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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수원지법 민사합의 제4부가 피고 CTS방송사의 불법행위는 인정하면서도 1심 대비 위자료를 50%나 삭감했다며 이는 아동의 인권을 외면한 판결이라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원고 문씨가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수원지방 법원 앞에서 피켓시위를 하고 있는 원고 문씨 지난 18일 수원지법 민사합의 제4부가 피고 CTS방송사의 불법행위는 인정하면서도 1심 대비 위자료를 50%나 삭감했다며 이는 아동의 인권을 외면한 판결이라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원고 문씨가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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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이 영하 10도를 넘나들며 살을 에는 아침 날씨, 하지만 지난 19일부터 지금까지 일주일 넘게 문아무개씨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수원지방법원 앞에서 1인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 문씨가 든 커다란 피켓에는 18일 수원지법 민사합의 제4부 판결에 대한 항의가 담겨 있다.

수원지법의 판결을 '위자료 50% 바겐세일 판결'로 규정하고, 그 잘못된 판결이 '자신의 아들을 두 번 죽였다'고 주장하는 문씨. 그에게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건은 지난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건의 피고인 탁아무개씨는 A교회 부설 선교원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던 어린이합창단 동영상을 무단 도용해 2005년 가을부터 자신의 '이단세미나 강의'에 사용하였다.

문씨의 말에 따르면, 탁씨는 전국을 다니며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 앞에서 총 698회에 걸쳐 동영상에 출연한 아동들의 얼굴을 가리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었다. 더욱이 동영상에 나온 아이들을 두고 '진짜와 가짜', '사이비 종교', '북한의 아이들', '불쌍한 아이들'과 같은 비방발언을 함으로써 피해아동은 물론 부모들까지 모욕했다.

지난 2006년 12월 26일에는 CTS기독교텔레비전(이하 CTS)이 특집 프로그램으로 제작·편성한 '4인 4색 이단의 뿌리를 찾아서-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라'에 탁씨가 강사로 나서 문제의 동영상을 이용해 피해아동들을 비방하는 강의를 하기도 했다. 당시 CTS는 프로그램에 동영상을 자료화면으로 사용하면서도 특별한 기술적 조치를 하지 않고 어린이들의 얼굴을 그대로 방송에 내보냈다. 해당 프로그램에서는 피해 아동들을 향한 탁씨의 비방발언도 여과 없이 방송됐다.

CTS는 정규방송 외에도 27, 28일 양일간 2회에 걸쳐 재방송했고, 해당 방송을 자사 홈페이지에 그대로 게재하여 다시보기 서비스와 유료 다운로드가 가능한 상태로 일반인들에게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문제의 동영상이 포함된 프로그램을 비디오와 DVD로 제작해 장당 2만 원에 판매까지 했다.

자신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이단 강의에 사용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문씨의 아들 이아무개군은 이후 혹시라도 친구들이 자신을 알아볼까봐 학교 점심도 몇 개월째 먹지 않고 수차례 자퇴를 시도하는 등의 정신적 피해를 호소했다.

'이단 강의'에 어린이 동영상 무단 도용... 법원은 솜방망이 처벌

일련의 사건으로 2007년 6월 피해 아동 중 한 명인 이군(당시 15살)의 부모는 탁씨를 형사고소했다. 하지만 탁씨는 "요즘에 고소장이 날아오면 영화 티켓 하나 날아왔네라고 생각한다"고 조롱하며 계속 동영상을 이용해 강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자가 문씨에게 받은 자료를 토대로 살펴본 결과 탁씨는 재판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발행하는 잡지를 통해 수시로 피해아동과 부모들을 모욕·비하하는 기사를 실었다.

결국 2010년 10월 14일 대법원은 탁씨가 CTS와 명지대학교 등에서 피해아동들의 동영상을 무단도용해 모욕한 행위에 대하여 모욕죄 혐의를 인정해 벌금 5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와 함께 문씨는 형사재판이 대법원에 계류되어 있던 2009년 12월 탁씨와 CTS를 상대로 각각 민사소송을 제기하였다. 1심 재판부인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민사1단독은 2010년 10월 9일 '초상권과 인격권을 침해하여 원고들에게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주었다'는 이유로 피고 탁지원씨가 피해아동 이군과 그 부모에게 300만원의 위자료를 주라고 판결했다. 탁씨의 불법행위에 가담한 CTS에 대해서도 법원은 동일한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이군의 부모는 어린아동에 대한 불법행위인데도 어린 아동의 정신적 고통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히 낮다고 판단해 즉각 항소하였다. 이에 지난 18일 항소심 재판부인 수원지법 민사합의 제4부가 피고 탁지원씨에 대해서는 300만 원 위자료 배상 판결을 유지하고, CTS에 대해서는 위자료를 300만 원에서 160만 원으로 감액하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현재 문씨가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바로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이다.

아동인권을 유린한 피고 탁아무개씨에 대해서는 항소기각으로 봐주고, 그와 공동불법 행위로 무분별한 방송을 한 CTS는 위자료를 1심이 인용한 금액에서 50%나 감액하는 등 원고들이 당한 피해의 규모와 고통의 정도를 가볍게 본 재판부가 원고들의 정신적 고통을 외면하고 피고들의 아동학대를 눈감아 줬다는 것이 문씨의 주장이다.

항소심 법원, "특별한 인적관계 아닌 한 식별 어려워... 배상금 감액"

피고 탁아무개씨와 피고 CTS 방송사의 아동인권침해 사건을 재판한 수원지법
▲ 수원지방법원 전경 피고 탁아무개씨와 피고 CTS 방송사의 아동인권침해 사건을 재판한 수원지법
ⓒ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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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는 "원고들이 피고의 초상권 및 모욕행위로 인한 인격권 침해로 정신적 고통을 받았을 것임은 경험칙상 분명하다 할 것이니, 피고는 금전으로나마 이를 위자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위자료를 산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비록 이 사건 편집 동영상에서 원고 이군을 특정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위 영상에서 피고 이군이 출현하는 빈도와 시간, 모습 등에 비추어 볼 때 위 원고와 특별한 인적관계가 있지 아니한 사람으로서는 쉽게 주의를 기울여 식별하리라 예상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점"을 이유로 감액을 결정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감액 이유가 터무니없다고 입을 모은다. 외모 구분이 어려운 신생아에게 700만 원의 배상금을 인정한 판례에 비추어도 근거가 미약하다는 것이다. 유명인이 아닌 일반인의 경우 방송에 나왔을 때 친인척과 친구 등 특별한 인적관계의 사람만 식별할 수 있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잘 알려진 유명인보다 초상권을 더 강하게 보호받아야 할 필요성이 있는 아동임에도 불구하고 판례상 전무한 '특별한 인적관계'를 운운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군의 부모인 문씨는 이번 판결을 두고 "KBS 방송사의 신생아 초상권 침해 재판결과와 비교해도 터무니없는 배상액이며 판결 이유를 봐도 수원지법은 아동의 인권을 보호할 의지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고 비판했다.

지난 2005년 9월 KBS는 외주제작사가 촬영한 다큐멘터리 '병원 24시'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외주제작사 담당 PD는 신생아 A군의 부모가 촬영을 거부했음에도 간호사가 A군을 돌보는 장면과 산모 B씨가 A군에게 젖병을 물리는 장면을 촬영해 방영했다.

이에 A군의 부모는 초상권이 침해됐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방송사 측은 "신생아는 외모가 구분 안 돼 초상권 인정이 어렵다", "A군과 B씨가 나오는 장면이 매우 짧고, 촬영으로 원고들의 부정적 평가나 의도가 발생했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법원 3부(주심 김황식 대법관)는 "초상권에 있어 신생아라고 해서 달리 볼 이유가 없어 방송사 측의 주장은 이유 없다"며 외주제작사와 방송사가 연대해 A군과 B씨에게 총 1400만 원을 배상하라는 원심을 확정한 바 있다.

전문가들, "아동인권 인식 부족한 재판부의 판결 문제 있다"

한편 수원지법 신우정 공보판사는 지난 18일 항소심 판결에 대해 "피해자들의 고통과 피해를 다 고려하더라도 재판부는 침해의 정도를 약하게 본 것이다. CTS는 방송사가 직접 촬영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인용해 온 것이기 때문에 (1심 판결의 손해배상액이) 과하다고 본 것이다"라고 밝혔다. 신 판사는 "위자료 산정은 재판부의 재량"이라며 "원고들의 피해도 충분히 감안했다"고 재차 강조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수원지법이 내린 판단이 논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초상권 침해를 다투는 데 있어서 직접 촬영했는지 여부나 인용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직접 촬영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를 공표하는 데 있어서 촬영 당시 목적과 다른 방식으로 공표가 되었을 경우, 특히 부정적인 내용에 허락이나 동의 없이 초상이 사용되어 초상의 주인공이 그릇되게 비친 경우라면 더욱 피해자들의 인격권과 명예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고 보는 것이 판례라는 입장이다.

전문가들은 또 재판부가 아동 대상 불법행위에 대해 아동의 인권 등 특별한 고려가 수반되어야 함에도 이를 간과하고 문제를 단순하게 판단한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익중 이화여자대학교 사회복지전문대학원 교수는 "사법부가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 피해아동에 대해 다른 잣대로 판단해야 함에도 획일적인 잣대를 댄 것 같다"며 "판례가 있다고 해도 어떤 사법부를 만나느냐에 따라 결과가 많이 달라지는 것 같다"고 판단했다. 정 교수는 "판사 개인의 판단에 따라 결과가 좌지우지되는 것은 문제"라며 "아동사건을 전문적으로 판단하는 법원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런 문제가 계속 발생하는 것 같고 아동인권에 대해 전혀 고려하고 있지 못한 판결의 부당함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 같다"고 평가했다.

문미옥 서울여자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 역시 법원의 인권 감수성을 지적했다. 문 교수는 "이번에 판결을 내린 판사뿐만 아니라 (법원이) 총체적으로 어린이들의 인격이나 권리에 예민하지 않고 어린이가 받은 상처에 대해서도 둔감한 것 같다"며 "아이들이 TV에 비친 것이 얼마나 심각하게 그 아이에게 피해를 줄 것인가는 전혀 생각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박지웅 변호사는 "재판부가 '원고 이군과 특별한 인적관계가 있지 아니한 사람의 경우 쉽게 식별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라는 점을 들어 위자료를 정한 것은 전체 판결문의 취지와 동떨어진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원고가 느끼는 모욕에 대한 정도에 비례해서 배상액이 정해져야 하는데 제3자의 관점에서 원고를 식별할 수 있느냐를 기준으로 판단한 점은 비판 받아야 할 부분이다"라고 분석했다.

박 변호사는 또 "정신적으로 감수성이 예민하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릴 피해아동에 대한 이해 부족과 이런 원고들의 주장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은 심리 미진의 점이 보인다"고 평하기도 했다.

CTS 방송사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라'는 프로그램에서 어린 아이들의 얼굴을 보여주며 모욕하는 내용의 탁아무개씨 이단강의를 방영해 피해아동 부모들이 책임있는 조치를 요구했으나 CTS는 '법대로 하라'고 회피해 결국 손해배상 소송에 이르게 됐다.
▲ 2009년 CTS 기독교 방송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피해아동 부모들 CTS 방송사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라'는 프로그램에서 어린 아이들의 얼굴을 보여주며 모욕하는 내용의 탁아무개씨 이단강의를 방영해 피해아동 부모들이 책임있는 조치를 요구했으나 CTS는 '법대로 하라'고 회피해 결국 손해배상 소송에 이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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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 공현씨는 "이 사건은 단순히 초상권 문제가 아니고 동영상을 유포한 목적이 굉장히 악의적이다"고 말하며 "몇 사람이 피해아동을 알아봤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식의 모욕을 했다는 자체가 엄중하게 다루어져야 하는데 그런 부분을 재판부가 간과해 아동인권을 침해한 피고의 행동을 그다지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다"고 날카롭게 꼬집었다.

공씨는 이어 "아동권리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고 피해아동의 얼굴을 얼마나 알아볼 수 있냐의 차원으로 접근한 것은 (재판부의) 인권감수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공씨는 "유엔아동권리협약을 포함해서 국제인권협약이 사실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고 있고 국제인권기구들이 국제법을 국내법과 같이 적용하도록 권고하고 있지만 사법부가 판결할 때에는 국제법을 판단근거로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며 사법부의 전향적 자세를 요구하기도 했다.

피해아동 이군의 어머니 문씨는 "아이들이 무분별한 어른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도 재판부에서 조차 이들의 아픔을 외면한다면 과연 우리 아이들은 어디 가서 하소연을 할 수가 있겠는가"라며 "아들의 인격을 짓밟아 놓고도 반성할 줄 모르고 법대로 하라고 한 가해자들의 입장만 고려하고, 피해를 입고 3년 동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말 못할 고통을 받아온 내 아들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위자료까지 감액한 재판부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개탄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질문에 문씨는 "감액 판결 소식에 충격 받은 아들이 심리적으로 안정될 때까지 항소심 재판부를 규탄하는 피켓시위를 계속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대법원에 상고해 항소심 재판부의 인권의식 부재와 초상권 침해, 아동 모욕에 대한 무지를 조목조목 따질 계획"이라고 의지를 밝혔다.


태그:#수원지법, #아동인권, #초상권, #탁지원, #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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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 사이 인권이 후퇴하는 사회현실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인권발전이 멈추지 않도록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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