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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순전히 데미안 라이스(Damien Rice)의 노래 '엘리펀트(Elephant)' 때문이다. 이제 사라져야 한다고(This  has got to die), 이제 그만 하고 싶다는(This has got to stop) 이 아일랜드 음악인의 절절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탓이다. 반쯤은 포기한 듯, 반쯤은 애원하듯이 한 마디 한 마디를 뱉어내고 있었다.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았다. 불을 안고 물에 뛰어든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노을이 지는 저녁 무렵이었다. 그는 아마도 밤하늘을 보고 있었을 게다. 바깥에서,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무언가가 안에서 스멀스멀 그라는 존재를 잡아먹고 있었겠지. 몸 구석구석에서 일렁이는 불은 점점 번져가고, 살과 뼈는 치직거리며 타들어갔을 테고. 회색빛 재는 하늘에서 나리는 눈처럼 사뿐사뿐 떨어지고 있었을까. 

 

김연수 작가의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속 인물들은 모두 불에 휩싸여있다. 연인의 조국을 찾아온 어느 작가와 아이를 유산한 통역사(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지독한 성장통을 앓고 있는 소녀(기억할 만한 지나침), 어느 피아노 조율사를 통해 아내의 진심을 듣게 된 남편(모두에게 복된 새해), 엄마가 죽던 날 노을을 본 여인(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역시 그러했다.

 

일렁이는 불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를 알고 있다. 인기 모델이었던 그녀는 한 때 상당한 인기를 구가했다. 부족한 게 없어 보였지만 아마도 공허한 삶과 고독, 알 수 없는 절망은 매번 그녀를 구석으로, 혹은 밖으로 몰아냈을 것이다. 치고 올라오는 젊은 모델과 성공적인 삶에 안착한 동료를 통해서 본 것은 어쩌면 불이었을 게다. 그녀가 보고 싶어 한 것은 깊은 물속이었을까, 아니면 밤하늘이었을까. 잠시 쉬고 싶었는지 모른다. 자신의 육체를 탐닉하면서도 단 한 번도 진심은 알려고 하지 않는 이들에게서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소설 속에 나오는 글처럼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앞에 놓인 시꺼먼 고통을 피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좁은 사각형에 갇힌 자들을 알고 있다. 그들의 눈은 깊고 슬프다. 날카로운 모서리에도 살갗이 베인다. 가시를 품은 채로 누군가 먼저 손 뻗어주길 바란다면 이 책 속 인물들의 이야기에 조근조근 귀 기울여보자.

 

 우리의 첫 문장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

 

소설 속 인물들 사이는 결코 가깝지 않다. 그들은 쉽게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서로 쓰는 언어가 달라 계속 불협화음에 시달리기도 하고(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오래된 외로움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상대방의 진심을 듣지 못한다(모두에게 복된 새해). 사람들은 아픈 기억을 잊으려고 하지만 그마저도 쉽게 되지 않는다. 끝도 없는 서로의 어둠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이야기다. 이 우주의 90퍼센트가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것들로 이뤄져 있다면, 결국 케이케이의 어린 몸도, 그 몸을 사랑했던 내 세포들도 달리 갈 곳은 없을 것이다. 나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그걸 보지 못할 뿐이다.(본문 11쪽)

 

작가는 결국 절망에 빠뜨리는 뜨거운 불길이 여전히 우리 안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중요한 것은 나와 너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실은 그렇다는 것. 소설은 엇비슷한 주제와 이야기를 변주하며 하나의 거대한 벽화를 만들어낸다. 그 거대한 그림에는 투박하지만 진실한 우리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계속 고쳐질 수밖에 없는 현재진행형의 삶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 그림을 덧칠하고 수정하는 것은 결국 너와 나의 몫이고, 또한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에서 리 선생은 우리 인생의 첫 문장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아직 완전한 어둠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기회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날카로운 모서리가 둘러싼 좁은 사각형에서 몸을 일으켜 손만 뻗으면 나와 엇비슷한 누군가 역시 그렇게 손을 내밀고 있다. 책은 시종일관 살갗으로 느껴지는 공감을 은은하게 퍼뜨리며 우리의 기억은, 삶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된다고 말한다.

 

소설 속 인물들이, 그리고 데미안 라이스가 말하듯이. 이제 책을 덮고 나면 우리 각자의 이야기를 해야 할 때다. 누군가에게 나의 절망을 이야기하고, 또 다른 누군가의 절망에 귀 기울여주는 것. 뚜렷한 해결책이 없다 하더라도 서로를 이해하려는 그 노력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하늘에서 연결되기 기다리는 별들과 같다. 어쩌면 우리는 실제로 빛나는 하나의 거대한 별이었는지도 모른다. 잘게 조각이 나 서로를 잊고서 이렇게까지 멀리 걸어왔지만.

 

당신과 내가 손을 맞잡을 수 있다고 느낀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책의 이야기는 책을 덮는 그 순간부터가 진짜다. 그것들은 세상 곳곳에서 영혼의 반쪽을 찾아 속삭이고 있을 테다. 평생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보듬고 사랑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값어치가 있다. 우리의 삶이 역시 그러하듯. 그러니 이 책은 매혹적인 마법을 지닌 책인 셈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덧붙이는 글 | 제목은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 나온 메리 올리버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문학동네(2009)


태그:#세계의끝여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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