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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누가 한수산을 읽을까' 했더니 그게 아니다. 내가 알던 한수산은 <부초(1976)>의 작가이기도 하지만 <욕망의 거리(1981)>나 <가을 나그네(1989)>, 혹은 좀 심각해져야 <타인의 얼굴(1991)>의 작가였을 뿐이었다. 그와 비견되던 작가는 <불새(1980)>의 최인호나 <풀잎처럼 눕다(1980)>의 박범신 등이었다.

 

그러나 한수산은 다작은 아니어도 <4백년의 약속(1999)>, <까마귀(2003)>, <용서를 위하여(2010)> 등을 발표하면서 묵직한 문제의식을 던지고 있다.

 

<헌책바다> 홈페이지에서 그의 에세이집을 골랐을 때도 아직 그런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그의 '소설'을 읽어 볼 생각은 없지만 '지금은 무슨 생각으로 사시나'가 궁금했었다. 제목도 한 몫을 했다. <살고 싶은 여자와 하고 싶은 일>. 마치 수수께끼를 낸 것 같았고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살고 싶은 여자와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게 '결혼' 말고 뭐가 더 있겠는가. 나는 답이 맞는지 알아볼 요량으로 그 책을 주문했던 것 같다.

 

책을 읽고 나서야 '살고 싶은 여자'와 '하고 싶은 일'이 별개의 주제이며, 그에게는 그 둘이 삶의 상대적 가치와 절대적 가치를 가리키는 상징임을 알았다. "'이 여자'보다 '저 여자'가 더 아름다우므로, 현명하므로, 나와 잘 어울리므로 '저 여자'와 살고 싶"은 생각을 가진다면 이는 "상대적인 가치일 뿐"이라고 한다. 게다가 "그 가치의 잣대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건 절대적 가치"이며 "그것은 비교라는 저울질이 될 수 없고 얼마짜리라는 값이 매겨질 수도 없다." 그래서 한수산은 "살아보고 싶은 여자와는 살지 못해도 좋"지만 "하고 싶은 일은 하며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 것이다.

 

저자가 나가사키에서 만난 바나나를 먹지 않는 일본 노인, 오카 마사하루가 그런 사람이다. 그는 '나가사키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만들어서 주변의 항의와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한국인 원폭 피해자의 진상을 조사해 온 인권운동가이며, 젊어서 병으로 죽은 아내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 죄책감에 평생 바나나를 먹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 역시 '살고 싶은 여자'와 살고 있지 못하지만 '하고 싶은 일'은 하면서 산다.

 

마당에 버려두었던 국화 화분도 마찬가지다. "물을 준적도 따뜻한 곳을 골라서 놓아둔 것도 아"닌데 "얼어 죽었을 거라고 믿었던 그 국화 대궁에서 생명은... 겨울을 살아 이겨냈"다. 미안한 마음으로 땅에 옮겨 심은 국화는 가을에 엄지손톱만한 꽃들을 피웠다. 그 꽃들은 화분 시절의 꽃술보다 작았지만 그래도 "비로소 살아볼 만한 삶을, 그리고 피워볼 만한 꽃을 피워 올린 것"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그게 바로 그 국화의 '하고 싶은 일'이었을 테니까...

 

그 책의 다른 글들은 저자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한 기초 다지기나 계획서, 혹은 습작인 것 같았다. 내가 놀란 것은 글에 나타난 한수산의 '하고 싶은 일'이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달라져 있더라는 점이다. 아름다운 언어로 애잔한 이야기를 서정적으로 들려주던 저자는 지금은 현실을 살았거나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난과 이를 견뎌내는 의지를 그려내고 있었다. 서정에서 서사로의 이행이라고 해야 할까?

 

한수산의 변화는 그가 겪은 필화 사건 때문일 것이다. 그는 1981년, <중앙일보>에 연재하던 <욕망의 거리>의 일부 표현 때문에 보안사령부(당시 사령관 노태우)의 대공분실을 경험했다. 서정적 대중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몇 줄의 냉소도 용납할 수 없었던 당국은 6명의 문인과 언론인을 서빙고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가했다.

 

반국가 음모나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려 했으나 혐의점을 찾지 못한 당국은 결국 며칠 만에 관련자를 모두 석방했다. 그러나 고문 후유증은 심대했다. 시인 박정만은 폐인이 되어 강박증과 소주로 연명하다가 1988년 사망했다. 한수산도 절필을 선언하고 노태우가 대통령에 취임하던 1988년에 한국을 떠났다가 노태우가 퇴임을 코앞에 둔 1991년 말에야 귀국했다.

 

다른 수필집 <이 세상의 모든 아침(1996)>에서 저자는 "14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기에는 고통의 그루터기가 남아 있는 비열한 고문행위들" 때문에 "사람에 대한 모든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잃"었고 "우정, 사랑, 명예, 애국, 정의, 연대감..., 인간이기에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그 무형의 것들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한동안 그는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고, "'사람이라는 동물'은 보는 것조차 몸이 떨리게 두려웠다"고 술회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그는 서서히 바뀐 것 같다. <살고 싶은 여자와 하고 싶은 일>은 그가 귀국해서 처음 펴낸 책인데, 거기서 한수산은 '일제하 나가사키의 원폭피해 조선인'과 '한국전쟁 휴전 후 제3국을 선택한 반공포로' 이야기를 스케치했다. 이 두 이야기는 후에 소설로 형상화되어 <까마귀(2003)>와 <시간의 저편(1999)>으로 출판되었다. <시간의 저편>과 함께 실린 <4백년의 약속>은 임진왜란 때에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 이야기다. <용서를 위하여(2010)>의 절반은 고문 피해자의 이야기인데, 저자는 '욕망의 거리 필화 사건'의 피해자들 이야기를 소설화할 계획도 갖고 있다.

 

모두 엄한 역사의 피해자요 억울한 사람들 이야기다. 필화 사건 이후 한수산은 역사적 변란을 일으킨 가해자들의 무도함을 직접 폭로하는 대신 그 피해자들의 한스런 고난을 서술하기로 한 것 같다. 말로 설명될 수 없고, 혹 설명이 되어도 공감되기는 어려운 깊이의 억울함과 한을 품은 사람들에게로 그의 관심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이야기들이 '서사'로 향하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아침>에서 그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음악과 전직 보안사원이 익명으로 보낸 편지 덕분에 극심한 인간 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보안사원'은 "그때 일로 건강을 해치지나 않았을까" 걱정해 주었고 "그런 가혹행위를 해야 했던 저와 제 집단에 이 이상 남아 있을 수는 없"어서 "어딘가 지방에라도 내려가 식당이라도 하기로"했다고 전했다. 이 편지를 공개하면서 한수산은 "누가 말하는가. 삶이 아름답지 않다고. 누가 더럽힐 수 있는가. 이토록 고결한 인간의 존엄성을."이라고 글을 끝맺었다.

 

그러나 이때의 치유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그로부터 또 다시 14년이 지나 <용서를 위하여(2010)>를 출판한 저자는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잊으려 하지만 고문자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했다. 마음속에 한번 자리 잡은 '한'의 생명력은 30년쯤은 우습게 지속되는 것이다.

 

그래도 그에게는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심신은 물론 인간의 존엄성을 갈가리 찢어 놓은 고문의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한수산은 자기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한다. 버림받았던 화분 속의 국화가 새봄에 다시 움을 틔우듯. 그러나 고문과 그 휴유증은 그의 '하고 싶은 일'을 바꿔 놓았다. 옮겨심긴 국화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이리라.

 

끝으로 한 가지. 나는 '살고 싶은 여자'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나는 행복이 '사람'과 '일' 모두에 달려 있다고 여긴다. 생활과 일과 가치를 나눌 사람이 없다면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을 해도 행복하기 어렵다. 그래서 '살고 싶은 여자'는 그저 상대적인 가치가 아니며, '진짜로 살고 싶은 여자'는 '진짜로 하고 싶은 일'만큼이나 '절대적인 가치'라고 믿는다. (평미레, 2010/11/4).

덧붙이는 글 | 공백 메우는 독서 중이기에 오래된 책을 왈가왈부하는 일이 많습니다. 딴에는 중요한 문제를 되짚는다는 의미를 두고 있고, 가능하면 당면 이슈와 접목시키는 노력도 기울이려고 합니다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또 저자의 직함이나 존칭을 생략하는 것은 오랜 호칭을 피하고자 함이지 그분들의 인격이나 작품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은 아닙니다.-평미레 드림.


살고싶은 여자와 하고싶은 일

한수산, 나남출판(1994)


태그:#한수산, #평미레, #뜻철학, #고문,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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