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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는 커피숍에서 약속이 있었다. 실내 장식이 그럴듯할 뿐만 아니라 의자까지 안락함을 느낄 수 있었고, 기다리는 손님들을 위해 잡지까지 비치해놨다. 그런 만큼 커피값은 당연히 비쌌다.

약속 시각보다 일찍 도착해 커피를 받아들고 자리에 앉아 잡지를 둘러봤다.

그런데 잡지를 진열해 놓은 서가를 보면서 내가 마치 미국의 한 커피숍에 앉아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잡지 표지에 한글이라고는 '월간중앙'밖에 없었다.

호기심에 잡지를 하나하나 들춰봤다. 모두가 한국에서 발행한, 한국 사람들이 읽는 잡지들이었다. 그런데 표지가 온통 영어다. 잡지 제목을 꼭 영어로 써야만 했을까. 아무리 세계화 시대라고 해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다.

커피를 마시러 온 손님들 읽으라고 비치해 놓은 잡지들 - 온통 영어투성이이다.
▲ 커피를 마시러 온 손님들 읽으라고 비치해 놓은 잡지들 커피를 마시러 온 손님들 읽으라고 비치해 놓은 잡지들 - 온통 영어투성이이다.
ⓒ 이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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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그렇게 말한다.

"영어로 표기하거나 말하면 그럴듯하다. 한자어를 섞어 쓰면 고리타분하게 느껴지지만, 영어나 불어 같은 서구식 단어를 넣으면 뭔가 세련돼 보인다."

영어를 섞어 써야만 그럴듯해 보인다는 사고방식은 문제가 있다.

잡지 속 글을 한 편 읽었다. 글 원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스트리트에서 찾은 스포티 룩
MASTERS OF SPORTISM
슈어 2015 5월호

스트리트 퀸으로 거듭나려면 멋진 스니커즈와 반짝이 윈드브레이커는 기본.
스타일링의 고수들에게 배우는
쿨&시크 리얼웨이 스포티 룩.

SUPER COOL GIRL
1. 그레이 베이스볼 점퍼키치일러스트패치워크퀼팅 백팩을 한쪽 어깨에 걸쳐 유니크스포티 룩 완성.
2. 심플스웨트셔츠블링블링스팽글 쇼츠매치트렌디믹스매치 룩을 연출했다.
3. 알록달록한 패턴스타디움 점퍼미러 선글라스의 조합이 스포티 무드를 자아낸다.
4. 청순한 화이트 원피스를 특별하게 만든 주인공은 반짝반짝 실버 윈드브레이커.

BASEBALL VS. RUNNING
1.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컬렉션 피스키치액세서리를 착용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모터사이클 룩을 연출한 안나 델로 루소.
2. 레더 소재의 복서 팬츠크롭트 톱매치블랙&화이트 조합의 깔끔한 스포티 룩 완성.
3. 야구장 또는 트랙에서 막 나온 듯한 패셔너블 시스터즈! 라운드 선글라스는 일부러 맞춘 건가요?
4. 스트리트 패션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은 스니커즈! 리복퓨리클래식스포티 룩에 꼭 들어가는 잇 아이템!

DENIM EFFECT
1. 화이트 룩백팩스니커즈민트 컬러로 깔맞춤해 한층 상큼하다.
2. 프린트 원피스비비드 윈드 브레임커를 걸쳐 레이디라이크 무드스포티 룩을 연출한 수지 버블.
3. 크롭트 톱과 고무줄 밴드레더 팬츠의 조합에
데님 셔츠를 슬쩍 걸치는 센스!
4. 그레이 아노락 점퍼스포티하면서도 도시적인 이미지를 자아낸다.

READY, ACTION!
1. 아찔한 길이의 마이크로 쇼츠박시후드 티셔츠 하나만 입으면 섹시미를 강조한 캐주얼 스포티 룩이 10초 만에 뚝딱!
2. 음악의 비트를 타듯 현란한 동작으로 액티브스트리트 워킹을 선보인 늘씬한 패션 피플.
3. 네온 컬러 라이닝이 들어간 화려한 아노락 점퍼로 단번에 포토그래퍼의 시선 집중.
4. 미니멀실루엣블랙 사이드 라인이 더해지니 트랙 팬츠만큼 스포티하다.

파란 색으로 표기한 부분이 외국어들이다. 이런 글을 읽으며 독자들은 무엇을 느낄까. 읽기조차 거북한 '역겨움'을 느끼는 것은 나 혼자뿐일까.

정체불명의 외국어 남용, 영혼 퇴색되지 않을까

우리말이 ​영어의 토씨로 변해 있지 않은가. 아니, 어느 부분에서는 아예 영어 철자를 그대로 쓰고 있다.​ 꼭 저렇게 표현해야만 할까.

아…,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매년 한글날 즈음해 연례행사처럼 '한글사랑' '국어사랑'을 외치지만, 학교에서 한자​교육이 없어지고 한글전용이 강조될 때에, 어느 국어학자가 우리말의 미래를 우려하며 했던 말이 기억난다.

"한자를 쓰지 않고 한글전용만 했다가는 한글은 영어의 토씨로 변할 것이다."

​한자는 중국의 문자이지만 한자어는 우리말이다. 우리나라 이름인 '대한민국'이 한자어이고, ​아직도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름이 한자어다. 그 한자어가 어렵다고, 한글전용하자고 부르짖은 지 30년. 그 국어학자의 걱정이 현실이 된 것 같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단어 하나, 깔맞춤이라….

한글 전용이 시작되고 대학의 한글 동아리 학생들을 중심으로 외국어, 한자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시도가 있었다. '장애물' '클럽' 'MT' 등이 '걸림돌' '동아리' '모꼬지' 등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단어들은 널리 쓰이면서 이제는 아름다운 우리말로 굳어졌다.

이처럼 의상 관련 종사자들이 '깔맞춤'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옷이나 장식물 등의 색상을 비슷한 계열로 맞춤'이란 뜻의 단어다. 아직 국어사전에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관련 종사자들이 만들어낸 우리말이다. 아름답지 않은가.

종종 어쩔 수 없이 외래어(외국어가 아니라 외래어다)를 써야 할 때가 있다.​ 스포츠, 뉴스, 버스, 오렌지 등등. 그러나 이런 것들은 외래어라 하지만 엄연히 우리 국어다.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외국어에 해당하는 우리말이 없다면 의상 관련 종사자들이 만들어낸 단어 '깔맞춤'처럼, 각기 종사하는 분야에 쓰이는, 그 외국어에 해당하는 우리말을 만들어 써야 하지 않을까.​

외국어에 해당하는 우리말을 찾아 쓰거나, 없으면 만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저 외국어 발음 그대로, '거리, 길거리, 길, 도로' 보다 '스트리트'​가 더 그럴듯하다고, 세련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이 우리말을 좀 먹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게 쓰면서 시나브로 그 사람의 영혼마저 퇴색되지 않을까.

영어의 토씨로 변해버린 우리말. 아, 이를 어찌할 것인가.

○ 편집ㅣ김지현 기자



태그:#영어토씨, #깔맞춤, #외국어남용, #영어제목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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