 '고래산'이라고 부른다. 혜목산(慧目山)이란 말뜻에도, 이 절이 예사 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슬기로운 눈을 가졌다면, 혜안을 가졌다는 말이다. 곧 깨달음의 산이니, 절이 자리를 하기에 최적지일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세운 고달사는, 고려 초기에는 나라에서 관장하는 3대 선원 중 한곳이었다. 당시에는 '고달원' 혹은 '고달선원'이라고 불렀다고, 원종대사 탑비에는 적고 있다.

화강암을 파서 마련한 석조. 훼손이 심해 제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다
▲ 석조 화강암을 파서 마련한 석조. 훼손이 심해 제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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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의 측면에는 음각을 한 흔적이 보인다.
▲ 석조 석조의 측면에는 음각을 한 흔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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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까지 번창하던 절이 사라진 이유는?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달사가 언급되어 있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조선조 초기까지만 해도 고달사는 상당히 번창했던 절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에는, 고달사가 폐사가 된 것으로 적고 있다. 1530년 이후에는 1592년에 시작된 임진왜란과, 선조 30년인 1597년 14만15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일본이 재차 침략한 정유재란이 있다.

그리고 인조 14년인 1636년 12월에 청이 대군을 이끌고 침략을 하였다. 병자호란은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삼전도로 나아가 굴욕을 당한 전쟁이기도 했다. 당시 전국에 있던 수많은 관군이 남한산성으로 집결을 하려고 하였으나, 도중에서 청군과 교전으로 인해 패퇴를 하고 말았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고달사는 이 세 번의 외침 중에 전화로 인해 소실이 된 것은 아닌가 추정한다.

석조의 측면에는 안상을 돌아가면서 조각을 한 것 같다
▲ 안상 석조의 측면에는 안상을 돌아가면서 조각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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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은 깊고, 한편은 낮게 파여진 석조
▲ 석조 한편은 깊고, 한편은 낮게 파여진 석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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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사지에 남아있는 두 개의 석조

고달사지는 1998년부터 경기문화재단 기전문화재연구원에 의해 6차에 걸쳐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다. 현재는 발굴된 곳의 사지가 정리가 되어있으며, 앞으로 7~9차 발굴 작업을 한 후에 정비작업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이 고달사지에는 국보 1점과 보물 3점이 남아있고, 주변에는 많은 석조물들이 널려있다.

그 중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2기의 석조이다. 석조란 말 그대로 돌로 만든 물그릇이다. 첫 번 째의 석조는 '승당지'로 추정되는 가-1 건물지의 동편에 자리하고 있다. 이 승당지는 여러 번 증축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3차례에 걸쳐 중창이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가장 최대의 규모일 때는 정면 기단 길이가 61m에, 측면 기단의 길이가 약 16.3m의 대형 건물지로 밝혀졌다.

이러한 승당지의 최대 건물의 규모는 정면 12칸에 측면 4칸의 건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승당지 한편에 있는 석조. 이 석조는 파손이 되어 있다. 한편을 깊게 파서 눈이 녹은 물이 한쪽으로 고여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주변에는 조각난 석재들이 널려있으나, 석조에서 떨어진 것 같지는 않다.

물을 데울 수 있도록 마련한 석조로 추정한다.
▲ 석조2 물을 데울 수 있도록 마련한 석조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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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빠질 수 있도록 아랫면 중앙 한편에 뜷려있다
▲ 배수구 물이 빠질 수 있도록 아랫면 중앙 한편에 뜷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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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사지의 석조는 어디에 쓰였나?

석조를 가만히 살펴보면, 배수구멍이 나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석조는 식수로 사용하는 물을 담아두는 석조와, 목욕 등을 할 때 사용하는 석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승당지 곁에 있던 석조는 옆면에 안상을 조각한 듯하다. 석조의 위부분이 심하게 파손이 되어, 그 모습을 알 수는 없지만, 상당히 공을 들여 조각한 흔적이 보인다.

또 하나의 석조는 목조로 된 관람로를 따라가면 볼 수가 있다. 고달사지 가 - 4 건물지에 남아있는 이 석조는 훼손이 거의 없다. 이 건물지는 마루가 남아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창고나 곳간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 석조의 주변에서는 아궁이와 고래 흔적이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보아 가 - 4 건물지에 남아있는 석조는, 물을 끓일 수 있도록 마련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 석조는 땅에 밑면이 묻혀있으며 장방형이다. 네모난 모서리에는 골을 내어 부드럽게 마무리를 하였다. 석조의 크기는 외부가 321cm×149cm이며, 깊이는 98cm에 달한다. 내부의 크기는 250cm×102cm이며 깊이는 60cm 정도이다. 바닥의 깊이가 일정한 것도 이 석조의 용도를 궁금하게 만든다.   
     
모서리는 홈을 파서 부드럽게 마감을 하였다
▲ 모서리 모서리는 홈을 파서 부드럽게 마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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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방형의 석조는 물을 데워 몸을 씻는 욕조가 아니었을까?
▲ 석조 장방형의 석조는 물을 데워 몸을 씻는 욕조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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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의 용도, 그것이 궁금하다

이 석조는 건물지 안에 놓여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지에는 구들이 놓인 2칸의 방과, 한 칸의 욕실, 한 칸의 고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석조는 과연 어디에 쓰였던 것일까? 일반적으로 절에서 사용하는 석조는 물을 담아놓거나, 곡식을 씻을 때 사용한다. 또한 승려들이 법당에 출입을 할 때 그 입구에 놓아 손을 씻기도 하고, 입을 헹궈 몸을 청경하게 하는데 시용한다.

그러나 이 석조는 안에 일정한 깊이로 되어 있고, 외부에는 어떤 문양 같은 것도 없다. 더욱 이 건물지가 욕실이었고 물을 데울 수 있는 시설이 있었다고 가정하면, 이 석조는 물을 데워 몸을 씻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밑면에 난 배수구가 물을 빼기 쉽게 한 것을 보아도 욕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듯하다.

여러 사지에서 발견되는 석조. 그 크기나 위치가 제각각이지만, 고달사지에서 발견된 두 곳의 석조는 궁금증만 키워 놓았다. 그런 궁금증 때문에 더 많은 곳을 다녀야하고, 더 많은 것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래도 다 알 수 없는 것이 공부라고는 하지만. 언젠가는 조금 더 잘 알아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태그:#석조, #고달사지, #혜목산, #여주, #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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