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화에는 특유의 일본 정서가 녹아있다. 시끌벅적한 에피소드는 줄이고 절제된 감정만 수채화처럼 배어있다. 여대생들이라면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카모메 식당>을 한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도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팬으로 알려져 있는데, 같이 찍은 사진을 컴퓨터 바탕화면에 저장해 놓았을 정도라고 한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요시노 이발관>으로 데뷔해서 많은 상을 받았으며 <카모메 식당>으로 일본에서 인지도를 확보했다. <요시노 이발관>은 집단 안에서 획일화되기를 강요당하는 개인이 자신의 개성을 찾으려고 투쟁하는 영화, <카모메 식당>은 갈 곳 없이 부유하고 있는 개인이 사람들 속에서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심리를 그린 영화다. 감독은 두 영화로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다른 시각을 그려내고 있다. 두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결국 개인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우리의 모습이다.

 

이분법적 사고 따르지 않는 아이들, <요시노 이발관>

 

요시노 이발관 스틸컷

▲ 요시노 이발관 스틸컷 ⓒ 씨네가

<요시노 이발관>은 남자아이들은 바가지 머리를 해야 한다는 한 시골마을의 전통을 도쿄에서 온 전학생이 거부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루고 있다. 이 마을은 '산의 날'에 토속 신에게 남자 어린이들이 기독교 음악인 '할렐루야'를 바치는 모순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의문도 가져보지 않은 채 따른다. <요시노 이발관>은 주된 등장인물들이 아이들이라서 아동영화라고 생각하는데 실은 굉장히 심오한 주제를 보여주고 있는 영화다.

 

100여 년간 대대로 아이들에게 바가지 머리를 제공하는 '요시노 이발관'은 유일무이한 권력을 상징한다. '요시노 아줌마'는 모두에게 친절하고 너그럽지만, 전통에서 벗어난 일 앞에서는 관용을 상실한 독재자로 변한다. 전체에서 개인의 색깔이 드러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심각한 주제를 얼짱이 되고 싶은 아이들의 투쟁으로 그려낸 감독의 센스는 놀랍다.

 

영화 속 케이타의 아버지는 하루하루를 권태롭게 살아간다. 유일한 낙은 아무도 없는 욕실 안에서 마음껏 가요를 부르는 것인데 그것마저도 제지를 당한다.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는 그는 부인과 의사소통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기가 죽어 있다. 29년 근속으로 받은 꽃다발은 너무 화려해서 상대적으로 그를 더 초라하게 만든다.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인물은 마을에서 정신이 나간 사람 취급을 받는 '케케 아저씨' 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치렁치렁한 머리와 패션으로 아이들을 쫓아 다니며 골려주고 있지만 때때로 너무 멀쩡한 소리를 해서 보는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바가지 머리를 강요받은 전학생에게 '바보 같은 어른들 말은 신경 쓰지마'라고 말하고, 케이타의 아버지에겐 '당신은 돈이 없어도 행복하잖아요'라고 말한다. 영화에서 아이들에게 힘이 되는 충고를 해주는 사람들은 케케 아저씨와 케이타의 아버지밖에 없는데 그들은 모두 어딘가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이 마을의 전통이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을 억누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똑같은 헤어스타일은 아이들의 개성을 묵살한다. 요시노는 아이들은 보호 받아야하고 쉽게 구분해야 하기 때문에 헤어스타일은 통일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보호 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아이들에게 보호를 거부할 권리도 함께 주어지는 것 아닐까?

 

결론적으로 영화는 현명한 해결 방법을 보여준다. 요시노의 아들은 헤어스타일의 자유를 위해 앞장서서 투쟁하지만, 요시노를 사랑하는 마음도 함께 드러냄으로써 얼음 같았던 요시노의 마음을 녹인다. 아이들은 '적 아니면 동지'인 어른들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따라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전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데미안'처럼 알을 깨고 나와야 했지만 기존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았다. 결국 아이들은 평화적으로 얼짱 헤어스타일을 고수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

 

마음 둘 곳 없는 외로운 현대인 보여주는 <카모메 식당>

 

카모메 식당 스틸컷

▲ 카모메 식당 스틸컷 ⓒ 스폰지

<카모메 식당>은 핀란드에서 '카모메 식당'을 혼자 운영하는 사치에와 그 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그린 영화다. 사치에는 누구에게나 미소 지을 수 있는 여자다. 습관적으로 호의가 몸에 배었으나 마음은 잘 열지 않는다. 일본 음식을 생소하게 받아들이는 핀란드에서 한 달 내내 손님 한 명 찾아오지 않더라도 일본 음식만을 고집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어느 날 카모메 식당에 두 명의 일본 여성이 각각 찾아온다. 눈을 감고 지도에서 손으로 짚은 곳에 핀란드가 있어서 무작정 왔다는 미도리와 TV에서 본 핀란드가 왠지 자유로워 보여서 왔다는 마사코. 그들은 핀란드가 아니라 다른 어떤 곳이라도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으나 꼭 가야 할 이유도 없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는 현대인을 가장 잘 표현한 인물 설정이다. 마음 둘 곳 없는 세 명의 여성이 카모메 식당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함께 모이게 된 것이다.

 

사치에는 미도리와 마사코를 좋아하지만 그들이 떠나야 한다면 굳이 붙잡지 않는다. 깊은 사연이 있어 보이는 그들의 과거도 영화는 묻지 않는다. '핀란드에 오신 걸 환영 합니다'라는 사치에의 한 마디로 정리해 버린다. 다분히 일본적이다. 한국 영화였다면 의례적으로 과거 이야기가 회상되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카모메 식당>은 그 사람의 과거가 어찌되었든 현재가 제일 중요하다는 의도로 생략했다. 한국영화는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고 마음을 나누기 위해 과거를 중요시 여기지만, 일본은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문화다.

 

카모메 식당의 첫 손님이자 단골손님인 핀란드 청년 토미는 늘 혼자 식당에 온다. 친구도 없느냐는 미도리의 핀잔에도 빙그레 웃기만 한다. 이 청년의 모습에서 카페 열풍의 근원적인 배경심리를 찾을 수 있다. 현대인은 외롭다. 세상은 크고 복잡하지만 정작 갈 곳은 없다. 그런데 어딘가에 나를 기억해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외로운 개인에게 큰 위안이 된다. 그곳에 나와 마음을 적당히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더욱 좋다. 현대인들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람을 통해서 가장 큰 위안을 얻는 것이 사실이다. 

 

피둥피둥 살이 오른 동물들이 먹음직스럽게 음식을 먹는 모습이 좋다던 사치에. 핀란드의 갈매기는 흡사 고양이처럼 살이 올라있다. 그래서 카모메 식당이다(카모메는 갈매기라는 뜻이다). 맛있는 것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섭취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카모메 식당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카모메 식당을 방문하면서 치유되어 가는 과정을 감독은 음식을 통해서 부드럽게 풀어낸다. 사치에는 발 디딜 틈 없이 꽉 찬 식당을 보면서, 자신이 만든 음식으로 허기진 영혼을 채워가는 사람들을 보고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사치에가 어릴 때 모두에게 미움을 받은 집 없는 고양이에게 음식을 나눠주었던 것처럼.

 

영화에서 달콤한 향이 솔솔 배어나올 것만 같은 시나몬 롤은 일본의 소울 푸드만 고집하던 사치에가 처음으로 타인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자신이 고집하던 것만 만들던 사치에는 핀란드인들이 좋아하는 시나몬 롤을 만들면서 손님들을 모으게 되고, 그렇게 들어 온 손님들은 일본의 소울푸드인 오니기리까지 먹어보게 된다.

 

사치에는 혼자 하는 수영을 즐긴다. 수영장은 사치에에게 특별한 곳이다. 수영장은 치유의 공간이기도 하고 비현실적인 사색의 공간이기도 하다. 영화의 후반에는 수영장에 가득 찬 사람들이 사치에에게 박수를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혼자였던 사치에가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그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요시노 이발관>과 <카모메 식당>의 이야기는 잔잔하게 흘러간다. 영화를 제대로 즐기려면 자신의 의식의 흐름도 영화와 같은 템포로 천천히 흘러가게 해야 한다.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책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때는 아직 그 책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것이라고. 나는 아주 어릴 때 후루야타 야스오 감독의 <철도원>을 보면서 지루함을 느꼈다. 그러다가 최근에 <철도원>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는데, 가슴 한쪽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나도 습관적으로 미소 지을 수 있는 여자가 된 것일까.

 

'일본정신의 풍경'이라는 책을 보면 일본 사람들은 차분한 격정과 돌연한 체념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한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스타일과 잘 들어맞는 말인 것 같다. 그녀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차분하지만 발랄하고, 예의를 지켜서 행동하지만 친근하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는 과하게 에너지가 넘치고 복잡한 사회에서 예민한 감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위한 영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영화리뷰전문사이트 무비조이(http://www.moviejo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0.09.13 10:44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영화리뷰전문사이트 무비조이(http://www.moviejo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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