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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의 에세이집 <살고 싶은 여자와 하고 싶은 일>에서 '서정'에서 '서사'로의 이행을 읽을 수 있었다. 서정적 작가였던 저자가 관심을 역사적 변란의 억울한 피해자들에게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겪은 필화 사건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고문 후유증이 가져온 한수산의 변모).

 

제3국을 선택한 반공포로와 나가사키의 조선인 원폭 피해자 이야기를 빼면 <살고 싶은 여자와 하고 싶은 일>은 저자의 일본 체류 경험과 중국 방문기로 채워져 있다. 그는 노태우 정권을 피해 "6공 전후반을 뺀 한가운데를 나라 밖에 나가 지"내는 동안 "조국이나 민족이라는 명제에 대해 가장 많이 떠올"리면서 "혼란스런 그리고 외로웠던 시간들의 부스러기"를 옮겨 놓은 글들이라고 했다.

 

새벽 장미를 꿈꾸며

 

저자는 스스로 "성찰"까지는 이르지 못한 글들이라고 했지만, 이 책의 1부는 자꾸 관심을 끈다. '새벽 장미를 꿈꾸며'라는 아름다운 제목이 붙은 여섯 개의 글은, 이 책의 나머지와 상당히 다르다. 마치 그의 변신을 예고하는 준비작업 같아 보인다.

 

이 유배 기간에 저자는 백두산 자락에서 가톨릭 신자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영혼의 껍질'을 벗기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같은 기간에 써내려간 '새벽 장미를 꿈꾸며'는 그의 '마음의 껍질'을 벗기는 이야기들이다.

 

말을 잃고 넋을 놓은 채 리비아의 사막을 바라보면서, 고집스럽게 '못질 된' 삶을 살았던 일본화가 마키노 쿠니오의 그림을 보면서, 그리고 서른두 그루의 장미나무를 심어서 지나는 이들에게 나눠주는 상상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고정 관념이 얼마나 딱딱하게 고정되어 있었는지 깨닫는다. ('새벽 장미를 꿈꾸며')

 

저자를 잉태하고 그 유년을 키웠지만 동시에 한계도 지웠던 산 이야기('산 속의 나, 내 안의 산')와 보안사 요원들에게 임의동행 당하기 전까지 바다와 바람과 사람을 사랑하면서 삼년을 살았던 제주도 이야기('내  과거형의 제주')는 저자가 갖게 된 새로운 시각의 지리적 배경으로 제시되었다. 산과 바다와 사막의 경험을 병치시킴으로써 그의 공간 개념이 깨져 나갔고, 그와 함께 현실 인식과 자기 인식까지 덩달아 뒤집어졌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과거완료가 없는 현재진행의 삶

 

한편 '과거완료가 없는 현재진행의 삶'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 사회가 겪은 변화를 문학적 감수성으로 요약한 글이다. 저자에 따르면 20세기 후반부의 한국 사회는 질 나쁜 권력이 제시한 '미래형'을 향해 처절하도록 '현재진행형'으로 살았지만 결국 아무런 '과거완료형'도 만들지 못한 사회다.

 

한국인들은 "일제시대의 정리에서부터 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이것이었노라'하고 과거 완료로 묶어 정리"할 수 없었던 것은 "열린사회를 살지 못하게 하는 정보의 독점 때문"이다. 그는 "공개되지 않는 진실, 검토되고 논증되지 않는 진실, 반성과 용서가 없는 진실은 진실이 아닌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래서 "우리의 역사 안에는 ... 독점과 비공개와 은폐의 백담사"만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과거완료형이 없었기에 한국 사회는 "지난 세대의 윤리관은 무너졌지만... 새로운 도덕률이 없"는 혼란과 위기를 맞았고, 사회적으로는 경제인과 직업 관료 중심의 신흥 골품제도가 생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놈 지식인, 상놈 공장 노동자와 농어민, 그리 고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상년'들로 구성되는 신흥 노예층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젊은 오빠들을 위한 송가

 

다른 한편 '젊은 오빠들을 위한 송가'는 과거완료형이 없이 현재진행으로만 살아온 첫 한글세대의 경험이다. 한수산도 그 세대에 속하므로 이글은 그의 자화상이기도 한데, 그 세대의 역사는 역설로 점철돼 있다.

 

이들은 50년대의 궁핍을 기억하면서도 '한탕주의'와 '적당한 완벽주의'로 자가운전자 시대를 열며 풍요를 누렸고, 군사 문화와 그 정치에 가장 순치되었던 세대임과 동시에 자유분방한 대중문화를 시작한 세대다. 소비자 권익을 보호받을 장치가 거의 없는데도 소비자가 왕이라는 표어 속에 둘러싸여 살았고, 입시지옥을 맛본 첫 세대이면서도 더욱 열악해지는 자식들의 교육환경을 개탄만 하고 있다.

 

섹스와 여성의 상품화가 미문의 속도로 진전되는 것을 목격하고 참여한 대가를 치르듯 가정이 무너지고 이혼과 청소년 일탈이 더 이상 일탈로 간주되지 않는 첫 세대가 되었다. "이들이 입주하는 아파트나 집은 날림이 아닌 것이 없었지만 그런 건축물을 만들어 내는 현장에 또한 이들이 있었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온갖 역설에도 불구하고 한수산은 이 세대에게 "예측 가능한 노년"이 있다고 희망을 걸었다. 이는 "과거 어느 세대도 가지지 못했던 행운"이며, 이 "예정된 노년 덕분에 40대는 이제까지 없었던 장년의 문화 혹은 라이프 사이클을 만들어 갈지도 모른다"고 기대한다. 그는 "이것이 오늘의 40대가 가지는 가능성이며 우리 사회가 가지는 동력"이라고까지 했다.

 

IMF와 함께 사라져 버린 '예측 가능한 노년'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한수산의 "예측 가능한 노년"의 기대는 불과 3년이 못되어 물거품이 됐다. IMF라는 이름으로 '환란'이 덮친 것이다. 예측 가능한 노년을 기다리던 40대는 난데없이 직장에서 쫓겨났고 가정에서 내몰렸고 거리로 나앉았다. 환란은 2-3년 만에 극복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이 이 세대와 다음 세대를 할퀸 상처는 한국 사회를 영원히 바꿔놓았다. '장년의 문화 혹은 라이프 사이클'은 해 뜬 뒤의 무지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진행형 현재'와 '미완료 과거'에 대한 그의 명쾌하고도 감각적인 분석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예측된 미래'는 어째서 깨져버린 것일까? 청와대와 재경부 관료들, 경제학 교수들과 대기업 기획실과 숱한 경제부 기자들이 예측하지 못한 것을 한수산이 해 냈어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분야의 전문 지식인들이 내다보지 못한 이유와 한수산의 예측이 빗나간 이유는 결국 같은 것이리라.

 

그것은 어정쩡한 판단 유보와 불명료한 쇄신 의지 때문이다. 그는 한국 사회의 뒤틀림을 '완료형 없는 과거'와 '군사 독재와 그 주체들의 부패와 비리'때문이라고 옳게 분석했지만, 그것을 재평가하거나 바로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주 "역사적 평가나 의미는 여기에서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면서 건너뛰었다. 비록 민주화나 혹은 그 어떤 것이 새로움을 약속한다 해도 새로운 것이 모습을 나타내면 그것은 이미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노자식의 주장으로 물러서 버린다. 하지만 노자의 무위가 군사 문화의 해독을 치유하거나 국제 금융의 공격을 막아주지는 못하는 법이다.

 

서술의 문학과 설명의 문학

 

문학에도 서술 문학이 있고 설명 문학이 있는 것 같다. 현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서술 문학이라면 현상의 원인까지 따져 주는 것이 설명 문학이다. 신문으로 치면 사실 기사와 해설 기사에 견줄 수 있겠다. 그 자체로는 어떤 것이 더 낫거나 못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뒤틀려 있다면 원인을 따지고 실천을 요구하는 설명 문학이 더 유용해 보인다. 한수산의 글은 아직 설명에 이르지 못하고 서술에 머문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의 서술이 매우 훌륭한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특히 '살고 싶은 여자'와는 살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하고 싶은 일'은 하면서 살겠다고 마음먹은 이후의 서술은 '변란의 피해자들'을 글쓰기의 주제로 삼았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의 원인을 생각하고 상처를 싸매고 한을 풀어주는 일에 대한 관심은 이제 독자들의 것으로 남겨졌다. (평미레, 2010/11/5)


살고싶은 여자와 하고싶은 일

한수산, 나남출판(1994)


태그:#평미레, #뜻철학, #한수산, #젊은오빠, #새벽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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