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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나를 그린 그림입니다.
▲ 할머니와 나 할머니와 나를 그린 그림입니다.
ⓒ 이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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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못 가게 된 것이 너무 분했던 그때

중학교 2학년 때, 내게는 놀랄 만큼 철이 없던 순간이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저녁, 부음을 듣고도 동생과 함께 피시방과 오락실을 돌아다니다가 큰고모에게 붙잡혀 아버지 어머니에게로 가서 엄청 혼났다.

어떻게 혼내셨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그랬던 것 같다. 하필이면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이 학교에서 소풍가기 전날이었고 친구가 별로 없던 내게 처음으로 함께 노는 그룹이 생겨 대여섯 명 어울려 도시락 먹을 수 있었던 기회는 그렇게 날아갔다.

할머니의 죽음보다 소풍 못 간다는 사실이 분해 오락실을 전전한 것이 뒤늦게 미안해진 것은 장례식장에서였다. 이십 년 가까이 중풍과 당뇨, 나중에는 치매 증세까지 겪으면서 우리 집 안방에 누워 있던 할머니.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렇게 사셨고 언제까지나 그렇게 계실 줄 알았던지, 나는 아마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던 듯 하다.

"에이씨, 할머니는 왜 하필 이런 때 돌아가신 거야? 이야기 같은 거 제대로 해준 적도 없고 만날 누워 있기만 했으면서."

마치 살아계신 할머니에게 투정을 부리듯, 어른들에게 사실을 전해 들었음에도 돌아가셨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딘가에 계속 누워 계실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지하고 이기적이었던 중 2의 나는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 하나를 했다. 어려서 그랬다는 핑계를 대기에는 크게 도리에 어긋난 행동이었다. 하지만 죄송하다고 말씀드릴 분은 이미 돌아가셨고, 그 때의 잘못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는 잘못을 저지름과 동시에 날아갔다.

내게는 말 그대로 '방 속의 존재'였던 할머니

당시로서는 서른이라는 늦은 나이에 시집을 간 우리 엄마가 아버지 집에서 만난 현실이란 증조 할머니와 할머니가 병들어 마치 종합병원 한 병실을 연상케 하는 상황이었다. 다리가 조금 불편한 아버지와의 결혼을 반대하던 외할머니가(울 엄니는 무슨 '깡'이셨던 건지) 보셨으면 마음 아파 하셨을 거다.

게다가 내가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할아버지까지 암으로 병을 얻어 우리 집에 있던 중환자는 총 3명. 엄마의 신혼을 '죽음'이 짓누르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어렴풋이 생각나는데, 내가 지금 쓰는 방이 예전에는 하얀 머리의 증조할머니가 누워 계신 곳이었고 지금 안방으로 쓰는 제일 큰 방이 할머니가 쓰던 곳이었다. 섭섭하게도 첫 손주라고 나를 참 예뻐하셨다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어머니 말로는 2살 터울의 내 동생이 태어난 지 100일 지나고 돌아가셨다 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만은 계속 아슬아슬한 몸 상태를 유지하며 삶을 이어가셨다. 중 2때까지의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거실에 놓은 침대 난간을 잡고 몇 바퀴씩 도면서 운동하시던 모습, 간식 때문에 엄마와 말다툼 하시던 모습 등이 기억난다.

대부분 병간호는 간병인을 부르지 않았으므로 모두 엄마의 몫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됐을 때 바깥일을 시작하기까지, 엄마는 자신만의 삶을 단 한순간도 살아보지 못하셨다. 내가 도와드린 거라고는 가끔 엄마가 집을 비울 때 할머니 간식 챙겨드리기(계란빵과 우유 한 컵), 좀 커서는 남동생과 같이 할머니 기저귀 딱 한 번 갈아드린 것. 기억나는 것은 이것뿐이다. 아마 실제로도 별로 도와드린 건 없을 것이다.

'티비유치원 하나둘셋' 보겠다는 어린 손녀와 TV 채널 쟁탈전을 벌이셨다는 우리 할머니. 매일 매일 방에 누워 있으면서 서운한 게 생길 때마다 넋두리로 아버지, 어머니의 속을 무던히 썩이셨던 우리 할머니. 그분은 손녀인 내게는 말 그대로 '방 속의 존재'였다. 할머니는 방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저 밥 먹을 때나 잠깐 문 밖으로 나올 뿐, 잠을 자고 간식을 먹는 그 방 안에서만 할머니는 머물렀다.

그 방 바깥으로 나와 어딘가를 함께 놀러간다던가, 즐거운 이야기를 나눈다던가 하는 추억은 없다(혹여 내가 너무 할머니를 안 좋게 생각한 나머지 기억이 안 나는 것일 수도 있다). 할머니는 그저 방에 있었다. 그런 할머니가 방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은 병세가 악화되어 그분의 마지막 시간이 가까워 오던 무렵. 나는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도무지 혼자 노는 거 말고는 재주가 없는 것 같아 겉돌기만 하던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할머니가 내게 남겨준 숙제

당시 이기적이고 한심한 나의 내면을 돌아보는 게 참으로 부끄럽지만, 나는 소풍 못 가는 것이 그토록 서러울 수 없었다. 할머니한테 뭐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만날 소풍갈 때 짝이 없어 혼자 다니는 게 그렇게 싫었는데, 처음으로 운 좋게 친해진 애들이 생겨 함께 놀 수 있는 기회를 뺏어가 버렸다는 게 그렇게 서운했다.

피시방에 가서 당시 매우 좋아하던 담임 선생님한테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소풍에 못 가게 됐다. 할머니가 너무 밉다", 이런 식으로 편지를 보내기까지 했다. 피시방 아래층에 있는 오락실에까지 동생을 데리고 갔던 나는 큰고모부에게 잡혀서는 할머니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장례식장은 사람들로 분주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니 검은 줄에 둘러싸인 할머니 영정 사진이 있었다. 할머니 얼굴을 본 후에야 죽음을 실감하게 된 나는 그 자리에서 울기 시작했다. 할머니에게 미안해서, 엄마에게 미안해서 계속 울었다. 장례식장에 온 외할머니는 내가 할머니의 죽음 자체가 너무 슬퍼서 운 것으로 아셨는지 계속 눈물을 닦아주셨다. 아부지에게 엄청나게 혼난 다음부터 나는 죄인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할머니에 대한 무례가 너무 부끄러워 잊히지 않았고,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는 그땐 어려서 어쩔 수 없었다며 자기 합리화를 했다. 커서는 뭐. 거의 생각 안 하고 살았다. 하지만 나랑 친하게 지내는 지인과 가족 이야기를 하게 될 때가 있으면 아주 가끔 그때의 일을 이야기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우리 집 분위기는 조금씩 밝아졌다. 아무도 아픈 사람이 없으니 웃는 사람도 많아지고 여유도 생겼다. 아부지와 엄마는 사이도 좋아졌고 우리 집 통장 잔고도 늘어났다. 나는 어느 순간 할머니가 돌아가신 게 우리 식구들의 자유를 위해서는 더 좋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오래 사셨으면 좋았을 거라고 말하는, 7년 동안 아버지 병간호한 남자친구 얘기를 들으면 내 자신이 정말 나쁜 사람 같다. 하지만 현실이 그런 걸, 일부러 위선 떨면서 착한 척은 못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완전히 나쁜 사람이 되어 할머니에 관해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생각만 나면 지인에게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는 나는 뭘까. 때가 되면 어정쩡하게 생각나는 부채의식을 짊어지고 사는 모습이란 이런 것일 게다.

어린 시절보다는 조금 더 성격이 나아졌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도 더디지만 조금씩 터득해가며 삶을 꾸려나간다. 종종 울상을 지을 때도 있지만 소중한 사람들과 온정을 나누는 방법도 알아가면서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을 착실하게 쌓아간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할머니의 죽음과 같은, 내 슬픔만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 예의를 지키지 못한 옹졸함과 부끄러움은 아주 가끔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예전에 어떤 가수가 타인의 죽음으로 자신의 삶이 이어지는 것 같아 괴롭다고 말한 걸 들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할머니의 죽음에 빚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남 보기에 그리 드라마틱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무심코 기억날 때마다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기억이다. 할머니와의 기억 때문에 죽음이 가까이 오는 육신이 얼마나 초라해지는지 조금은 안다. 언젠가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런 초라함에 힘겨워할지 모른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나보다 그 사람들을 아껴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할머니가 내게 남겨준 숙제다.


태그:#할머니,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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