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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청나라와 조선은 첩보전을 벌였다.
▲ 압록강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청나라와 조선은 첩보전을 벌였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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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씨가 폐출되어 죽은 것은 국가의 큰 변이므로 청나라 사람들이 곧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저들이 알고 물어오게 된다면 우리 측에서 먼저 말하는 것만 못하게 될 것이니 강씨의 죄악을 낱낱이 적시하여 서둘러 주문(奏聞)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기어라, 알아서 기면 복이 있나니

비국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비변사는 군사정보를 다루는 문무합의기구다. 변경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청나라는 조선에 세작(細作)을 심어놓고, 조선은 청나라에 간자(間者)를 풀어놓고 있다. 양국 첩보전의 각축장 의주에서 올라온 정보를 취합 분석한 비국의 보고는 당하여 끌려가는 것보다 먼저 선수를 치자는 것이다.

"승문원에서 주문을 지어 사은사 이경석의 사행에 추가로 부치도록 하라."
명을 받은 승문원이 주문을 작성했다.

"저희 나라가 복이 없어 궁중에서 변이 발생하였기에 전후 사실을 상세히 진술하여 황제께 아룁니다. 죽은 세자빈 강씨는 그 형제가 죄를 짓고 멀리 귀양 간 것을 분하게 여겨 내가 있는 곳에 이르러 큰 소리를 지르고 그 뒤로는 문안마저 완전히 폐지하였으며 수라에 독을 넣어 나로 하여금 위험한 지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실례로 내가 물린 수라를 시녀들이 먹고 광기를 일으키거나 쓰러졌으며 나도 한 달이 넘게 치료하여 겨우 소생하였습니다. 이것은 고금에 없었던 변이나 목숨만은 보전해 주고자 하였지만 여론이 들고 일어나기에 부득이 강씨를 폐출하여 사사하였습니다. 이에 황제 폐하께 가감 없이 아뢰나이다."

이경석을 북경으로 보낸 인조가 대소신료와 비국당상을 불렀다.

"요즘 도성의 인심이 어떠한가?"
"평온하고 안정되어 있습니다."
김자점이 대답하였다.

또 한번 태풍을 예고하는 군주의 발언

"강씨를 비호한 사람들을 살피도록 하였는데 경은 그 사람을 찾아내었는가?"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때가 언제인데 아직 찾지 못했단 말인가?"
"망극하옵니다."
"강씨 생명보전을 주장한 사람을 적발하여 부도(不道)의 법률로 다스려야만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조심할 것이다."
또 한 차례 태풍을 예고하는 발언이다.

"흉한 물건을 파묻고 독을 넣은 것은 비록 단서가 없다 하더라도 왕위를 바꾸고자 꾀하고, 적의를 만들고, 내전(內殿)이라 칭하고, 성을 내 고함을 지르고, 문안을 폐한 것, 이상 다섯 가지 죄는 명백히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지 못하고 범연히 사형을 면해주기를 청한 것은 몹시 무리한 짓입니다."

김자점이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권력 실세 김자점이 '전복구이 독극물사건'은 물증이 없는 조작된 사건이라는 것을 실토하고 말았다.

"임금을 시해하려고 한 자를 반드시 구원하려고 하면서 '나는 임금을 사랑한다'고 말을 하니 임금을 사랑하는 자가 훗날 그 독에 피해를 입어야만 정신을 차리겠는가?"

"망극하옵니다."

"대각의 간원들이 삼공육경(三公六卿)을 거리에서 만났을 때, 말에서 내리지 않아 결례를 범했다 핑계대고, 혹은 병이 심하게 났다 하여 고의로 계사에 빠져 체직되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이 대각에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황공하옵니다."
대사간이 머리를 조아렸다.

유서가 있다는 것은 뜬 소문이 아니다, 진짜 존재한다

"강적(姜賊)이 죽지 않았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다섯 장의 종이에 유서를 써 그 자식에게 전하라고 시녀에게 주었다고 한다. 과인이 그 말을 듣고 그 시녀를 국문하였더니 그런 일이 있었다고 대답하였으나 유서는 끝내 내놓지 않았다."
소문만 무성하던 세자빈 유서의 존재를 임금 스스로 밝혔다.

"한문으로 썼다고 하였습니까? 언문(諺文)으로 썼다고 하였습니까?"
구인후가 호기심을 곧추세웠다.

"언문인데 간혹 한문을 섞었다고 한다."
"유서는 무슨 뜻이었다고 합니까?"
김자점도 내용을 알고 싶었다.

"그 글의 뜻은 대체로 '소숙(小叔)과 조씨가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 너희들이 성장하여 반드시 원수를 갚으라' 한 것이었다. 그 중에 한 시녀가 공초한 말은 이보다 더욱 참혹하다."

"그 참혹은 무슨 말이었습니까?"

"내 입으로 말하기가 민망하지만 경들은 들어라. '조부도 원수이니 원수를 갚아라' 했다 한다. 이런 망측한 일이 또 있단 말인가? 손자더러 할아비를 죽이라니 이러한 망발도 있단 말인가?"

노성이 빈청을 흔들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인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신료들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분위기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김자점이 화제를 돌렸다.

차기 정권과 불화?

"소숙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소숙, 즉 작은아버지라면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이다. 봉림대군을 원수를 갚아야 할 대상으로 지목했다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봉림대군은 이미 세자로 책봉된 차기 정권의 핵이다. 현재 정권과의 불화가 차기로 이어진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소현의 아들들이 인조 임금 아래 살아남는다 해도 차기 정권에서 생존할 확률이 희박해진다.

"아마 인평대군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
인조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람이 있었다.

"유서를 숨겨 놓은 사람을 의금부에서 국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사헌 김만중이 말했다.

"이미 내옥(內獄)에서 국문하였으니 밖으로 내보낼 필요 없다."
김남중이 재차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의금부에서 국문하도록 하소서."
이조참판 이행원이 또 청했다.

"만일 밖으로 내보내면 외부 사람이 다 유서의 말을 들을 것이니 바로 그의 술책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유서의 존재가 알려졌으니 내보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외부 사람이 누가 모르겠습니까."
대사헌이 간청하였으나 인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태그:#소숙, #압록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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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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