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을 이룬 한국 축구는 박지성의 발끝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나 상대 수비수들의 '경계대상 1호'였던 박지성은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공간을 만들어내며 공격을 이끌었고, 주장으로서 지도력까지 발휘했다. 특히 그리스전에서 그가 터뜨린 골은 한국 축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명장면이었다.  

또한 우리에게도 세계 최고의 명문구단 선수가 있다는 자부심은 월드컵 무대를 처음 밟은 젊은 선수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축구팬들은 우루과이와의 16강전이 끝난 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말을 들었다. 박지성이 "나의 월드컵이 끝난 것 같아 아쉽다"고 털어놓은 것이다. 그는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도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임하겠다"며 넌지시 작별을 내비치기도 했다.

물론 당장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겠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박지성 없는 한국 축구'를 상상해보지 않은 축구팬들은 막상 그가 떠날지도 모른다고 하니 8강 탈락의 아쉬움보다는 벌써부터 4년 뒤 브라질 월드컵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박지성, 한국 축구의 '얼굴'이 되기까지

2002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잉글랜드,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중요한 골들을 터뜨리며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한 박지성은 거스 히딩크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당당히 주전 자리를 꿰찼다.

왕성한 체력과 넓은 활동 반경, 빠른 발까지 갖춘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의 압박 축구에서 더욱 빛을 발했고 포르투갈과의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리는 등 '4강 신화'에 큰 역할을 했다.

월드컵이 끝난 뒤 곧바로 이영표와 함께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아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으로 이적해 유럽 진출의 꿈을 이룬 박지성은 잠시 슬럼프를 겪었지만 이내 히딩크 감독이 기대했던 활약을 펼치며 유럽에서도 주목받는 스타가 됐다.

박지성의 활약은 유럽 최고의 명문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까지 전해졌고, 마침내 세계적인 명장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마음까지 사로잡으면서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맨유 유니폼을 입는 데 성공했다.

기대 반, 걱정 반을 안고 세계 최고의 스타들이 모여 있는 맨유에 입단한 박지성은 웨인 루니나 크리스티아노 호날두처럼 팀을 대표하는 스타는 아니었지만 자기만의 차별화된 강점을 앞세워 제역할을 해냈다.

화려하진 않지만 골보다 승리를 중요시하는 헌신적인 플레이는 동료 선수들로부터 믿음을 얻었고, 퍼거슨 감독도 강팀과 맞붙는 '빅 매치'에서는 거의 빠짐없이 박지성을 선발로 내세우며 깊은 신뢰를 보냈다.

최고의 동료들과 맨유를 이끌며 프리미어리그, 챔피언스리그 우승의 기쁨을 누린 박지성은 한국을 넘어 아시아 축구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

'33살의 박지성'은 어디에 있을까

박지성은 최근 인터뷰에서 다시 "체력이 뒷받침 된다면 당연히 다음 월드컵에도 출전하고 싶다"며 유연해진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체력'이라는 전제 조건을 달아놓은 것이 눈길을 끈다.

박지성은 왜 말끝을 흐렸을까. 박지성은 4년 뒤 만 33살이 된다. 전성기는 아니지만 그의 말대로 체력만 뒷받침된다면 충분히 다음 월드컵에도 출전이 가능한 나이다. 자기관리가 철저한 박지성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앞으로도 맨유에서 최고의 선수들과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여야 하는 박지성으로서는 나이가 들수록 부담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박지성이 맡고 있는 역할은 가장 많은 체력이 요구되는 자리다.

또한 국가대표보다는 클럽에 대한 충성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퍼거슨 감독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퍼거슨 감독은 평소 선수들의 체력 부담이 크고 부상이 염려되는 국가대표 경기에 부정적이었고, 실제 적잖은 맨유 선수들이 이른 나이에 국가대표를 은퇴했거나, 이를 고민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더 나은 선수를 찾아 헤매고 있는 맨유에서 박지성이 더욱 오랫동안 활약하고 싶다면 일찌감치 국가대표팀을 떠나 클럽에서의 활약에 집중하는 쪽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월드컵에서 좋은 성과를 올려 한국 축구의 위상을 올려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럽 최고의 무대에서 꾸준히 좋은 활약을 펼쳐 한국과 아시아 선수들의 인지도를 높이고 길을 넓혀주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다.

국가대표로서 거의 모든 것을 이룬 박지성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에서 박수 받을 때 떠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만약 다음 월드컵에 출전하더라도 지금보다 기량이 떨어질 4년 뒤에는 후배들에게 밀려나 그라운드가 아닌 벤치를 지켜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있을 수 있다.

물론 한국 축구로서도 박지성을 대신할 수 있는 선수를 키워내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이청용이 그 가능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역할이 다를 뿐더러 모두가 인정하듯 박지성은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서 좀처럼 나오기 힘든 특별한 선수다.

또한 많은 이들이 간절히 원한다면 박지성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고, 그 역시 또 한 번의 월드컵 기회를 굳이 마다할 리는 없다. 비록 체력과 속도는 떨어지더라도 박지성이 갖고 있는 경험만으로도 한국 축구에 큰 힘이 된다.

하지만 더 먼 곳을 내다본다면, 당장은 힘들더라도 젊은 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것이 한국 축구를 강하게 만드는 지름길일 수도 있다. 지네딘 지단 은퇴 이후 만신창이가 된 프랑스 축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아직 결정의 시간은 남아있다. 섣불리 대답을 재촉하기보다는 일단 이제 막 월드컵을 끝내고 돌아온 박지성에게 숨 돌릴 틈을 주면서 앞으로 천천히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이 옳은 순서일 것이다.

한국 축구의 가장 큰 고민은 박지성이 언제 은퇴할 것이냐가 아닌, 어떻게 하면 새로운 박지성을 더 많이, 더 빨리 키워내느냐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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