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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는 '대기만성' 형은 아니다. 큰 그릇의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변화를 두려워해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꽁꽁 싸매고 있다가 슬금슬금 막판에 뛰어드는, 뭐든지 늦되게 나설 뿐인 쉰셋의 전업주부다.

 

오마이뉴스의 공모기사 '저, 사고쳤어요'를 보면서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라고 생각해서 아예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인생을 되짚어 보아도 내가 스스로 사고 친 일은 더욱 없고 누군가가 내 인생에 들어와 사고를 친 일도 없어 보였다. 재밌게 각색된 사고든 뭐든 간에 선입견의 '사고'는 그냥 만나고 싶지 않은 '사고'일 뿐이었다. 그냥 그만그만하게 살아온 시간들이었다. 식구들과 얘기 끝에 그런 말을 했더니 남편이 대뜸 "당신 사고 쳤잖아!" 한다. "내가 언제 뭘?" 하니, "당신 나이에 오마이뉴스에 글을 올린 게 사고 친 것"이란다.

 

올 초에 그동안 마음만 먹고 있던 일을 저질렀다. 황당해서 소가 웃을 일이겠지만, 글을 써 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딱히 어떤 형태의 글을 쓰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 배움터는 아줌마들만이 모여 글을 쓰고, 더 나아가 '글쓰기로 돈을 벌자'는 자유기고가 과정이었다. '자유기고가', 다만 '자유'에 꽂혔다. 내 마음대로 글을 쓴다는 것, 어디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끌렸다. 변화가 두려운 나이가 되고 보니 어딘가에 매이기보다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 나이에 글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냥 내 마음의 소리를 글로 잘 정리하고 싶었고, 또 배우는 것이 좋아서 앞 뒤 생각 없이 우선 등록을 하고 열심히 다녔다. 일단 시작하면 중간에 그만 두는 것이 잘 되지 않는 사람이라 내게 맞든 그렇지 않든 끝까지 간다. 사실 자유기고가는 내게 생소한 글쓰기였다.

 

그러나 모든 일에 있어서 완벽한 자유가 어디 있겠는가. 배우는 곳에서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되어 젊은 줌마들의 톡톡 튀는 감성을 쫓아가려니 숨이 턱에 닿았다. 사실 창피한 느낌도 있었다. 그동안 뭐하고 이제야 젊은이들 틈에 끼어 있나 싶은 자괴감도 들었다. 겨우겨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 그동안 자신이 쓴 글들을 모아 자체 제작한 '나를 위한 작은 책'이었다. 여기까지만 하고 끝낼 수도 있게 커리큘럼이 짜여 진 글쓰기 과정이었다. 이제 2단계로 실전이라 할 수 있는 자유기고가 글쓰기 과정이 남았다.

 

조금 갈등은 했다. '자유'가 '방종'이 되지 않게 하려면 '자유기고가'과정까지 마쳐야만 될 일 같았다. 내친 김에 계속하기로 했다. 소심한 성격에 누군가를 인터뷰해서 좋은 글감들을 만들어 내야 하는 일이 걱정이 되긴 했다. 시간은 흘러갔고, 그렇게 해서 다듬어진 글들 중에 하나를 오마이뉴스에 처음으로 기고 하기로 했다.

 

내가 자원교사로 활동을 하고 있는 문해학교인 '마들여성학교'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오마이뉴스에 올려 보겠다고 정보를 취합하는 과정에서 어떤 이십대 청년을 만났다. 교사 한 사람이 "이 학생도 오마이뉴스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그런데 그 학생이 하는 말, "에이 이런 글은 선전용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실리지 않을 걸요" 한다. 다시 그 교사가 "그러지 말고 용기를 줘 용기를" 한다.

 

이런 경우를 봤나, 청년에게 용기를 줘도 시원치 않을 나이에 용기를 받게 생겼다. 뒷덜미 쪽으로 스멀스멀 창피한 생각과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은 열패감이 슬쩍 파고들었다. 아들 같은 사람한테서 용기를 받아야 한다는 상황에 조금은 당황도 되었다. 그러나 일단 나이를 잊기로 했던 시작이었기에 '허허' 웃음으로 민망함을 얼버무려 버렸다. '기고할까 말까' 하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글은 다 써 놓았는데 아까웠다. '에이 모르겠다. 사고치지 뭐' 하고는 오마이뉴스에 기고했다. 바로 그 기사가   '사는 이야기' 왼쪽 화면에 거의 한달 간이나 걸려 있게 되었다. 소위 오름이나 으뜸은 아니었어도 채택이 되어 내게 용기가 된 첫 기사였던 셈이다.

 

중고등학교 때 학교 교지에 한두 번 글이 올라본 이후 이 나이 되도록 어디에도 내 글을 실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남편의 '사고를 친 것'이라는 말은 한편 맞는 말일 수도 있었다. 

아무리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자위하며 외쳐댄다고 해도 날고 기는 똑똑한 젊은이들의 생각을 따라 가기는 쉽지가 않다. 더구나 요즘은 인터넷만 열면 정보가 흘러넘친다. 어른들의 체험에서 우러난 지혜는 잔소리 같은 말이 되어버렸다. 정교하게 다듬어 놓은 정보들을 마음껏 요리할 줄 아는 젊은이들을 어찌 따를 것인가. 그들과 발맞추겠다는 욕심은 없다. 그냥 내 속도대로 움직일 뿐이다.

 

나의 늦깎이로 '사고'친 행각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 이전에도 있었다. 뒤늦게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고서는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취득한 것이 쉰하나가 되던 봄이었다.

 

그 때 내 앞에서 시험을 치르던 남학생은 쉬는 시간만 되면 내 쪽으로 아예 몸을 돌리고서는 '자신이 몇 번 시험을 치러보니 이런 부분들이 집중적으로 출제 되더라. 나중에 공부할 때 잘 살펴보라'고 자기가 보던 문제집으로 내게 알려 주었다. 그 남학생은 한두 번 떨어지는 것은 문제도 아니라고 나를 미리 위로해 줬다. 그러나 나는 비록 턱걸이지만 붙었다. 지금도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그 남학생이 나를 안쓰러워하던 모습이 생각나 웃음이 난다.

워드는 어떤가, 1급 필기는 대부분이 중고등학생 같은 아이들과 함께 보았고, 한 번에 붙었다. 쉰하나의 가을에 돋보기 쓰고 도저히 1급 실기가 자신이 없어 실기는 2급으로 만족했다.

 

내게 있어서 이런 자격증들이 실생활로 연결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대부분 장롱 자격증으로 머무르고 만다. 다만 배우는 재미로 자꾸 도전을 하는 것인데 배우는 것에도 중독증이란 병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오마이뉴스에 처음 글이 올라온 후 주변 반응들이 재미있었다. 큰 딸은 "사서 고생을 한다. 신기하다. 대단하다. 내가 엄마 나이쯤 되었을 때 나는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했다"고 하고 작은 딸은 "그 곳에 글을 올리는 것이 쉬운지 어려운 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지 글이 올랐다는 말에 뭔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고, 조카들은 "우리 이모는 참 이상한 사람이야 그런 것을 왜 할까" 였고, 주변 사람들은 잠깐 생뚱맞아 하다가 "그런 재주가 있었어요?" 했다.

 

남편의 '사고'를 쳤다는 뜻은 다른 데 있었다. 한 번 정도는 기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계속 꾸준히 쓰고 있는 것을 보면서 지독하다는 얘기였다.

 

사람들의 모든 반응들 뒤에는 '내 나이'가 있었다. 지금도 사실 젊은이들 틈에 끼여 뭔가를 쓰겠다고 낑낑대고 있는 자신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또 내 안의 것을 사람들 앞에 고스란히 드러낸 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연극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처럼 나는 바다를 발견했고, 이 후에도 여전히 깜찍한 사고를 칠 항해는 거두지 않을 생각이다.

그 항해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저, 사고쳤어요> 응모글입니다.


태그:#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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