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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지난 10년 최고의 책> 특별기획을 진행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전문가와 시민기자, 누리꾼 패널들이 뽑은 <지난 10년간 최고의 책>을 기본 자료로 삼아, 선정자문위원회의 자문 그리고 누리꾼 투표 등을 거쳐 <지난 10년간 최고의 책> 10권을 선정해 최종 결과를 5월중에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와 더불어 <지난 10년간 최고의 책> 서평 기사를 공모해 좋은 기사로 선정된 경우 소정의 특별원고료(사이버머니)를 지급합니다. <편집자말>
내 것이 낯설어졌다. 나는 무엇으로 나를 증명할 수 있을까. 희미한 기억에 따르면 저기에 있는 저것이 한때 나였던 것 같은데, 저것은 나를 몰라보고, 나 또한 저것이 나였다고 주장할 근거가 빈약해서 당혹스럽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누군가 너 누구냐고 불심검문을 할 때 말더듬이 짓이나 하다가 붙잡혀가곤 한다.

 

정재서는 자신의 노작 <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문학동네 출판 18000원)에서 아마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낯선 자들이 와서 나를 낯설게 만들어 버렸다. 너는 가짜라고, 네 것은 허구라고 하도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바람에 내가 잠깐 혼미 속으로 빠져들었다. 깨어나서 보니 내가 없다. 거울을 보면 내가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하지만 낯설다. 나 자신도 낯선 나를 누구에게 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아, 나는 이렇게 있으면서도 없는 기이한 존재가 되고 말았구나. 누가, 무엇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어 버렸는가.

 

물론 그의 책 어디에도 이런 말이 있지는 않다. 그의 책을 읽는 사람이 행간 어딘가에서 그런 말을 듣고 있을 뿐이다. 저자가 직접 언급하지 않은 말을 저자의 책에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하든 행복이다.

 

독자를 이토록 행복하게 하는 저자의 심사는 당연하게도 비통할 것이다.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아니 참고 있는 그  비통한 심사를 헤아리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 또한 독자의 행복이다.

 

어쨌든 그는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책의 형식으로 그 많은 말을 다 쏟아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궁여지책으로 이 책의 서문 외에 또 하나의 장, 서사(序詞)라는 장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이렇게 말한다.

 

오, 제강이여,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

 

가무(예술)의 신 제강은 얼굴이 없다. 고대의 장님 악사, <서편제>의 눈먼 송화는 아마 이 제강의 후예들이리라. 공자가 일찍이 괴이쩍은 일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힘을 신뢰하는 무리들은 끊임없이 신화와 전설을 유포해왔다. 가령 굴원이 '초사'에서 비분을 토로할 때, 이백이 그의 시편에서 불사에의 염원을 노래할 때, 오승은이 '서유기'에서 환상의 나래를 펼 때 그들은 이미 공자의 당부를 무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신화 그리고 그 이미지는 이후 공자보다 더 험한 상대를 만나야만 했다.

 

근대라는 그 새로운 신화는 즉각 과거의 신화를 폐기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를 제우스로, 서왕모를 헤라로, 제강을 뮤즈로, 신선을 요정으로 대체했다. 동아시아의 사라진 신들, 비록 지금은 기억마저 희미해졌지만 우리 존재의 근원이자 의식의 뿌리인 그들 사라진 신들은 아직도 귀환하지 않고 있다.

 

고 김현 선생의 <산해경> 탐독을 기억한다. 그 책을 읽은 날 밤, 그는 수많은 신들, 괴물들과 동학하는 꿈을 꾸었노라고 고백했다. 나는 이제부터 이미지의 힘을 빌려 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시작하려 한다.

 

오, 제강이여,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

 

새겨볼수록 놀라운 새마을운동의 괴력

 

요즘은 유치원 아이들도 그리스 로마 신화 정도는 뭐랄까, 줄줄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지간히 꿰고 있다. 영어 공부가 보편화되면서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한층 깊어질 것 같은데, 어쨌든 이런 아이들에게 <삼국유사>나 <산해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에이 뭐 그런 게 있어, 엉터리" 뭐 이런 식이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어지러운 근친상간과 질투, 복수와 배반으로 가득 채워진 그리스 로마 신화에 아이들이 익숙해진 것은 반복학습의 영향이기도 하겠지만 가르치는 사람의 확신(?)이 투영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반면에 <삼국유사>나 <산해경>같은 이야기는 아직 들어본 적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삼국유사>와 <산해경>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데 어찌 가르칠 것인가.

 

정재서는 우리의 신들이 사라졌다고 했지만, 엄격하게 말해서 이는 틀린 표현이다. 우리의 신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감금되고 봉인되었다고 해야 옳다.

 

우리에게서 우리의 신들이 제도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감금, 봉인된 시기는 아무래도 새마을운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일제의 문화정치라든가 기독교 같은 종교들의 잡신 배척이 있기는 했었다. 그러나 일제의 문화정치는 중앙정치나 지방 토호세력 같은 이른바 친일파들에게나 조금 먹히다 말았고, 종교의 잡신 배척 또한 그 종교를 믿겠다고 선언한 사람들에게나 가능했을 뿐이었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그토록 단시일 내에 방방곡곡을 틀어잡을 수 있었던 것은 가난 때문이 아니라 빨갱이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가난 플러스 빨갱이였다고 해야 옳은지도 모르겠다. 그 시기에 전통문화는 빨갱이와 거의 동격으로 취급되었다. 그 시기 대통령 박정희의 머릿속에는 아마 이런 생각으로 가득했었을 것이다. 가난뱅이 주제에 춤추고 노래하고 춘향전이니 흥부전 따위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다니. 이 무슨 망할 취미더란 말이냐.

 

독재자는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야기도 싫어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촉발시키는 그 어떤 것도 그는 두려워한다. 국민을 리모컨 하나로 조종할 수만 있다면 그 이상 좋을 것이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게 불가능한 일이고 보매 그는 가장 쉽다고 여겨지는 경제를 들고 나선다. 잘 살아보자.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 잘 살기 위해서는 미신을 버려야 한다. 미신이란 조상 대대로 해온 모든 것들이다, 부모와 조상들에 대한 제사만 남기고 모두 버리자, 이 운동을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자들은 우리가 잘 사는 것을 시기하거나 반대하는 자들이다, 고로 그는 빨갱이다.

 

장삼이사들의 술자리 유언비어가 아니었다. 자식이 면서기만 해도 엄청나게 출세했다고 여기던 시절의 촌부들 앞에 군청의 고위 간부들이 나서고 심지어는 군수까지 찾아와서 '조국 근대화의 일꾼'이 되어줄 것을 당부하며 당신은 새마을 부녀회 간부, 당신은 새마을 지도자, 당신은 새마을 지도자 회의 고문, 등등 감투까지 얹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농촌 사람들은 그야말로 미련없이 사시사철 절기마다 찾아서 해온 온갖 놀이들을 새마을 창고에 처박아 버렸다.

 

그 즈음 시골 마을에 유행한 것이 커피였다. '조국 근대화의 일꾼'들은 한철 농사를 시작할 때 그리고 끝날 때마다 해온 흥타령이나 육자배기 대신 커피에 쏙 빠져 들어갔다. 쓴 것도 같고 단 것도 같은 이것이 대체 무엇이냐. 면소재지마다 다방이 몇 개씩 들어서고, 아이들은 자치기나 땅따먹기 같은 놀이 대신 구슬치기나 칼싸움, 총싸움 같은 쪽으로 방향을 급선회한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도 죽지 않고 살았던 온갖 신령스런 것들과 그들의 이야기는 소수의 무당이나 엉터리 도사들의 전유물이 되어갔다.

 

이러한 문화현상을 크게 걱정하고 나선 사람들이 김지하 황석영 같은 문화운동가들이었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를 관통하는 시기에 거의 모든 대학 그리고 노동현장에 풍물 동아리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얼핏 대단한 것 같지만, 그러나 상아탑은 이미 오이디푸스와 아프로디테 같은 이야기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풍물소리는 시위를 알리는 신호 정도로나 인식되고 있었고, 국문학은 어느새 굶어죽는 학문이 되어 있었으며, 제우스나 포세이돈 같은 신들의 계보를 줄줄이 꿰는 사람들이 메시아의 재림처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후배들의 머릿속을 개조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그리스 로마 신화나 안데르센 동화 같은 책들이 서점에서 날개를 난 듯 팔리고, 학교에서 읽혀지고, 시험문제로 출제되었다. 이제 이 땅의 구전설화와 신들은 완벽하게 감금되었다. 거리의 간판들조차도 제비다방이 비너스 커피숍 정도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이런저런 취직 시험에서는 역사과목 자체가 아예 폐지되었다. 도올 김용옥의 대중강좌를 통해 이러한 문화편중이 다소나마 해소되는가 싶었지만 조족지혈이었다. 김용옥 자신이 이미 비주류였다. 때문에 그의 발언은 약한 자의 항변 이상의 울림을 주지는 못했다.

 

왜 꼭 상대를 죽이고 이겨야만 하는가?

 

책을 생각의 끈이라고 한다면 신화는 그 책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있느냐 없느냐의 논쟁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그 어떤 책도 신화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어떤 신화를 기둥으로 삼느냐에 따라 책의 내용은 달라지고 사상 또한 전혀 다른 옷을 입게 된다. 삶의 방식이 달라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파악한 서양사상의 귀착점은 오늘날에 와서 아주 자명해졌다. 서양 사람들 자신이 먼저 그것을 인정하고 나섰다. 그래서 동양의 지혜를 빌려야 한다고 외치며 여기저기에 연구소를 세우는 등 부산을 피운다.

 

그러나 정작 동양에서는,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아직도 내 것이 낯설기만 하다. 서양의 것을 수입해서 소개하는 일로 명예를 삼았던 주류층에게는 내 것이 아예 남의 것이 되어 있고, 먹고 살기 바쁜 일반 대중들에게는 주류층에서 정하는 것만으로 학습교재를 삼다 보니 내 것을 접할 기회가 봉쇄되어 있었다. 동북공정을 21세기의 기치로 내건 중국이나 독도는 내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 같은 나라의 주류층은 서양의 것을 들여와서 자기화시켰던 반면 대한민국의 주류는 대체로 나를 서양화시키는 데 급급해 왔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는 대목이다.

 

자기를 버리고 남의 것으로 자기를 삼은 우리나라 주류층이 우리 땅에 남겨놓은 것들은 주목할 만하다. 삽질 한 번을 해도 작으면 안 되고 무조건 커야 한다는, 꼴등은커녕 2등 3등도 안 되고 무조건 1등이어야 한다는 기이한 열등감이 온누리를 그야말로 도배해 버렸다. 동양최대, 세계최고, 이런 넋 나간 이데올로기에 감염되어 가장 정신적이고 가장 철학적인 종교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불교마저도 최고, 최대가 아니면 스스로 부끄러워서 말도 잘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동아시아 신화의 특징은 기승전결이 없거나 뚜렷하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애매하고, 이겨도 이긴 것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져도 진 것 같지가 않다. 거의 모든 신화와 전설, 민담 등에 조금씩은 투영된 것으로 여겨지는 도교에 이르면 투쟁이나 정복의 그림자가 아예 없다. 자연이 곧 나이고 내가 곧 자연인데 무엇을 상대로 왜 싸울 것이며 왜 꼭 이겨야만 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의식이 정재서로 하여금 동아시아 신화 입문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책을 쓰게 했을 것이다. 그는 묻는다. "우리의 상상력은 자유로운가?" 그리고 그는 말한다. 인간의 상상력은 그것의 생산과 소비를 지배하는 목전의 제1세계 중심 문화산업의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한쪽만 있는 날개는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크레타 섬의 미노타우로스는 사람의 몸에 소머리를 한 식인 괴물이다. 이것은 인간 중심의 사고가 강한 그리스에서 반인반수 형태를 폄하한 까닭이다. 이와는 달리 중국신화 속의 염제는 미노타우로스와 같은 생김새임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농업과 의약을 가르쳐준 훌륭한 신이다.

 

인어를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자연스레 예쁜 인어 아가씨의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어려서부터 안데르센 동화를 통해 인어는 으레 예쁜 아가씨인 것으로 교육받아온 탓이다. 그러나 중국신화를 보면 인어는 평범한 아저씨의 모습이다.

 

흉물스런 미노타우르스, 예쁜 인어 아가씨를 표준으로 생각했을 때 자비로운 염재와 인어 아저씨는 낯선, 이단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상상력은 이처럼 전도되어 있다. 상상력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평론과 연구 역시 전도 혹은 편향의 위험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저자의 이러한 발언에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날개 한쪽을 잃어버린 새를 연상하게 된다. 들판이나 산골짜기 같은 데서 가끔 발견할 수 있는, 한쪽 날개에 총을 맞았거나 혹은 다른 동물에게 물어 뜯겨서 날지를 못하고 애처롭게 파닥거리는 새 한 마리, 한쪽 날개는 상했을지언정 다른 한쪽 날개는 멀쩡한데 왜 그는 날지를 못하는 것인가.

 

날개란 대체 무엇인가. 왜 두 개가 동시에 작동을 했을 때만 그 몸이 뜨게 되어 있는 것인가.

 

아예 날개 한쪽마저 없다면 그는 날기를 포기하고 두 발로 걷는 연습을 하게 될까. 아마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연습의 기간은 장자가 말하는 혼돈의 시간이 될 것이다. 혼돈은 그 어떤 것도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그야말로 혼돈일 뿐이다. 로또복권 추첨을 할 때 여러 개의 숫자가 상자 안에서 정신없이 돌아가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이 기간은 영원하지 않다. 혼돈은 반드시 새로운 질서를 전제로 한다.

 

그리하여 그는 한 번 더 외친다. 오 제강이여,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 날개 양쪽을 다 가질 수 없다면 한쪽 날개는 쓸모 없으니 꺾어 버리자고.

 

끝으로 이 책은 제1부 동아시아 이미지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제2부 중국문학의 고위금용古爲今用을 위하여, 제3부 상상력의 제국주의를 넘어서, 이렇게 3부로 구성되었고, 저자 정재서는 서울대에서 중문학으로 박사를 한 뒤 하버드-옌칭 연구소와 일본의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에서 연구를 했다. 저서로는 <불사의 신화와 사상> <동양적인 것의 슬픔> <도교와 문학 그리고 상상력> <정재서 교수의 이야기 동양신화> <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 등이 있고 <산해경>을 번역한 바 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0년 내가 읽은 최고의 책>에 응모하는 글입니다.


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 - 동아시아 이미지의 계보학, 정재서의 신화비평

정재서 지음, 문학동네(2007)


태그:#정재서, #동아시아의신화, #산해경, #새마을운동, #전통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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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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