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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전 세계는 뜨거웠다. 거리마다 저마다의 옷을 입고 저마다의 팀을 응원하며 팬들은 흥분했다. 월드컵이 열리는 남아공에서는 그보다 더 뜨거운 열정이 운동장으로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사고'를 쳤다.

유로2004 이후 침체기를 겪는 그리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메시만으로도 전 세계를 떨리게 하는 아르헨티나를 만나 패배를 당했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강호 나이지리아를 만나 무승부를 거두며 한국 축구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에 진출했다. 비록 우루과이를 만나 대등한 경기를 펼치고도 뼈아픈 패배를 당해 도전은 끝났지만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은 박수 받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허정무(현 인천유나이티드) 감독이 있었다.

허정무 감독과의 미팅? 내가 빠질 수 없지

월드컵 후 허정무 감독을 방송사와 언론사가 가만 둘리 만무했다. 인터뷰가 연일 나왔고 허정무 감독이 착용한 넥타이, 사용하는 벨소리까지... 그는 이제 대한민국의 유명인사였다. 예능 프로그램이 눈독 들일 최고의 명사 중 한 명이었다.

MBC <무릎팍도사>는 7월 중순 즉각 허정무 감독 편 녹화 일정을 발표했다. 언론사들은 앞다투어 그 소식을 타진했다. 팬들도 흥분했다. 나 역시 매우 흥분됐다. 그리고 뉴스의 끝자락에서 내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발견했다.

'녹화 후 팬분들과 뒤풀이 예정. 참가를 원하는 팬분은 imbc홈페이지를 통해 사연을 보내주세요'

나는 즉각 키보드를 잡았다. 이런저런 얘기, 하지만 내가 꼭 가야 하는 이유를 쉼없이 써내려 갔다. 20년도 더 된 어머니의 고등학교 앨범에 남아 있는 허 감독의 사인부터 나의 축구 사랑 이야기, 감독님 사랑 이야기까지... 내가 봐도 참 구구절절했다.

뒤풀이 참가자 발표일이 코앞에 다가오자 속이 쓰렸다. 긴장 탓인것 같았다. 발표일 하루 전 집으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MBC입니다. 팬미팅이 거의 확정되셨는데 참가가 확실히 가능하시죠?" 물론이었다. 이 한 통의 전화는 나의 심장을 최대치로 뛰게 했다. 메시지를 통해 친구에게도 자랑하고 가족들에게도 자랑했다.

그리고 당첨자 발표일. 발표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여기서부터 나의 '잘못된 만남'은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방학이었지만 보충학습 기간이라 학교에 있던 나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근처 도서관에 들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지만 감감 무소식이었다. 설마 취소된 건 아니겠지? 나의 기우였다.

나는 당첨자 명단 맨위에 있었다. 고등학생이기 때문에 장소가 호프집인 게 마음에 걸렸지만 설마 하는 마음은 애초에 들지 않았다. '행복',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담임 선생님께 어렵사리 보충학습을 빠질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선생님은 흔쾌히 동의해 주셨다. 대신 우리 고등학교의 발전을 기원하는 사인을 받아오라고 명령하셨다. 나 역시 흔쾌히 동의했다.

5시간 버스 타고 5분 보고 5시간 버스 기다린 얘기

7월 28일 바로 그날이다. 내가 드디어 허정무 감독을 만나는 그날. 점심 시간 이후에 학교를 나와 터미널로 향했다(나는 강릉에 살고 있다). 만나는 장소는 일산 MBC드림센터 부근 호프집이었다. 터미널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면 1시간 정도 걸린다. 그날따라 차가 밀렸다. 눈을 붙여 봐도 그대로인 것 같았다.

어렵사리 터미널에 도착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지하철을 탔다. 근처 지하철역에서 내려 호프집을 찾았지만 길을 물어도 아는 사람도 적었고 건물은 빽빽했다. 직접 호프집에 전화를 걸어 위치를 묻고 또 헤매다가 겨우 겨우 시간에 맞추어 호프집에 도착했다. 내가 거의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늦게 온 만큼 내 자리는 제일 구석진 곳이었다. 주섬주섬 짐을 정리했다. <오래 갈려면 함께가라>는 책도 감독님께 드리기 위해 서점에서 샀다. 또 내가 쓴 축구 기사도 프린트하고 편지도 썼다. 다 감독님 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잘못된 만남은 이제 시작되었다. 프로그램 PD분이 뒤풀이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혹시 여기에 미성년자 없으시죠?"

물음표가 찍어질 때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아직 미성년자다. 호프집은 미성년자 출입 금지란다. PD는 미처 확인을 못해 미안하다며 아쉽지만 잠깐 뵙고 그냥 가야될 거 같다고 했다. 애써 담담한 척했다. 마침내 허정무 감독이 녹화를 마치고 왔다. 5시간이 걸리는 긴 녹화였단다. 나도 5시간의 긴 여정을 통해 강릉에서 여기 서울까지 왔다. PD가 잠시 허정무 감독에게 내 사연을 말해 주셨다. 감독님도 많이 당황하셨나 보다. 자신이 보호자를 자청했지만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울음이 터져나왔다. 나도 모르게.

감독은 미안하시다며 어깨를 토닥여 주시고 사인도 4장이나 해주셨다. 물론 우리 학교의 번영을 기원하며. 금세 기분이 풀렸다. 다음엔 집에 초대하겠다고 하셨다. 대표팀 사인도 보내주신다고 했다. 인사 치레이거니 생각했다.

사인 4장을 갖고 씁쓸하지만 기쁘게 문을 나섰다. 하지만 곧장 강릉에 갈 수는 없었다. 혹시 몰라 버스표를 밤 11시 30분으로 예매해 놓았던 것. 버스표를 교환할 수 없어서 일산과 서울에서 꼬박 5시간을 혼자 보내야 했다. 잘못된 만남답게 한 번 일이 꼬이자 계속 꼬인다. 5시간을 홀로 일산과 서울을 서성이며 편의점 김밥으로 저녁을 때웠다.

'지금쯤 호프집에서는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을까'를 속으로 되뇌이며. 집에 돌아오니 새벽 2시 30분.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자동 반복 카세트마냥 '5시간 가서 5분 만나고 5시간 버스 기다리고 집에 온' 이야기를 20번은 되풀이한 것 같다.

이번에도 잘못된 만남? 조바심에 애는 타고

허정무 감독 편 방영일. <무릎팍도사> 홈페이지에 뒤풀이 동영상이 나왔다. 내가 많이 나왔다. '방송에 나가면 어쩌지'하며 당황했지만 다행히 방송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문자가 왔다. 팬클럽 카페를 만들었으니 가입하라는 담당 PD의 문자였다. 물론 그날 가입했다. 틈틈이 카페에 들려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날 매우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허정무 감독이 나를 집으로 초대한다는 것이었다. 혼자는 뻘쭘하니 팬클럽 분 몇 분 더해서... 학교 때문에 못 갈 것 같다고 하자 내가 못 가면 약속 자체가 취소되니 꼭 와달라고 하셨다. 다시금 담임 선생님께 양해를 구했다. 담임 선생님은 이번에도 흔쾌히 동의하셨다. 매우 감사했다.

약속한 그날이 하루 이틀 다가왔다. 약속은 월요일 저녁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토요일이 되도록 아직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있었다. 몹시 당황스러웠다. '잘못된 만남'의 부활인가? 카페를 통해 물어봐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리고 일요일, 기적이 일어났다. 허정무 감독님의 작은 따님과 연락이 닿았다.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었다. 자신은 잘 모르니 언니에게 물어본다고 했다. 그리고 어렵사리 PD분 하고 연락이 닿았다. 오후 7시까지 서래마을 홍일회관으로 와달라고 했다. 이번에는 부모님과 함께 와도 된다고 해서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향했다. 어머니도 급하게 업무를 마치고 학교로 나를 데리려 오셨다.

홍일회관에 도착하니 카메라가 있었다. 후에 알고 보니 스포츠 뉴스로 제작하려다 너무 사적인 자리라 촬영을 접었다고 했다. 음식점에는 팬분들을 비롯해 허정무 감독과 두 따님이 계셨다. 그리고 김현태 골키퍼 코치도 와주셨다. 이게 다 나를 위한 자리였다. 너무나도 행복했다. 하늘을 넘어선 천국에 당도한 기분이었다. 고깃집에서 고기도 구워 먹고 소담도 나눴다. PD분은 허정무 감독님을 만나지 못해 눈물 흘리는 나의 순수한 모습을 다큐로 제작할까도 고민하셨다고 했다. 말만 들어도 너무나도 감사했다.

감독님집에서 과일도 먹고... 꿈만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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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깃집의 소담 후 참석자들은 감독님 집으로 향했다. 으리으리했다. 방도 구경했다. 각종 축구공과 축구 유니폼 등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간에 '국가대표 축구팀 남아공 본선진출'이라고 적힌 대표팀 사인볼이 있었다. 멋졌다. 구경 후에 감독님이 갖고 싶은 걸 선택하라고 하셨는데 일단은 거절했다. 모두가 다 감독님께 뜻깊은 공이기 때문이다. 그 때 같이간 팬클럽 회장이 냉큼 아까 그공을 추천해 주셨다. 매우 감사했다. 감독님도 동의하셨다. 꿈꾸는 기분이 들었다. 거실에서는 두 따님이 준비하신 다과도 먹고 볼튼 아스날의 경기도 시청했다.

헤어질 때는 여러 분들과 사진도 찍고 내 명함도 나눠드렸다. 김현태 골키퍼 코치도 내게 명함을 주셨다. 모임에 참가하신 모든 분들이 다 소중하고 뜻깊은 인연이었다. 내 인생 일대의 경험이었다. 잘못된 만남이 아닌 인생 최고의 경험이었다.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하고 집으로 오는 길이 아름다웠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다.

허정무 감독님과 함께한 지난 2년 6개월 그리고 지난 7월 28일과 9월 13일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잘못된 만남 그러나 결국엔 최고의 만남이었던 허정무 감독님.

덧붙이는 글 잘못된만남 응모글
허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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