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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은 외부의 손길을 투명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아니, 투명한 그 너머는 눈길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의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본존불'을 모신 석굴암은 그렇게 유리벽을 두고 중생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재상 김대성을 비롯한 신라의 천재예술가들은 석굴암을 세우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중생들에게는 불법(佛法)을 전파하는 법당으로, 왕과 국가에게는 '부처님 나라'를 꿈꾸게 하는 사찰로 삼지 않았을까. 그러나 774년 완공된 뒤 1200여 년이 흐른 지금 석굴암은 애석하게도 '보존'이라는 명분으로 유리벽을 세워 중생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접근할 수 없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석굴암

석굴암미학연구소 성낙주 소장 현재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석굴암미학연구소 성낙주 소장 현재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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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석굴암을 답사하며 석굴암의 유리벽을 마주했을 때, 현대과학기술이 조치한 것 치고는 참으로 원시적이라는 한탄이 자연스레 나왔다. 석굴암은 불국사와 함께 불교사찰 건축물로서 국내외 전문가들의 이견이 전혀 없는 말 그대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인데 접근조차 불가하다니!

오랫동안 석굴암을 온전히 둘러보고 연구해 온 전문가는 석굴암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지난 1월 말 불교중앙박물관에서 '석굴암 백년의 빛' 특별사진전 때 만났었던 석굴암미학연구소 성낙주(56) 소장을 다시 찾았다.

당시 사진전에서 성낙주 소장은 일제강점기 때 드러낸 석굴암의 첫 모습과 이후 1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사진들을 선보였었다(관련기사 '천년 석굴암의 100년, 그 건강기록부'-김현자 기자).

성 소장은 지난 1997년 6월, 당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한창 주가를 높이던 영남대 유홍준 교수를 향해 '문화전사 유홍준의 미덕과 해악'이라는 글을 <인물과 사상>(제2호)에 기고하며 문화유산 분야에 뛰어 들었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가 막 펴내기 시작한 <인물과 사상>의 창간 정신이 '모든 성역과 금기에 도전한다'였다고는 하지만, 일개(?) 중학교 국어교사이던 성 소장이 인기 베스트셀러작가인 유홍준 교수를 공격한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주변의 지인들이 유홍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다니는데, 가만 보니 이거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옛 문인의 말을 옮긴 것이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요? 그럼 모르면 못 봅니까? 이거야 말로 엘리트 지향주의, 지식인 우월주의와 다르지 않아요. 진보를 표방한 학자가 패권주의에 편승하고 또 조장하고… '끔찍한 비판의 불평등'이 도저히 용서가 안 되더라고요."

"아는 만큼 보인다? 지식인 우월주의와 다르지 않다"

그는 <인물과 사상> 기고 글에서 문무대왕릉이 수중릉인가의 문제, 무령왕릉의 졸속 발굴 문제, 에밀레종을 둘러싼 문제, 유물들을 보관 중이던 옛 총독부 건물의 철거 문제 등을 통해 유홍준 교수가 드러낸 '비판의 공정성' 문제를 제기하면서 거꾸로 유홍준 교수의 파벌적 문화권력 성향을 비판했다.

그리고 그 이후, 성 소장의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은 1998년 <석굴암을 위한 변명>을 출판하며 이어진다. 물론 성 소장이 석굴암 같은 문화유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유홍준 교수를 비판하기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교 1학년 때, 전공 강의를 빼먹고 경복궁 안에 있던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아갔어요. 맨 처음 '원시토기실'에 들어섰는데 머리가 희끗한 일본인 노부부가 토기를 바라보며 뭐라고 대화를 나누더라고요. 그런데 놀란 것은 박물관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는데 그때까지 두 사람이 계속 토론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의 토기를 가지고 약 1시간 30분 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누던 그 모습은 정말 충격이었죠."

유리벽 너머 자리하고 있는 석굴암 본존불.
 유리벽 너머 자리하고 있는 석굴암 본존불.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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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장은 그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중고교시절 공부와는 담을 쌓고 실컷 놀았다고 한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동국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것이 25살 때. 그는 스물다섯에 일본인 노부부로부터 얻어맞은 듯한 이 문화적인 충격에 "내가 우리 문화재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 몇 점만이라도 공부해 보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결심을 처음 행동으로 옮긴 것이 바로 석굴암에 대한 연구였다. 늦깎이 대학생의 불타는 학구열과 못 말리는 열정은 나이가 들어서도 그의 거침없는 글쓰기와 성역 없는 비판 정신에 그대로 이어져있다.

"석굴암 밑으로 물을 흐르게 했다는 건 사기"

석굴암을 논하는 기존 학계에 대해 성 소장은 '사기', '왜곡' 등의 단어를 동원하며 시종일관 심하다 싶을 정도로 퍼렇게 날을 세웠다. 특히, 성 소장은 석굴암을 다룬 많은 대중서적들이 대부분 '석굴암은 밑으로 물을 흘려보내며 내부의 습기 문제를 해결했었다'는 주장을 그대로 싣고 있는 데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성전 밑으로 물을 흐르게 했다고요? 사기죠. 만약에 물이 흐른 채 1300여 년을 이어왔다면 석굴암은 세계의 불가사의입니다. 세계적으로 경천동지할 일이에요. 세계 어디서 물길 위에 집을 세웁니까? 그것도 성전을. 산 속인데 습기가 끼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도대체 말장난도 정도껏 해야지요."

성 소장은 '석굴암이 수학적인 황금분할을 이루고 있다'는 학설에 대해 "도면의 마술일 뿐 사실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비판했다. 또한 성 소장은 '석굴암의 덮개 시설은 없애야 한다'는, 전실 앞에 세워진 전각(殿閣)을 둘러싼 '개방구조'에 대한 원형 논쟁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비 맞고 눈 맞고 얼어터지는데 지붕 없이 집을 지었다고요? 성전은 기본적으로 밀폐구조예요. 어느 성전을 열어 놓습니까? 사기죠. 명동성당 열려 있습니까? 종교 성전은 밝으면 안 되는 겁니다. 빛이 왜 들어와. 세속적 공간과 차단시키는 거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일제가 진행한 공사 사진이 '석굴암 원형'의 근거라고요? 단지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참고 자료일 뿐이죠."

"일제에게 석굴암은 위대한 전리품이었을 뿐"

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보통학교 국어독본. 석굴암 답사기에는 일제가 석굴암을 전리품으로서 우리 학생들에게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성 소장은 "이는 대표적인 식민이데올로기를 심어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보통학교 국어독본. 석굴암 답사기에는 일제가 석굴암을 전리품으로서 우리 학생들에게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성 소장은 "이는 대표적인 식민이데올로기를 심어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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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장은 일제강점기 시절 대대적으로 진행한 석굴암의 해체, 복원 작업과 이후 이뤄진 성역화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일제는 성전에는 관심 없었어요. 석굴암은 그들에게 전리품일 뿐이죠. 그래서 석굴암 외벽에 시멘트를 발랐으면서도, 전각 같은 지붕을 씌우지 않은 거예요. 열려 있어야 보여줄 거 아닙니까? 그리고 나온 게 햇살 문제예요. 일본이 숭배하는 야마또 태양의 아침햇살이 본존불을 비춘다라는. 이거 일본 사람이 만들어 퍼뜨린 겁니다. '아, 이 위대한 걸 우리가 가졌어' 하면서 감격한 거죠. 교과서에 석굴암 기행문을 싣고… 대표적인 식민이데올로기예요. 그런데, 뭐라고요? 우리 학자들은 앞 다퉈 이 내용을 전파하고 있어요. 제발 왜곡 좀 하지 말자고요."

성 소장이 기존 역사학계와 미술사학계, 불교학계 등을 싸잡아 비판하는 데에는 '석굴암에 대한 무한한 애정'의 표현이다. 그는 "알면 보인다면서도 학자들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며 "국어선생인 제가 석굴암에 뛰어든 이유는 제대로 알고 보자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성 소장이 석굴암에 대해 주장하는 내용들은 나름의 탄탄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다만, 대상을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비판하는 직설적인 표현에 소설가로서의 무궁무진한 상상력이 더해져 다소 심하다 싶은 주장이 간혹 거슬릴 뿐. 그는 이에 대해서 "이리저리 눈치를 봐야 하는 역사학이 아니라 국문학을 전공한 것이 천만다행"이라며 "그래서 상상력을 맘껏 펼칠 수 있었다"고 웃었다.

성 소장의 석굴암 연구는 아직 뜨겁게 계속되고 있다. 그는 기존 학자들이 내놓은 '원형 논쟁' 등을 비롯한 수많은 통설이나 상식에 맞서 수십 년간 투쟁을 해오고 있다. 그는 이 대목에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비판하면 반박을 하든 반론을 하든 해야 하는데… 안 해요. 제 비판을 다 보면서도 어디 미친 녀석이 떠드는 구나, 뭐 그런 식이죠. 그건 그렇다 치고, 왜 자기들끼리도 논쟁을 안 해요. 원형, 원형 그러면서도 서로 눈치 보고, 그럴 듯한 논리가 있으면 그냥 갖다가 쓰고…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또 모른 척 하고…."

석굴암, 역사의 법정에 세워 심판 받을 것

성낙주 소장이 펴 낸 <석굴암 그 이념과 미학>과 <석굴암 백년의 빛>에는 수십 년간 석굴암을 연구해 온 결과물이 오롯이 담겨 있다.
 성낙주 소장이 펴 낸 <석굴암 그 이념과 미학>과 <석굴암 백년의 빛>에는 수십 년간 석굴암을 연구해 온 결과물이 오롯이 담겨 있다.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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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장은 그동안 <석굴암을 위한 변명>(1998), <석굴암 그 이념과 미학>(1999), <석굴암 백년의 빛>(2009) 등 석굴암 관련 서적을 줄곧 써 왔다. 그리고 조만간 <석굴암, 역사의 법정에 서다>를 발간할 계획이다. 그는 이 책에서 지금까지 그가 주장했던 내용들을 한데 모아 독자들에게 선보이며 역사의 심판을 받겠다고 한다.

"토함산 자락에 자리 잡은 지금 모습 그대로의 석굴암과, 기존 학자들이 사기치고 왜곡하며 만들어 낸, 지붕이 없고 아래로는 물이 흐르는 그들만의 석굴암을 법정에 세울 겁니다. 조형미, 균형미, 조각의 아름다움 등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들만의 석굴암'을 비판하면 답이 없어요. 그걸 독자들과 함께 풀어 보자는 거지요. '석굴암, 역사의 법정에 서다' 제목이 너무 자극적인가요?"

석굴암미학연구소 성낙주 소장
1954년 경기도 화도읍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5년 장편소설 <차크라 바르틴>(제1회 상상문학상 수상)
전교조 활동으로 1989년 해직되었다가 1994년 복직
현재 서울 온곡중학교 국어교사 재직
석굴암에 대한 성낙주 소장의 애정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그는 <석굴암 그 이념과 미학>(개마고원, 2008)에서 석굴암을 바라보는 심정을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그리고 그 고백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1천여 년 전, 이 땅의 동쪽 끝자락에 한 송이 들꽃으로 피어난 예술혼의 결정체 석굴암. 창건 당시의 원형을 거의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석굴암은 기적이요, 축복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석굴암은 어떤 모습인가. 시간을 뛰어넘고 사라진 기록들을 복원해가면서 되짚어본 석굴암의 이념과 미학은 우리가 쉽게 잊고 지내기는 너무 크고 중요하다. 석굴암의 창건과 동기 및 그 주체, 역사적인 배경, 돔형 지붕의 기원, 그리고 감히 숨소리조차 내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석굴암 조각들에 대한 총체적이고도 유기적인 통찰이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성 소장은 끝으로 "석굴암의 원형 논쟁은 이제 그만하자"면서 석굴암의 보존에 대해서 '제2의 석굴암'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지금의 석굴암은 안타깝기는 하지만 유리벽으로 차단할 수밖에 없어요. 수학여행 오는 학생들의 숫자만도 엄청난데, 개방했다가는 큰일 날 겁니다. 그래서 제2의 석굴암을 만들자고 제안합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는 하고 있는데, 문화재청과 경주시, 그리고 석굴암을 관리하는 사찰 등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국민의 여론을 모아 제2의 석굴암을 세웠으면 합니다."

왼쪽 위에 보이는 석굴암은 보존을 위해 유리벽으로 차단돼 있다. 성낙주 소장은 "제2의 석굴암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왼쪽 위에 보이는 석굴암은 보존을 위해 유리벽으로 차단돼 있다. 성낙주 소장은 "제2의 석굴암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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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석굴암, #세계유산, #성낙주, #석굴암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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