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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난 배비장 명품녀와 놀아나다
 바람난 배비장 명품녀와 놀아나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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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연극을 한다고? 그럼 연극배우가 됐다는 말인데, 설마 농담이겠지."

12월 1일 아침 식탁에서 아내와 딸아이에게 내일(12월 2일) 내가 하는 연극을 보러 오라고 초청하자 아내가 깜짝 놀라 하는 말입니다. 웬 뚱딴지같은 말이냐는 듯 전혀 믿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아내뿐만 아니라 딸아이도 마찬가집니다.

"아빠! 연극 아무나 하는 거 아니잖아요? 더구나 연극을 하려면 어느 날 갑자기 무대에 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언제부터 연습을 하셨어요?"

내가 "진짜"라고 말하자 딸아이가 그때서야 사실 확인을 합니다. 아내나 딸이 믿지 않고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연습을 하러 다녔지만 연극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꼭 가족들을 놀래주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무대에 서는 것이 자신이 없어 말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늘그막에 연극을 한다고 사고쳤다는 아내와 딸

"어! 당신 사고쳤네, 연극이라니? 언제 연기를 해봤다고 연극이야, 연극이 호호호호. 당신이 배우가 되다니, 연기가 되긴 됩디까? 호호호호"

아내는 우선 웃음보부터 터뜨립니다. 내가 무대 위에 올라 연기를 한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고 그냥 웃긴다는 표정입니다. 무리도 아닙니다. 연극이나 영화배우는 모름지기 조금은 능청스러운 맛이 있어야 연기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아내인데 내 평소의 삶에서 그런 모습을 전혀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내가 연기를 전혀 못할 것 같아? 이래봬도 내가 회사 다닐 때 직원들 교육용 영화를 두 편이나 만든 경험이 있다는 거 당신도 알잖아?"
"그건 당신이 시나리오 쓰고 연출해서 만든 거지, 연기를 한 건 아니잖아?"

아내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40년 가까이 함께 살아오면서 연극이나 영화를 좋아하여 가끔 함께 다니며 구경하긴 했지만 연기에 직접 관심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수군거리는 동네 아낙들
 수군거리는 동네 아낙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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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이혼당할 위기에 몰린 배비장
 아내에게 이혼당할 위기에 몰린 배비장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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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연극배우가 되어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은 정말 예상치 못했던 우연이었습니다. 지난여름 일입니다. 어느 날 함께 지방 산행을 한 친구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함께 연극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습니다. 처음엔 당연히 웃어버리고 말았지요. 너무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세한 얘기를 듣고 보니 한 번 해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청량리에 있는 노인종합복지관에서 노인들로 구성된 연극반을 만들어 무대에 올리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노인들의 연극반 구성원들이 거의 대부분 할머니들이어서 남자가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습시간 3개월, 대사 외기도 벅찬 시간

사또를 찾아가 하소연하는 배비장 처
 사또를 찾아가 하소연하는 배비장 처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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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단 한 번 참여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사는 지역도 다르고 뒤늦게 참여한 나는 처음엔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다른 노인들이 스스럼없이 받아주어 쉽게 적응할 수 있었지요.

이렇게 시작한 연극반은 무대에 올릴 작품이 선정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지도강사는 전문 연극배우인 박수민(여)씨였는데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연극을 만들어갔지요. 매주 수요일 오후 1~2시간동안 토론과 짧은 즉석 단막극을 만들어 실연하면서 작품 구상을 했습니다.

참으로 어설픈 작업이었지요, 반원들 중에 연극에 경험 있는 사람은 대학시절 동아리 활동을 했다는 딱 한사람뿐이었습니다. 모두들 난생 처음 시도하는 연극배우수업이 너무 어렵기만 했었으니까요, 그래도 모두들 열심히 참여했지만 과연 연극을 무대에 올릴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기도 했지요.

연극의 주제는 요즘 노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인 자녀문제와 재혼문제, 그리고 노인들의 성에 대한 문제를 짚어보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결국 고전 '배비장전'에 현대적 감각을 도입한 퓨전 배비장전인 '걸덕쇠 배비장전'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각본과 각색, 연출은 지도강사 박수민씨가 맡아 진행했습니다.

배비장 골려줄 모의를 하는 이방과 애랑, 그리고 사또
 배비장 골려줄 모의를 하는 이방과 애랑, 그리고 사또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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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각본이 나오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정작 아마추어 노인배우들이 배역을 맡아 대본을 받아 들고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겨우 3개월이었으니까요. 그것도 일주일에 한번, 한두 시간씩 연습하는 것이어서 도무지 진척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선 대본을 외우는 일이 문제였습니다. 기억력이 떨어진 나이든 사람들이어서 자신이 맡은 배역의 대사를 외워 기억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늦게 시작한 연습은 어렵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나마 중간 중간에 대본은 물론 움직이는 동선과 동작, 발성과 표정 몸짓까지 수정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 노인들을 지치게 했지요, 더구나 연극연습에 필요한 도구들도 갖춰지지 않아 연습효과를 반감시켰습니다.

위태위태 불안불안한 연습, 공연 전 리허설에서는

방자역을 맡은 제 모습입니다
 방자역을 맡은 제 모습입니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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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은 나름 열심히 연습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역할에 대한 책임의식이 약한 사람들과 서로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여 다툼이 자주 발생함으로 분위기를 흐리게 하기도 했습니다. 희곡 각색에서부터 지도방법 그리고 환경과 준비 부족에 배우들의 자질까지 떨어졌으니 연극이 완성되어 무대에 올려진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과정이었습니다.

몇 번인가 고비를 넘기면서 그래도 연극연습은 계속되었습니다. 드디어 얼마 전에 공연일자가 12월 2일로 잡히고 공연장소로 대학로 극장 이야기가 나오다가 여의치 않아 인근 건물인 청소년 수련관 대극장으로 정해지자 조금 실망하는 노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인들을 화나게 한 것은 11월 30일 총연습 때였습니다.

리허설은 모든 것이 갖춰진 상태에서 치러져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소품들도 일부 부족한 데다 가장 중요한 공연의상들이 준비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어정쩡한 리허설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배비장역 서진석(64) 사또역 지용조(63) 이방역 박수재(69)
 배비장역 서진석(64) 사또역 지용조(63) 이방역 박수재(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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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공연 전날인 12월 1일 저녁 공연할 극장이 아닌 복지관연습장에서 2차 리허설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무대가 비좁고 분장도 하지 않은 채 하는 리허설이 어설펐지만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멋진 공연을 했습니다. 내일 12월 2일 본 공연에 대한 불안감을 말끔히 씻어낸 총연습이었습니다.

베비장 방자 구경하러 오세요, 무료입니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시립동대문노인종합복지관이 주관하는 이번 연극공연은, 노인들의 문화 복지지원 차원에서 시행되는 사업이어서 배우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은 없었습니다.

'걸덕쇠 배비장전'의 줄거리는 시종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입니다. 때는 조선시절, 바람둥이 아전신분인 예방 배비장은 명품녀와 데이트를 즐기며 재산을 탕진합니다. 결국 아내에게 들켜 이혼 위기에 몰린 배비장은 바람기를 고쳐보겠다는 아내의 요구로 제주목사로 부임하는 사또를 따라 제주도에 갑니다.

여성출연자들 왼쪽부터 서산댁 황보임영(78) 사회자 안국순(64) 전라댁 최금자(71) 애랑역 이명옥(67) 배비장처 김영희(73) 명품녀 박만엽(68) 부산댁 윤위술(74) 파주댁 최철순(70)
 여성출연자들 왼쪽부터 서산댁 황보임영(78) 사회자 안국순(64) 전라댁 최금자(71) 애랑역 이명옥(67) 배비장처 김영희(73) 명품녀 박만엽(68) 부산댁 윤위술(74) 파주댁 최철순(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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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비장은 아내와의 굳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떤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고 멀리합니다. 그러나 그의 버릇을 고치려고 계략을 꾸민 사또와 이방 그리고 제주의 일등명기 애랑의 미색에 빠져 결국 이성을 잃고 애랑의 집을 찾아갑니다. 배비장은 애랑의 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갖가지 수모를 당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개과천선하는 내용이 해학적으로 가득 담겨 있습니다.

이번 연극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극본과 각색, 연출을 맡은 박수민(45), 주연인 배비장역에 서진석(64), 배비장 처 김영희(73,) 이방역엔 박수재(69), 애랑역엔 이명옥(67), 사또역엔 지용조(63), 명품녀 박만엽(68,) 부산댁 윤위술(74,) 서산댁 황보임영(78,) 전라댁 최금자(71,) 파주댁 최철순(70), 해설자 안국순(64), 그럼 저는 무슨 역을 맡았느냐고요?

저는 배비장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충복 방자역을 맡았지요. 그러나 허랑방탕하고 바람난 배비장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해 제주기생 애랑이의 가짜 남편 역까지 하는 1인 2역을 맡았답니다. 배비장의 종 신분인 방자는 가볍게 촐싹거리는 역이지만 배비장을 애랑의 집에 들여보낸 후엔, 자루 속에 들어가고, 궤짝 속에 갇힌 배비장을 혼내주는 애랑의 가짜 남편으로 위엄을 갖추고 호통을 치는 역할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제 아내가 늘그막에 사고 쳤다고 놀랄 만하지 않습니까? 어디 저뿐이겠습니까? 이번 연극에 배우로 참여한 대부분의 노인들도 마찬가지지요. 수많은 갈등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어설픈 연극이지만 무대에 올린 우리 연극반 노인들에게 박수 보내주시지 않으시렵니까? 시간 되시는 분들 구경 오세요. 배비장의 종 방자가 초대합니다. 12월 2일 수요일 오후 2시, 서울 청량리에 있는 청소년수련관 5층 대극장입니다. 관람료가 얼마냐고요? 무료입니다.

덧붙이는 글 | '저 사고쳤어요' 응모글



태그:#걸덕쇠 배비장전, #연극배우, #이승철, #늘그막, #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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