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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조 위원장이 배포 중단을 지시한 영문책자 <진실과 화해> 표지.
 이영조 위원장이 배포 중단을 지시한 영문책자 <진실과 화해> 표지.
ⓒ 진실화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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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에서 펴낸 '영문책자 배포 중단' 논란이 결국 법원의 판단을 구하게 됐다.

진실화해위의 영문책자인 <Truth and Reconciliation>을 번역한 김성수씨 등 3명이 지난 4일 이영조 위원장을 상대로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기한 것으로 확인됐다.

소송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김성수씨는 1990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에섹스대학 역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특히 1998년 셰필드대학 동아시아학과에서 '함석헌 사상'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2001년 <함석헌 평전>(삼인)으로 번역해 국내에서 출간했다.

특히 노무현 정부 시절 의문사진상규명위 전문위원이던 그는 위원회의 1차 영문보고서 <A Hard Journey to Justice(정의를 향한 험난한 여정)>의 번역에도 참여했으며, 진실화해위에서는 국제협력팀장을 지냈다. 이 위원장이 배포 중단을 지시한 영문책자의 번역에도 참여했다.   

또다른 참여자인 박아무개씨는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한 뒤 2003년부터 동시통역과 번역을 전문적으로 해오고 있다. 그는 "다시 검토해봐도 잘된 번역이라고 자부한다"이라며 진실화해위의 '번역 오류' 주장을 반박했다.

또한 이번 소송에는 원어민 감수자였던 마이클 윌리엄 허트도 참여했다. 그는 최근 <코리아타임즈>와 한 인터뷰에서 "이 책자의 영어가 부정확하다거나 엉터리라는 것은 단연 진실이 아니다"라며 "내가 감수한 이 책자는 전문적으로 잘 쓰여진 학술적 영문"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1월 5일 <오마이뉴스>에서 이 위원장이 영문책자 배포 중단을 지시했다고 보도하자, 진실화해위는 "번역상의 오류가 많았다"고 공식 해명했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의 공식 해명은 '논란'에 불을 지폈다. 영문책자 번역과 감수에 참가한 인사들이 강하게 반발하며 '소송'을 적극 검토해왔고, 지난 4일 '명예훼손에 의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공식 제기한 것.  

이에 진실화해위측은 "현재 소송대응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짧게 밝혔다.

"'영문 번역 오류로 인한 배포 중단'은 허위사실 유포"

김씨 등은 소장에서 "영문책자 발간 당시 원고들이 영문번역한 후 영어가 모국어인 원어민 등에게 위원회의 내부결재를 통해 감수 의뢰를 하여 영문책자상의 번역 오류 발생 여부를 재확인받은 바 있다"며 "영문책자는 이영조 위원장이 상임위원직으로 활동할 당시 영문번역상의 오류 및 검토를 마치고 최종적으로 발간하고 배포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이영조 위원장은 종전 상임위원직으로 활동할 2008년 11월부터 2009년 2월까지 3개월간의 영문원고 검토기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영문책자의 영어오역에 대해 어떠한 지적도 밝힌 적 없었다"고 진실화해위측의 해명을 반박했다.

이어 이들은 "그런데 위원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영문책자의 번역오류를 이유로 배포중단의 업무지시만 하였을 뿐 구체적으로 어떠한 부분에서 번역상의 오류가 발생되었는지 명백히 지적한 바 없다"며 "위원장은 뒤늦게 번역오류를 해명하기 위해 감수를 마친 영문책자를 재감수 의뢰했지만 지금까지 번역오류가 발생된 부분을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이영조 위원장은 명확한 번역오류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각 언론사들을 통해 영문책자의 영문번역 오류로 인한 배포중단이라고 보도되게 하는 등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며 "이로 인해 지금까지 해온 영문 통번역 업무에 손실을 입힐 정도로 원고들의 명예에 크나큰 훼손을 입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끝으로 이들은 "원고들은 이영조 위원장의 '영문책자 번역오류' 발언으로 말미암아 정신적인 충격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으로 영문 통번역업을 함에 있어 큰 손실이 발생될 것이 경험칙상 명백하다"며 손해배상금 5000만 원을 청구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 2008년 12월 3년간의 위원회 활동을 정리한 <진실화해위원회 3주년 활동 현황>을 발행했다. 여기에는 ▲ 위원회 소개 ▲ 조사절차와 처리 ▲ 집단학살장소 발굴 등 조사활동 ▲ 결정사건 분석 ▲ 주요 성과와 향후 과제 등이 실렸다.

이후 위원회는 해외홍보를 위해 <진실화해위원회 3주년 활동 현황>을 영문으로 번역해 지난해 3월 <Truth and Reconciliation>('진실과 화해')이란 제목으로 영문책자를 펴냈다.

한국전쟁 시기 국군의 민간인 학살 장면을 표지로 한 영문책자는 최초 1000부를 발행해 국제기구와 과거사 연구 외국학자, 주한 외국공관, 외신 등에 배포됐다. 이후 영문책자 수요가 늘어나자 같은 해 11월 1000부를 추가로 찍었다.

영문책자 번역에는 3명의 국내·외 인사가 참여했고, 3명의 외국인이 감수를 맡아 발행됐다. 영문책자 발간에는 2130만 원이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영어 원어민조차 "번역은 분명하고 올바르다"고 하는데...

이영조 진실화해위 위원장.
 이영조 진실화해위 위원장.
ⓒ 진실화해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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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난해 12월 초 이영조 위원장은 취임 직후 부서별 업무보고를 받던 중 '영문책자 배포를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유는 '영문 번역상의 오류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이 위원장은 <오마이뉴스> 보도 이후에도 "해외에 내보이는 위원회의 얼굴인데 문법, 구문상의 오류, 어색한 부분이 많았다"며 "전임 위원장이 쓴 부분은 전문 번역가의 도움을 받고 감수를 거쳐서인지 비교적 괜찮았지만, 나머지 부분은 엉망이었다"고 거듭 '번역 오류'를 주장했다(지난 3월 <주간동아>와 한 인터뷰 중).

하지만 이 위원장이 내세운 '배포 중단 이유'는 설득력이 약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문책자의 번역과 감수에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외국인들이 참여했고, 이영조 위원장이 상임위원으로 재직 중일 때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영문책자가 발간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주 언론인 <시드니 모닝 헤럴드>의 아시아·태평양 담당 에디터인 하미쉬 맥도날드도 지난 1월 23일자 '진실이 위험에 처한 한국'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이 책자를 읽고 나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자는 영어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라며 "이 책자의 영어는 분명하고 올바르다(it is quite clear and correct)"고 진실화해위의 해명을 반박한 바 있다.

또한 이태훈 <코리아타임즈> 기자는 지난달 5일 장문의 기사에서 "하버드에서 교육받은 이영조씨가 주장한 높은 기준을 영문책자에 적용하고자 하면 이영조씨 그 자신이 진실화해위를 위해 작성한 영문원고도 배포금지가 되어야 마땅하다"며 "본사에서 지난해 3월 이영조씨가 런던대학 강연에서 발표한 영문원고를 분석한 결과 내린 결론은 이영조씨는 불가산명사와 가산명사도 제대로 구별 못하고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이러한 사정들 때문에 위원회 안팎에서는 '다른 이유' 때문에 영문책자 배포를 중단했다는 해석이 설득력 있게 나왔다.

이와 관련, 영문책자에 새롭게 수록된 전임위원장(안병욱 가톨릭대 교수)의 글(Historical Background of Korea's Past Settlement, '한국 과거사 해결의 역사적 배경')이 이 위원장을 불편하게 했다는 분석이 유력했다. 

영문책자에만 실린 안 전 위원장의 글에는 ▲ 이승만 정권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친일파 청산을 좌절시켰다 ▲ 남한 정부가 한국전쟁 시기 재판 등 어떤 사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민간인을 학살했다 ▲ 박정희 정권이 한국 사회에 극우파시즘 정권을 도입했다 등 뉴라이트를 비롯한 보수세력을 자극할 만한 내용이 실려 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1월 5일 첫 보도에서 "일제 식민지와 군부독재정권 등 '억압의 현대사'를 서술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평가한 안 전 위원장의 글은 건국과 산업화 등 이른바 '성공의 역사'에 더 주목해온 뉴라이트 시각과 정면으로 배치될 수밖에 없다"며 '뉴라이트의 좌파정권 흔적 지우기'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라틴아메리카 과거사 정리 전문가인 리 페인 옥스퍼드대 교수도 영문책자의 배포 중단을 크게 우려했다. 사진은 그가 지난달 15일 <코리아타임즈>에 기고한 글 중 일부.
 라틴아메리카 과거사 정리 전문가인 리 페인 옥스퍼드대 교수도 영문책자의 배포 중단을 크게 우려했다. 사진은 그가 지난달 15일 <코리아타임즈>에 기고한 글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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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페인 교수 "영문책자 배포 금지는 정당화될 수 없다"

특히 라틴아메리카 과거사 정리 전문가인 리 페인(Leigh Payne)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사회학)는 지난달 15일 <코리아타임즈>에 기고한 글에서 이영조 위원장의 영문책자 배포 중단 조치를 크게 우려했다.

그는 "이영조 위원장은 진실화해위 영문책자의 번역 실수가 많아서 배포 금지를 했다고 한다"며 "그러나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며 배포 금지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는 이영조 위원장이 과거 권위주의 문제를 조사하는 데 있어서 민주적 절차와 민주적 자유를 존중하길 기대한다"며 "이영조 위원장이 영문책자의 오역을 발견했다면 공개적이고 민주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그는 "진실위 활동은 국제적으로 알려져야 한다"며 "사소한 번역문제로 영문책자를 배포 금지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이번 금서조치로 그동안 (알려진) 한국 과거사정리 활동의 긍정적 면이 국제사회에서 손상을 입게 되었다"며 "이영조 위원장은 민주적 방법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야 국제사회에서 실추된 진실위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한편 이영조 위원장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고려대·경희대 교수와 뉴라이트 성향으로 분류되는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사무총장, (사)시장경제와 민주주의연구소 이사장 겸 소장 등을 지냈다.

이 위원장은 지난 2004년 17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의 경기 성남분당갑 공천을 신청했다가 떨어졌지만 2005년 12월 한나라당 지명을 받아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으로 임명됐다. 이후 상임위원으로 다시 선임된 이후 조사 관련 3개 소위원회 중 하나인 '민족독립규명위원회'를 맡아 활동하다가 지난해 12월 2일 송기인(1대)·안병욱(2대) 위원장에 이어 3대 위원장에 취임했다.

이 위원장은 취임사에서 "그동안 제3자의 눈에 편향됐다고 비칠 소지가 있는 일들이 적지 않았다"며 진보 성향인 전임 위원장 시절 이루어진 위원회 활동에 큰 불만을 나타낸 바 있다.


태그:#진실화해위, #영문책자 배포 중단, #이영조,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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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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