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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가는 길
▲ 창덕궁 후원 가는 길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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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에 국청이 개설되었다. 보통의 국청은 편전 근처에 설치했으나 이번만은 다르다. 유난히 소리를 지르는 여자들을 치죄하는 국청이기에 편전에서 멀리 떨어진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국문에도 순서가 있다. 곤장 30대를 쳐 자복하지 않으면 또 곤장을 쳐 90대가 상한선이다. 그래도 자백하지 않으면 주리를 틀었다. 90대 이상 치면 죄인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복죄하지 않으면 압슬형이고 마지막 단계가 낙형이다. 국청 바닥에 멍석이 깔리고 위관이 자리를 잡았다.

"시행하라"

위관의 명이 떨어졌다. 형리들이 멍석위에 사금파리를 깔았다. 순서를 건너뛰어 압슬형을 가하기 위해서다. 예정된 수순은 주리다. 허나, 시간이 없다. 푸른빛이 도는 날카로운 조각이 섬뜩하다.

영의정을 밟고 가려는 좌상

어젯밤, 김자점이 위관의 소임을 맡은 영상 대감댁을 방문했다.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류와 서북방면군 도원수였던 김자점은 패전 책임을 지고 위기에 몰렸었다. 하지만 인조와 반정 동지였던 김류는 아들 김경징을 제물로 기사회생했고 김자점은 소의조씨의 구원으로 살아났다.

"강씨 나인들이 예사 것들이 아니니 주리를 건너뛰어 압슬로 가시지요."
소의조씨의 뒷배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김자점의 위세가 영상을 압도했다.

"형문에도 순서가 있지를 않습니까?"
김류가 난색을 표했다. 절차가 문제되면 위관이 책임을 져야 한다.

"하오나 마마께서 속한 결과를 주문하셨습니다."
"소의마마가요?"

괴로운 신음을 토해냈다. 소의조씨가 누구인가? 후궁이지만 중궁전을 꿰차고 앉아있는 여인이다. 임금이 용상에 있지만 모든 권력은 후궁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김류다. 국사를 이끌어 가는데 정석이 아니라고 다잡아 보려했지만 역부족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알겠소이다."
영상 대감댁을 빠져나와 장동으로 향하는 김자점은 콧노래를 불렀다.

무릎뼈를 으스러트리는 압슬형

정렬을 비롯한 동궁 나인 다섯 명이 끌려나와 사금파리 위에 무릎이 꿇려졌다. 무릎에서 피가 흐르고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럴수록 형리들은 거칠게 다뤘다.

"강씨가 내어준 독을 어주방 누구에게 전했느냐?"
"그런 일이 없습니다."
"이런 고얀 년들이 있나? 올라가라."
무릎 위에 널판이 깔리고 장정 두 사람이 올라갔다.

"스스슥"
사금파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솟구쳤다.

"이래도 말하지 않겠느냐?"
"모르는 일입니다."
"더 올라가라."
널판 위에 두 명이 더 올라갔다.

"으으윽!"
비명 소리가 국청을 메아리쳤다. 중량을 올리며 심문했으나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두 명이 더 올라갔다. 합이 여섯이다.

"우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국청을 울렸다.

"사금파리가 무디어졌다. 새것으로 다시 깔아라."

압슬형이 계속되자 동궁 나인 다섯 명 모두 혼절하고 말았다. 압슬형(壓膝刑)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무서운 형문이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아들이 아버지를 역적이라고 거짓 자복할 수 있는 악랄한 고문이다. 그 폐해를 알고 있는 조정이 폐지를 검토했으나 번번이 무산되었다. 원하는 답을 받아내기에는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불인두 춤을 추어라

남자도 견뎌내기 힘든 압슬형을 가하면 원하는 답을 받아 내리라고 예상한 위관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독한 년들 같으니라고. 이년들에게 물을 끼얹어 정신이 돌아오면 낙형을 가하라."

물을 뒤집어쓰고 형틀에 매달려 있는 나인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머리는 산발한 채 앞으로 꺾였고 으스러진 무릎에서는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실시하라."

물에 젖은 정렬의 저고리가 벗겨졌다. 봉긋한 가슴이 튀어나왔다. 아직 손 타지 않은 처자의 젖무덤이다. 화로를 떠난 불인두가 가슴에서 어른거렸다. 죄인을 겁먹게 하는 인두 춤이지만 압슬형에 만신창이가 된 정렬은 눈꺼풀이 내려와 보지 못했다. 오히려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화기(火氣)가 따스하다.

"독을 누구에게 전했느냐?"
"…"
고개를 앞으로 꺾은 정렬은 무슨 소린가 분명 들렸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답할 기력도 없었다. 오직 불 인두의 온기가 따스할 뿐이었다.

"집행하라."

허공을 맴돌던 불인두가 가슴에 내려앉았다. 연기가 피워 오르고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낙형(烙刑)은 뜨겁게 달군 불 인두로 발바닥을 지지는 형문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며 얼굴과 가슴을 지지는 악행으로 변질되었다.

"으음."
외마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정렬이 앞으로 무너졌다. 정신 줄을 놓은 것이다. 아니, 생명줄을 놓았다. 낙형을 받던 동궁나인 다섯은 모두 죽고 어주나인 셋은 생명을 건졌다.


태그:#압슬, #낙형, #창덕궁, #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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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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