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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에게 이육사의 시 <절정>을 강의할 때의 일이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저 자꾸 읽는 것이 제일 좋다는 평소의 생각대로 학생들로 하여금 함께 시를 읽도록 하였다. 운문으로 되어 있으니 시낭송이란 것은 따로 연습을 하지 않아도 합창이 된다. 잘 읽어내려 가던 학생들의 낭송이 그만 3연에 가서 내 귀에 거슬렸다.

"어데다 무르블 꾸러야 하나."
"뭐, 무르블 꿇어? 무릅이 뭔데?"

알고 있겠지만, 시 원문은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이다. 그러니 소리나는 대로 읽으면 '무르플'이 된다. '무릎' 다음에 온 조사가 '을'이니 '무릎'의 받침 'ㅍ'이 '을'에 가서 붙어 소리가 난다. 이름하여 '연음법칙(連音法則)' ― 이어읽기이다.

학생들에게 '무릎을'을 소리나는 대로 쓰라는 문법시험을 치른다면 아마 대부분이 답을 맞출 것이다. 학교문법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학교문법이 시험이 아니라 실생활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연음법칙이니 이어읽기니 문법 용어들은 들어 알 터이지만, 그것이 실제 언어생활에서는 무시되기 일쑤이다.

고등학교 교사 시절이니 벌써 20년이 훌쩍 지난 일이다. 국어 시험에 이런 문제를 출제한 적이 있다.

   하도 ㉠맛있다고 하기에 조금 샀어요. ㉡맛이나 보셔요.
   → 밑줄 친 ㉠과 ㉡에 적용되는 발음규칙이 아닌 것은?

㉠은 우선 '맛'과 '있다'가 둘 다 실질형태소이니 '맛/있다고'라 끊어 읽어야 한다(절음법칙), 다음으로 '맛'은 '맏'으로 소리가 나고(말음법칙), 그다음 '맏'의 받침이 '있'에 연결되어 소리가 나며(연음법칙), '있다고'는 '이따고'로 소리가 나(경음화) '마디따고'로 읽으며, ㉡은 그냥 '맛'의 받침 'ㅅ'이 뒤에 오는 조사(형식형태소) '이나'에 연결되어(연음법칙) '마시나'로 읽는다. 따라서 ㉠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 절음법칙, 말음법칙, 연음법칙, 경음화이고 ㉡에 적용될 것이 연음법칙이니 이 네 개 이외의 것이 답이 될 것이다. 아마 '자음접변'이나 '구개음화' 같이 학생들에게 익숙한 문법규칙을 슬쩍 오답으로 끼워넣었을 것이다.

학생들은 교실에서 '마디따고'와 '마시나'를 구분하여 배웠으며 그렇게 발음하도록 연습까지 했다. 그러나 실제 언어생활에서 그렇게 읽는 학생들이 몇이나 될까? 모두가 다 '마시따고'라 읽고 있다.

분명히 '맛있다'와 '멋있다'는 '마디따'와 '머디따'로 읽어야 한다. 위에 설명한 문법규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언어생활에서 '마디따'와 '머디따'로 읽는 한국인이 몇이나 될까? 학생들이 질문을 했다. '김수미는 그렇게 안읽는데요?' 그랬다. 당시 TV 광고에 등장한 '일용 엄니' 김수미가 뭔 식료품 광고에 나와서는 또 사가느냐는 판매원의 질문에 '마시쓰니까'라 답을 했다.

마시쓰니까. 분명 '맛있으니까' 또 사간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학생들에게 가르친 정확한 발음은 '마디쓰니까'이다. 선생인 나의 가르침보다는 TV에 나와서 광고 속에 떠드는 탤런트의 발음을 학생들은 더 신뢰한다.

탤런트뿐이겠는가. 가수, 개그맨에 아나운서까지 우리말 발음에 서툴다. 그들의 틀린 발음이 결국에는 우리말을 변화시키고 학교문법을 흔들어버린다.

언젠가 개그맨이 TV에서 말끝마다 '반가워~'와 '고마워~'를 특이한 억양으로 발음했다. 물론 당시 그 발음은 낯선 발음이었다. 왜냐하면 모두가 '반가와~'와 '고마와'로 발음하던 때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틀린 발음일망정 그것이 그 개그맨의 인식표처럼 되었고, 이내 학생들이 웃으며 따라했다. 뭔 말이든 끝에 가서는 '반가워~'와 '고마워~'를 붙였다. 그것이 유행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분명 '반가와'와 '고마와'가 맞는 말이라고 학교에서 배웠다. 우리말의 특성 중에 성조의 호응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양성모음은 양성모음끼리 음성모음은 음성모음끼리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조사와 어미의 쓰임이 앞말의 모음이 양성이냐 음성이냐에 따라 '아/어', '았/었'으로 달라진다. '막다'의 과거는 '막았다'이지만 '먹다'의 과거는 '먹었다'가 되는 이치이다. 분명 '반갑다'와 '고맙다' 두 단어 모두 양성모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니 어미가 양성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반가와'와 '고마와'가 맞는 발음이다(하기는 바뀐 문법에서는 반가와-반가워, 고마와-고마워 두 경우를 다 인정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개그맨의 승리이다).

가수의 경우에도 우리말 발음이 틀린 경우가 많다. 오래된 일이지만 가수 김수철이 부른 <나도야 간다>라는 곡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꼬슬 든 여인 하나~~

'꽃을 든 여인 하나 울고 있었네'란 가사를 그는 그렇게 부른다. 그의 앨범에도 그렇게 되어 있고 공연할 때에도 그렇게 발음한다. 꽃이 왜 꼿으로 변했을까. '꼬츨 든 여인~'이 왜 '꼬슬 든 여인~'으로 바뀌었을까. 김수철만이 아니다. '무궁화 꼬시 피었~(무궁화 꽃이)'고 '해삐시 따뜻(햇빛이 따뜻)'하다고 하며 '꼬슬(꽃을) 든 남자'라 외치니 우리 가수들의 우리말 실력을 알 수가 있다.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족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우는 아이를 흘깃 쳐다보다가는 남자가 아내에게 '저시나 먹여'라 소리친다.

저시나 먹이라니? 우유를 먹을 아이에게 멸치젓, 새우젓, 창란젓……을 먹이란 말인가? '저즐(젖을)' 먹이거나 '저지나(젖이나)' 먹여야지 어떻게 젓을 먹인단 말인가. 그런데 '저시나' 먹이라는 남편의 외침에 아내는 아이를 안고 젓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젖을' 먹인다.

우리의 우리말 발음. 정말 왜 이렇게도 엉망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외래어의 범람 혹은 외국어 남용 때문일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언어란 그 언어를 쓰는 민족의 혼을 담는 그릇이라 했다. 그 그릇이 깨어지고 혼까지 엉망이 되어버릴까 안타깝다.

   마주치는 눈비치(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속삭이는 눈비치(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주현미의 <짝사랑>이란 노래 1절과 2절의 첫소절이다.
중국인이면서도(이제는 한국국적의 당당한 한국인이지만) 정확하게 우리말 발음을 한 주현미. 나는 그녀가 좋다.

소주 한 잔 후에 노래방에서 종종 그녀의 노래를 따라부르기도 하지만, 그녀의 노래가 좋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녀의 정확한 우리말 발음이 좋다.


태그:#우리말발음, #연음법칙, #이어읽기, #주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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