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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 소경원 소현세자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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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부도사 오이규로부터 세자빈을 폐출, 사사하라는 명을 완벽하게 수행했다는 보고를 받은 인조는 교명죽책(敎命竹冊)·인(印)·장복(章服)을 모조리 불태우라 명하고 승정원에 비망기를 내렸다.

"오늘의 일은 윤리를 밝히고 후환을 막는 데 의도가 있었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찌 법을 집행하여 여러 아이들로 하여금 어미를 잃고 날마다 울부짖게 하겠는가? 법이란 한 번 흔들리면 나라가 나라꼴이 안 되는 것이니 내가 참소를 믿고 죽이기를 즐겨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죄는 비록 무겁지만 해조로 하여금 예에 따라 장사지내게 하라."

예조에서 품의가 올라왔다.

"소현세자 곁에 장사지내고자 합니다."
"그걸 안이라고 내놓느냐? 강씨가 죄를 지어 폐출 사사되었으니 소현의 묘소 곁에 묻히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강씨 집안 선산에 묻어 주어라."

강씨 선산에 잠들어 있는 세자빈
▲ 영회원. 강씨 선산에 잠들어 있는 세자빈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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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의 여인으로 선택된 강씨 집 규수는 왕실 묘역에 뼈를 묻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허나,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 한 많은 생을 마감한 세자빈은 경기도 시흥 구름산 기슭 강씨 선산에 묻혔다. 그곳에는 인조 임금에게 충성을 다 바친 아버지 강석기가 잠들어 있었다. '예에 따라 장사지내주어라'는 임금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아리송하다.

세자빈을 폐출하여 사사한 사실을 종묘와 숙녕전에 고한 인조는 김자점과 구인후, 그리고 내사복시 별제를 편전으로 불렀다. 사복시와 내사복시는 비슷한 업무를 관장하나 사복시는 병조 아문이고 내사복시는 왕실 소속이다. 엄격히 구분하자면 사복시는 왕실 목장과 농장을 관리하고 내사복시는 임금이 타는 말과 가마를 관리하는 기관이다.

"경들의 수고가 많았소."
"황공하옵니다."

김자점과 구인후의 입은 다르지만 똑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과인이 지난번에 점찍어둔 흑마는 잘 자라고 있는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마마."

별제가 머리를 조아렸다.

"갈기가 잘생긴 갈색말도 괞잖다고 했지?"
"흑마와 우열을 가리기 힘듭니다."
"좋다. 그 두 마리 말을 좌상과 병판에게 내리도록 하라."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공하옵니다."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말들.
▲ 종마목장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말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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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내릴 수 있는 최상의 선물

임금이 타려고 기르던 말을 하사한 것이다. 김자점과 구인후의 입이 귀에 걸렸다. 임금이 타는 말은 내사복시에서도 특별히 관리되었다. 그 내구마(內廐馬)를 하사 한다는 것은 임금이 신하를 무한히 신뢰한다는 징표이며 임금이 내릴 수 있는 최상의 상이다. 임금이 하사하는 술(宣醞)하고는 격이 다르다. 현대적인 의미로 풀이하면 대통령이 타는 차와 동급의 자동차를 선물한 셈이다.

"향후 대책은 어찌하면 좋겠는가?"
"신료들을 불러 교서를 선포하고 팔도에 반포하소서."
"알았다."

김자점의 의견을 받아들인 인조는 문무백관을 명정전으로 불러들였다.

"반역하는 형상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군친(君親)을 해치고자 하기에 왕법을 불가피하게  시행하여 윤기를 밝혔다. 역부(逆婦) 강은 심양에 있을 때 왕위를 바꾸려는 계책으로 전(殿)의 칭호를 참람 되게 사용하고 적의를 미리 만들어 놓았으니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세자가 죽은 후에는 원망을 더욱 깊이 품어 문안하는 예(禮)를 폐지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가엽이 생각하여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천륜을 스스로 끊는 데야 어찌하겠는가? 궁중에 흉한 물건을 파묻고 수라에 독을 넣었으니 어찌 이처럼 죄악이 극도에 이르렀단 말인가? 돌아보건대 난적(亂賊)이 어느 시대인들 없겠냐마는 이렇게 악독한 역적은 옛날에도 없었다. 강상에 관계된 죄는 엄하게 다스리는 것이 법도다. 그렇지만 본가(本家)에 나가 스스로 죽도록 하고 다시 물품을 주어 관청에서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실로 부득이한 일이었지만 또한 측은한 마음이 든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니 잘 알 것으로 여긴다."

왕비의 침소. 경복궁 교태전과 함께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이하다
▲ 통명전 왕비의 침소. 경복궁 교태전과 함께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이하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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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소의 조씨의 부름을 받은 김자점이 후궁전을 찾았다. 실록이 우거진 통명전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어서 오시오. 대감!"

소의 조씨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흘렀다.

"마마! 문후 여쭈옵니다."

궁중에서 마마라 호칭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전의 상감마마와 내전의 중전마마, 대왕대비마마, 동궁전의 세자마마, 세자빈 마마 등이다. 그런데 빈(嬪)도 아닌 후궁전 소의에게 마마라니 역시 김자점은 아부의 달인이다.

"하하하, 이 밤중에 문후라니 어울리는구려."

가소롭지만 귀엽다는 표정이다. 사실 소의 조씨는 임금을 맞을 채비로 몸단장하고 있었다. 허나, 임금이 오지 못한다는 전갈을 받았다. 몸이 불편하다는 것은 구실일 뿐, 귀인 장씨에게 가려는 연막이라는 것을 풀어놓은 아이들을 통하여 알고 있었지만 투기는 화(禍)를 부른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심정을 위로해준다는 것인지 불러주어 고맙다는 것인지 헛갈린다.

"망극하옵니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오늘밤 전하를 뫼실 예정이었지만 성상께서 쉬고 싶다 하시어 대감과 차라도 한잔 하고 싶어서 불렀소이다."
"황공하옵니다."

"전하께서 병판과 김대감에게 내구마 1필 씩을 하사했다는데 경하 하오."
"모두가 마마의 은혜라 생각합니다."

"은혜라니요. 기왕 주는 거 좋은 걸로 주라고 했을 뿐입니다."
"황공무지로소이다."

김자점이 소의 조씨 앞에 머리를 박고 들지 못했다.

"뭣들 하느냐? 냉큼 차를 내오지 않고."

소의 조씨가 합문을 향하여 소리쳤다. 기다렸다는 듯이 내전 상궁이 차를 대령했다. 중전이 경희궁으로 쫓겨 간 이후, 중전을 모시던 내전 상궁이 아예 후궁전에 붙었다.

"어서 드시지요."
"예"

김자점이 찻잔을 들었다. 땅거미가 짙은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임금이 총애하는 후궁과 차를 마시는 것이 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알 길이 없었다.


태그:#소현세자, #강빈, #소경원, #영회원, #통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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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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