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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일을 하면서 법조계의 나쁜 관행을 보게 되었다. '교제'라는 이름으로 판사와 검사들에게 술을 사야 했다. 법정에서는 검사와 판사에게 무조건 슬슬 기어야 했다. 법원과 검찰 직원, 경찰관, 교도관들이 구속된 피의자를 변호사에게 알선해 주고 커미션을 챙겼다. 전문 브로커들은 커미션 액수를 가지고 여러 변호사를 만나 흥정을 하기도 했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78쪽 중에서)

법조계의 나쁜 관행, '스폰서' 문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던 1978년 법조계의 현실을 지적한 부분입니다. 벌써 30년이 훌쩍 지난 일이니 정상대로라면 이런 관행은 이미 없어졌어야 합니다만, 과연 그럴까요.

한 사업가가 20여 년간 검사들에게 향응을 제공하고 접대를 해왔다는 충격적인 폭로를 한 것이 불과 한달 전입니다. 그후 '스폰서 검사','스폰서 검찰'이라는 비아냥이 높아만 가는 가운데 현직 검사장의 실명까지 거론되는 것을 보니 '나쁜 관행'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나 봅니다. 이처럼 관행이란 정말로 무서운 것이어서 법을 다루는 법조계에서조차 때로는 법 위에 군림하는 것입니다.

제가 법원에서 일한 지도 12년째입니다. 그동안 법조계도 많이 깨끗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인들이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왔는지는 의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보더라도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저 역시 잘못된 관행에 눈감아왔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7, 8년 전쯤에 있었던 부끄러운 일을 다시 들춰내는 것은 나 스스로 떳떳하게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법원 회식 자리에 나타난 '이방인'의 정체

< PD수첩 >이 4월 20일 방영한 '검사와 스폰서'
 < PD수첩 >이 4월 20일 방영한 '검사와 스폰서'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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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통상 1, 2년에 한 번씩 재판부 업무가 바뀌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판사와 법원 직원들의 인사 이동이 잦은 편입니다. 그해 저는 인사발령으로 수도권 법원의 어느 재판부 소속 직원으로 배치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인사가 있으면 새로 온 사람을 환영하는 술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법원의 자연스런 문화였습니다. 당시 재판장이었던 A 판사는 20년 경력의 고참 부장판사였는데 법원 경력이 짧은 저를 환대해주었습니다.   

"우리 재판부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함께 잘 해봅시다."

A 판사는 며칠 후 고깃집에서 저녁 식사를 겸한 술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 자리에는 배석판사들과 재판부 직원 몇 명이 함께 했습니다. 인사 이동으로 재판부를 떠나는 사람과 새로 오는 사람이 섞여서 마지막으로 정을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나자 대부분 거하게 취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긴장한 탓인지 취하지는 않았지만 불콰한 얼굴을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빈 소주병이 늘어가자 사람들은 재판장인 A 판사에게 양해를 구하며 하나 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습니다. 마음 같아선 저도 일어서고 싶었지만 그날 술자리에서 막내였던지라 어쩔 수 없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게 되었습니다. 자정이 다가오자 이제 술자리엔 A 판사와 나, 그리고 제 전임자 세 사람만 남게 되었습니다. 술자리를 파하나 싶었는데 갑자기 양복 차림의 노신사 한 명(B씨)이 우리 자리로 끼어들었습니다.  

"형님, 어서 오세요."

난데없이 형님이라니…. A 판사는 B씨에게 깍듯하게 형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방인의 등장으로 술자리는 약간 어색해졌지만 그저 간단하게 수인사를 했을 뿐 그가 누구인지 왜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재판부 회식에 왜 판사의 형님이 끼어야 했는지 의아한 것만은 틀림없었습니다. B씨는 A 판사와 우리에게 술을 한두 잔씩 권하더니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했습니다.

술값 계산한 판사의 형님, 법정에 나타나다

누구에게나 불편한 술자리가 있다(이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불편한 술자리가 있다(이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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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씨는 'XX클럽'이라고 이름 붙은 술집으로 일행을 안내했습니다. 양주가 나오고 곧이어 여종업원이 하나 둘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단란주점 정도 되는 듯 싶었습니다.

그제서야 저와 전임자는 B씨가 왜 합석하게 되었는지 대충 알게 되었습니다. A 판사는 함께 일하는 직원들에게 저녁을 멋지게 사고 싶어서 자신보다 조금 더 여유가 있는 '형님'을 불렀던 것입니다. 저녁밥과 술값을 누가 계산했는지 뻔한 노릇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자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분위기 탓인지 이미 마신 술도 다 깨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얻어마시는 술이 편할 리가 있겠습니까. 동료와 함께 적당히 기회를 보아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왔습니다. 이날의 술자리는 판사와 직원들 사이에 단란한 술자리가 아니라 스폰서까지 낀 단란주점 자리였던 것입니다. A 판사와 B씨가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제삼자인 우리까지 공짜술을 얻어마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A 판사의 호의가 지나쳤다는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정작 문제는 다음날 벌어졌습니다. 인사이동 후 처음으로 재판이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술 때문에 쓰린 속을 달래가며 법정에 들어갔습니다. 그날따라 재판 건수가 많아 몸은 더욱 힘들었습니다. 오전 재판이 끝나갈 무렵, 어디서 본듯한 얼굴이 눈에 띄었습니다. 전날 아니 불과 몇시간 전까지 원치않는 술자리에 함께했던 그 형님이 법정에 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형님-동생' 호칭이 '변호사님-재판장님'으로

한 건설업체 대표가 수십명의 검사들에게 금품, 향응을 접대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파문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 달 21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열린 전국 공안부장검사회의에서 김준규 검찰총장이 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한 건설업체 대표가 수십명의 검사들에게 금품, 향응을 접대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파문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 달 21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열린 전국 공안부장검사회의에서 김준규 검찰총장이 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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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A 판사가 형님이라고 불렀던 B씨는 변호사였던 것입니다. 전날 밤만 해도 '형님'-'동생'으로 불리던 두사람 사이의 호칭은 어느새 '변호사님'-'재판장님'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A 판사와 B 변호사, 그리고 저뿐이었습니다. B 변호사는 다음 재판 때까지 증거를 제출하라는 A 판사의 설명을 듣고는 유유히 법정을 빠져나갔습니다.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정식으로 문제제기를 해야 할까, 그냥 넘어가야 할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저는 침묵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제가 그런 관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 데에는 경위야 어찌되었건 술자리에 동참한 저 역시 떳떳할 수는 없다는 생각과 함께 그놈의 관행이라는 것이 작용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연·혈연·지연으로 얽히고설킨 우리 사회에서 법조계라고 예외일 수 있겠느냐는, 스스로 생각해도 궁색한 논리 말입니다. 그러면서 저 혼자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A 판사와 B 변호사는 정말로 친한 선후배 사이일 것이다. 어쩌면 B 변호사가 판사로 지낼 때 가장 아끼는 후배 판사가 A 판사였을지도 모른다. 둘은 수시로 격의없이 가깝게 지내왔을테고 그래서 재판부 회식에도 아무런 사심없이 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정말로 우연히 법정에서 판사와 변호사로 두 사람은 만나게 된 것이다. A 판사는 B 변호사와 친분관계는 있을지언정 재판은 공정하게 진행했을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최면을 걸어보았지만 충격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수치스러운 마음도 지울 길이 없었습니다. A 판사는 실제로 사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고 공정하게 재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재판의 상대편 당사자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어떤 재판 결과에도 승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건 마치 축구 심판이 경기 전날 한쪽 팀 감독과 술자리를 함께 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있었던 일은 반면교사가 되어 지금까지 저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 일은 외부인이 동석하는 자리에는 점심이건 저녁이건, 일체 가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유사한 일이 생기면 바로 문제제기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A 판사는 변호사로 개업을 했습니다. 아마 판사 때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그 역시 또다른 판사에게 형님 행세를 하면서 스폰서를 자처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걸 생각하니 A 판사에게 정식으로 항의하지 못한 일이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다행히도 그후로 A 판사처럼 회식 자리에 스폰서를 끌어들이는 판사들을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 '당신은 스폰서가 있습니까' 응모글입니다.



태그:#스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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