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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리, 여주의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마을이다. 여주군 북내면 서원2리 서화마을. 고개 하나를 넘으면 양평군 양동면과 경계를 한다. 이 마을은 현재 '정보화마을'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런데 이 마을 주민들이 일을 낼 생각을 한다. 무슨 사고라도 치자는 것이 아니다. 이 마을은 노산군으로 격하된 단종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지나간 곳이다. 그 길을 찾아 <단종의 역사길>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 작업은 인근에 있는 서원1리와 상교리의 주민들도 함께 동참을 하고 있다.

한양을 떠난 단종임금은 강릉으로 가는 유배 길에 이 마을을 지나게 된다. 한양에서 여주 이포에 도착한 단종은 파사산성을 지나, 여주군 대신면의 블루헤런 골프장 안에 있는 어수정에서 목을 축인다. 다시 길을 접어든 단종 일행은 고달사지를 거쳐,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점골을 지난다. 이 고달사지에서 출발해 서원리까지 단종임금이 지났던 길을 찾아, 사람들과 함께 <단종의 역사길>을 걷는다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생각이다. 서화정보화마을 서진택 위원장과 함께 그 길을 미리 걸어보았다.

신털이봉 앞을 지난 단종

고달사지 입구에는 논두렁 옆에 작은 동산 같은 조그마한 흙무더기가 있다. 이곳이 <신털이봉>이다. 상교리로 들어가는 길에서 만난 한 어르신은 다리가 불편하시다고 차를 좀 태워달라신다. 차를 타고 가면서 어르신께 이야기를 듣는다.

"어르신 고달사지에는 앞에 작은 봉우리 같은 것이 무엇인가요?"
"그거 신털이봉이라고. 예전에 고달사에 스님이 300명이나 되었데. 고달사를 들어가려면 거기서 신을 털었는데, 그 흙이 저만큼 쌓인 거여."

고달사를 들어가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신을 털어 작은 동산이 생겼단다. 신을 털었다고 하여 <신털이봉>이라고 한다.
▲ 신털이봉 고달사를 들어가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신을 털어 작은 동산이 생겼단다. 신을 털었다고 하여 <신털이봉>이라고 한다.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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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털이봉을 지나면 상교리 증골로 들어서면서 우측에 북바위가 있고, 조금만 지나면 좌측 낮은 산마루에 여기저기 길게 바위가 꼬리를 물고 있다. 이 바위들을 징바위, 또는 기차바위라고 부른다. 이 바위에서 산 쪽으로 더 들어가면 수리바위가 있다. 수리바위는 철이 난다고 하여 어느 제련소에선가 바위를 떠갔다고 한다. 현재 이 바위는 한 면이 쪼개진 채로 있다. 이 바위들은 모두 전설이 있다. 북바위와 징바위, 수리바위는 고달사와 연관이 있는 전설이 전한다. 

고달사 입구에서 상교리로 들어가다가 보면 낮은 산 정상에 큰 바위들이 줄을 지어있다. 징바위 또는 기차바위라고 부른다.
▲ 기차바위 고달사 입구에서 상교리로 들어가다가 보면 낮은 산 정상에 큰 바위들이 줄을 지어있다. 징바위 또는 기차바위라고 부른다.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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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사지 입구쪽에서 상교리로 들어가면 우측에 바위가 있다. 이곳에서 장사가 죽었을 때 북을 쳤다고 한다.
▲ 북바위 고달사지 입구쪽에서 상교리로 들어가면 우측에 바위가 있다. 이곳에서 장사가 죽었을 때 북을 쳤다고 한다.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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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빚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술바위'로 보아야 할 듯하다. 앞쪽을 다 더 갔다고 한다.
▲ 수리바위 술을 빚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술바위'로 보아야 할 듯하다. 앞쪽을 다 더 갔다고 한다.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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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바위 밑에는 산신당이 있었다. 고려 제4대 광종 때 원종대사가 고달사에서 불법을 펴고 있었다. 이 때 전국의 승려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는데, 그 중 한사람이 여주목사에게 '고달사의 여자신도 하나가 세 정승을 낳을 상인데, 그 배필이 이미 정해져 있더라'고 말했단다. 목사는 그 말을 듣고 그 여자를 며느리로 삼을 욕심이 생겨서 그 방책을 강구한 끝에, 중의 말을 듣고 징바위에서 난 장사 아이를 죽였더니, 그 여자 신도가 달려가 장사의 시체를 안고 함께 죽었다. 원종대사가 이 광경을 보고 한탄하기를 '이 장사아이를 잘 길러서 나라를 위하여 크게 쓰려고 하였더니 이제 허사로다' 하고 수리바위에서 술을 빚고, 징바위에서 징을 울리고, 북바위에서 북을 쳐 장사아이의 명복을 빌고 난 뒤 고달사를 떠났다.(여주군 북내면 홈페이지 참조)

서낭당 고개를 넘은 단종

수리바위는 아마도 '술바위' 일 것으로 보인다. 서낭당은 길을 가다가 보며 쉽게 만날 수가 있다. 오래 묵은 고목이나 장승 등을 세우는데, 이곳에 빌고 길을 가면 여정이 편안하다고 믿는 습속 때문이다. 고달사지 앞을 지난 단종은 신털이봉 곁을 지나, 이 서낭당 앞으로 지나갔다. 아마 이곳에서 하루 빨리 한양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원했는지도 모른다. 상교리 서낭나무는 속이 비어있다. 나무도 한 옆으로만 살아남았다. 끈질긴 생명력을 보인다.

예전 마을에서 섬기던 서낭나무. 6,25 때 포탄을 맞았다고 한다. 나무가 한편으로 쓰러져 자라고 있다,
▲ 서낭나무 예전 마을에서 섬기던 서낭나무. 6,25 때 포탄을 맞았다고 한다. 나무가 한편으로 쓰러져 자라고 있다,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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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 250년 정도로 추정하는 이 서낭나무는 속이 비어있다.
▲ 속이 빈 서낭목 수령 250년 정도로 추정하는 이 서낭나무는 속이 비어있다.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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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집이 바로 서낭집입니다. 예전에 이곳에 할머니 한 분이 사셨는데, 그 분을 서낭할머니라고 불렀죠. 저 서낭나무는 6,25 때 포탄을 맞았다고 하는데도 저렇게 살아남았습니다. 수령이 꽤나 오래된 것을 마을에서 위하던 나무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중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이 예전에 주막거리라고 불렀습니다. 이 근처를 보면 집터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상교리에서 도자기와 그림을 그리는 김원주(남, 49세)의 증언이다. 서낭나무 옆에서 기거를 하고 있어, 누구보다도 이 서낭나무를 다시 살리고 싶어 한다. 

죽바위를 지나 금당천을 건너다

주암리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5일장이 서던 곳이다. 이곳은 사거리로 여주 북내와 양평군 지제를 연결하고, 여주 대신과 양평 양동을 연결한다. 그 주암리 사거리 쪽에 현재 북내초등학교 주암분교가 있다. 주암분교 입구에는 '죽바위'가 있다. 이 죽바위 때문에 마을사람들이 죽만 먹고 살았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그것은 전설이라도 맞지 않는 것 같다. 이 주암리는 당시 상권이 형성될 만큼 번화하던 곳이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죽만 먹고 살았다는 이야기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서낭을 지난 단종은 이 죽바위 앞을 지나 금당천을 건넌다. 20여년 전만 해도 이 금당천에는 징검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저 어릴 적에도 이 금당천에 징검다리가 있어서, 학교에서 바로 징검다리를 건너 원골을 지나 집으로 가고는 했어요. 지금처럼 다리로 돌아가지를 않고요"

주암분교 입구에 있다. 이곳은 1970년대 까지도 5일장이 섰던 마을이다.
▲ 죽바위 주암분교 입구에 있다. 이곳은 1970년대 까지도 5일장이 섰던 마을이다.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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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단종임금이 걸어간 길을 걸으면서 서진택 위원장이 이야기를 한다. 이 금당천을 지나면 까치바위 앞을 지나 원터로 들어간다. 원터, 원(院)이 있던 곳이라는 이야기다.

단종이 묵었던 원, 집채만 한 바위 주추가 있었다.

서원2리 마을회관 앞으로 가니 마을 주민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원터에 대해 물으니 자세히 설명을 한다.         

"저기 까치바위 밑으로 길이 있어서 원터로 들어가요. 원터가 지금은 없어졌지만, 얼마 전 까지도 지프차만한 돌들이 죽 늘어서 있었어요. 거기를 포클레인으로 밀어서 하천 밑에다가 파묻고, 그곳을 밭으로 만든 거예요. 그리고 그 원터에서 옛날에 어느 임금님이 묵었대요. 원터를 지나 나무를 하러다니던 삐뚤 길을 넘으면 서원2리 당골로 들어가요"

원터 마을주민 곽운필(남 65세)의 말이다. 마을에서 하는 이야기지만 논리적이란 생각이다. 이포애 내린 단종임금이 파사산성을 지나 이곳까지 오면 해가 질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원주까지가 또 하릇길이라고 한다. 결국 이 곳을 지나 현재 양평군 양동 쪽으로 지나갔다는 이야기다.

이곳에 원이 있었다. 지프차만 한 바위들이 줄으지어 있었다고 한다.
▲ 원터 이곳에 원이 있었다. 지프차만 한 바위들이 줄으지어 있었다고 한다.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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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김에 원터를 돌아보리라 마음을 먹는다. 원터를 밀고 밭을 만들었다는 곳을 가니, 아직도 곳곳에 흔적이 남아있다. 구들이며 축대를 쌓았던 돌들. 그리고 네모 난 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집채만 한 돌은 발견을 할 수가 없다. 말 그대로 모두 굴려서 하천 쪽으로 파묻었다는 것이다. 마침 밭을 만들었다는 곽경신(남, 73세)옹을 길에서 만났다.

"한 10여 m 정도 돌이 쌓여있었는데 모두 밭을 만드느라고 하천으로 굴려 파묻고, 우리 집을 지을 때도 기와조각이 많이 나왔지. 다 파묻었어."
           
구들을 놓았던 돌. 근처에는 원터에서 나온 돌들이 굴러다닌다.
▲ 구들 구들을 놓았던 돌. 근처에는 원터에서 나온 돌들이 굴러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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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생김새로 보아 일반돌은 아니다. 원터에서 나온 돌을 이용한 하천의 둑
▲ 돌 돌의 생김새로 보아 일반돌은 아니다. 원터에서 나온 돌을 이용한 하천의 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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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을 복원할 수만 있다면, 역사 길의 의미가 배가할 것 

슬픈 역사의 현장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2시간 정도를 걸어서 도착하는 서화마을. 마을에서는 이 길을 <단종의 역사길>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슬픔을 안고 있는 길이지만, 새롭게 조명을 하겠단다. 서화마을은 정보화마을이라 마을 안에 취사장 등이 있어서, 길을 걷고 난 후에는 느낀 소감을 이야기하면서 음식을 나눌 수도 있어 좋을 것이란 생각이다.

"우리 아이들과 먼저 그 길을 함께 걸으면서 우리 마을이 어떤 마을인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소중한 마을인가를 먼저 알려주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먼저 교육이 되지 않으면, 타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와도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다 함께 단종임금께서 걸어간 길을 걸어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을 복원할 수 있으면 그곳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역사의 소중함을 함께 느껴보자는 것이죠."

서종훈(남 49세)의 말이다. 역사를 잊지 않고, 그 길을 걸으면서 역사를 기억하겠다는 사람들. 서원리 사람들이 일을 낼 것만 같다. 내년 따듯한 봄이 되면 길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단종의 역사길 걷기를 시작하겠다는 사람들. 그 준비를 서두르겠다는 마음이 고맙다.


태그:#단종, #역사길, #서화마을, #걷기, #정보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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