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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김진명 인터뷰 "대한민국 국호의 비밀, <시경> 속에 있다"

국호 대한민국의 기원과 유래를 추적한 베스트셀러 소설 <천년의 금서>는 한 작가의 '상식적 의문'에서 출발했다. 그러니까 벌써 5~6년 전의 일이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작가 김진명은 어느 날 문득 속으로 이런 질문을 던져 봤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국호(國號)인 대한민국(大韓民國)에 들어 있는 한(韓)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상식적 의문에서 제기된 작가의 자문(自問)은 작품 속에서도 그대로 구현된 바 있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인 고대사 전공 역사학자 박기일 교수의 다음과 같은 자성(自省)으로 이어진 것이다.  

"명색이 역사학자이자 국사편찬위원이고 대학에서 선생질을 하고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이 왜 대한민국인지, 한국인이 왜 한국인인지, 한반도가 왜 한반도인지, 도대체 그 한(韓)이라는 글자가 어디서 왔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천년의 금서> 77쪽)

국호 대한민국의 기원과 유래를 찾아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유래와 관련해 우리가 알고 있는 교과서 수준의 계통도(系統圖)는 이렇다.

대한민국(1948년, 제헌국회) ← 대한민국(1919년, 임시정부) ← 대한제국(1897년, 고종황제)

그러니까 대한제국(大韓帝國)에서 '제(帝)'를 '민(民)'으로 바꾼 것이 바로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그렇다면 조선(朝鮮)의 26대 국왕 고종은 왜 국호를 한국(韓國)으로 바꿨을까? 물론 사료에는 "삼한(三韓)을 잇는다"(고종실록)는 대목이 등장한다고 한다. 하지만 김진명은 도리어 그 대목에서 커다란 모순을 발견했다.

"과거 역사를 보면 대다수 나라들은 새로운 국명을 지을 때마다 화려한 과거를 계승하려 했습니다. 실제로 왕건의 고려는 만주를 호령했던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지어졌고, 이성계의 조선은 단군이 통치하던 고조선(실제 명칭은 그냥 조선이지만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그렇게 명명했다-기자 주)을 잇겠다는 뜻이었죠. 그런데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을 가리킵니다. 우리 학생들이 지금 배우고 있는 국사 교과서에 따르면, 삼한은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있었던 작은 나라들이지요."

이 대목에서 김진명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시만 해도 두만강과 압록강을 국경으로 두고 있었던 조선이 고작 한반도 남단에 움츠리고 있었던 약소국인 삼한을 잇고자 국호를 바꿨을까요? 더욱이 고종은 당시 외세의 억압과 침략이라는 불온한 기운을 떨쳐버리고 조선의 기개를 펼치기 위해 칭제건원(稱帝建元)까지 했던 터였습니다. 어쩌면 삼한은 그 전에 이미 한(韓)이라는 웅혼한 뿌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문득 들었던 그 '상식적 의문'이 나로 하여금 이 소설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김진명은 <천년의 금서>를 통해서, 한반도 일대와 중국 대륙에 세워진 한민족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BC 3세기부터 중국 고서에 등장)이 아니라 기원전 9세기 무렵의 한(韓)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작가는 한후(韓候)가 다스렸던 이 한이라는 나라가 한신(韓信)의 조국인 한(韓)이라는 나라(BC 4세기 무렵 개국)와 전혀 별개의 나라라는 사실도 규명했다. 참고로 한신은 시(始)황제가 통치했던 진(秦)나라가 망한 뒤 초(楚)나라의 항우와 한(漢)나라의 유방이 천하 패권을 놓고 다툴 때 유방을 도왔던 인물이다.  

한편 김진명은 <천년의 금서>를 위해 천문학적 근거(천문학자 박창범 교수의 오성취루 재연 실험)라는 과학적 자료와 서지학적 근거(<시경> 한혁편, <잠부론>)라는 객관적 자료까지 제시했다.

-지금 얘기한 것들이 모두 사실인가?
"직접 확인해 보면 될 것 아닌가."

인터뷰 막바지에 기자와 작가가 나눴던 문답이다. 기자는 인터뷰 기사를 작성한 뒤 국회도서관을 찾았다. 지금부터 '국회도서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시작한다. 기자와 함께 역사의 타임머신을 타고 탐험을 떠나보자.  

이승만 "대한민국은 '동양의 한 고대국'의 부활"

 소설가 김진명씨.
 김진명 작가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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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도서관을 찾은 기자는 우선 대한민국 국호의 유래부터 추적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韓)과 연관되거나 혹은 한을 연상시키는 대목을 찾아봤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국호 대한민국을 제정한 법률 주체는 제헌국회이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전역에서 200명의 제헌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됐다. 제헌국회가 임기 2년의 의원들을 대상으로 첫 회의를 소집한 것은 5월 31일. 이날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김동원이 선출됐다.

이날부터 거의 매일 회의가 열렸는데,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결정된 것은 제헌국회 22차 회의가 열렸던 7월 1일이다. 신익희 부의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회의에서 서상일 의원이 "국호 문제가 결정돼야 헌법 전문과 1조도 결정할 수 있다"면서 국호 제정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어서 "헌법기초위원회가 제안한 국호 대한민국을 원안대로 통과시키자"는 이승만 의원의 제안에 대한 거수 표결이 실시됐다. 재석의원 188명 중 찬성 163명, 반대 2명으로 가결됐다.

1948년 8월 15일. 옛 조선총독부 청사였던 중앙청 석조건물 앞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오전 11시 20분에 시작된 행사에는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을 비롯한 해외사절단, 정부 각료와 시민들이 대거 참석했다. 중앙청 건물 전면에 내걸린 현수막에는 큼직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  

이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취임 선서를 마친 뒤 이렇게 연설을 시작했다. 

"오늘에 거행하는 이 식은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민국(民國)이 새로 탄생한 것을 겸해 경축하는 것입니다. 이날에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되어서 40여 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투쟁해 온 결실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국민에게 공식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의 연설 내용 중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새로운 출발을 '동양의 한 고대국'의 부활로 규정한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더욱이 그는 제헌헌법 전문(前文)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이라는 대목을 포함시킬 것을 주장해 관철시키기도 했다.

"한(韓)이란 이름은 우리의 고유한 나라 이름"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1948. 8. 15. 대한민국정부수립기념식장에서)
 1948년 8월 15일에 열린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에 자리를 함께 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 NARA(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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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도 연설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제헌국회의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을 계승하고 있다(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제정). 나아가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이 '고종황제의 대한제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고종황제의 대한제국'은 과연 무엇을 역사적 연원으로 삼았을까?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고종황제가 1897년 10월 11일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면서 신하들에게 했던 말이다. 고종황제는 이틀 후인 13일에는 반조문(頒詔文)을 발표하도록 명했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백성에게 널리 알리는 조서'를 뜻하는 반조문에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이 두 개의 구절이 역사학계에서도 이미 정설로 굳어진 것으로 알려진 '삼한정통론'의 근거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과 대한제국의 뿌리인 한(韓)이라는 명칭이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언급된 것은 삼한이기에 이론(異論)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김진명이 제기했던, "당시만 해도 두만강과 압록강을 국경으로 두고 있었던 조선이 고작 한반도 남단에 움츠리고 있었던 약소국인 삼한을 잇고자 국호를 바꿨을까"라는 '상식적 의문'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기자는 <조선왕조실록> 고종편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1897년 10월 11일자 기록에서 기존의 '삼한정통론'과 정면으로 배치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대목을 발견했다. 실제로 고종황제는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고 언급한 뒤 곧바로 이런 말을 했다.

"또한 매번 각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朝鮮)'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

고종황제가 봤던 외국의 문헌에는 '삼한 이전에 존재했던' 조선을 한으로 불렀던 기록이 '많았다'는 말이다. 한편 고종은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大韓)'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한민족이 주도했던 고대국가를 외국에선 이미 한(韓)이라 불렀기에 널리 알리지 않아도 모두 다 알고 있을 것이란 말이다. 대신 중 특진관 조병세도 이렇게 화답했다.

"각 나라의 사람들이 조선(朝鮮)을 한(韓)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상서로운 조짐이 옛날부터 싹터서 바로 천명이 새로워진 오늘날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고종황제와 신하들의 19세기 말엽 역사인식에 따르면, 삼한 이전에도 한은 엄연히 존재했던 셈이다.

"우리나라는 지역으로 연(燕)나라에 가까웠다"

또한 한민족의 고대국가가 차지했던 강역이 요하와 중국 동북부에까지 미쳤다는 인식이 <조선왕조실록> 정조편에도 등장한다. 지중추부사 홍양호가 1799(정조 23년) 12월 21일 <흥왕조승> 4편을 정조에게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동방에 나라가 있게 된 것은 상고 시대로부터인데 단군이 맨 먼저 나오시고 기자께서 동쪽으로 건너오셨습니다. 그때 이후로 삼한(三韓)으로 나누어지고 구이(九夷)로 흩어져 있다가 신라와 고려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하나로 섞여 살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홍양호는 동방에 있던 한민족 국가의 강역이 "지역적으로는 연(燕)나라, 제(齊)나라와 가까웠다"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 정조는 "조상의 공덕을 드러내고 선인의 아름다움을 드날린 것으로 <시경(詩經)>과 <서경(書經)>보다 더 자세한 것은 없다"고 답한다.

이러한 기록들은 공교롭게도 김진명이 <천년의 금서>에서 서지학의 근거로 제시했던 내용이나 고서(古書)와 일맥상통한다.

먼저 소설의 도입부와 마지막 부분에서 대반전의 모티프로 활용된 <시경>의 '한혁(韓奕)'편을 보자. 작가는 주나라에서 춘추시대 중기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고서의 내용 중에서 2가지 대목을 소설 속에서 형상화했는데, 다음과 같다.  

(1) "한후(韓侯)는 맥(貊)족을 복속시키고 그 땅의 제후가 되었다."
(2) "한후가 수도에 들자 선왕(宣王)은 경계를 논하였으며 조카딸을 시켜 밤 시중을 들게 하였다."

김진명은 <천년의 금서>에서 주나라 선왕이 환대한 이 한후의 한(韓)나라가 대한민국 국호에 등장하는 한(韓)의 뿌리라고 주장했다.

국회도서관에서 기자는 모두 4종의 <시경> 번역본을 찾았다. 그 중의 하나인 <신완역판 시경>(명문당)의 역저자인 김학주는 한혁편에 등장하는 한나라가 "전국시대의 한나라와는 다르다"면서 한혁편의 성격을 이렇게 해설했다.

"한나라 제후가 즉위하고 바로 내조하여 천자의 명을 받고 돌아갈 때 시인이 이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모시서>에서는 윤길보가 선왕을 기린 작품이라 하였으나 근거가 없다. 선왕보다는 이 시의 내용은 거의 전편이 한후를 기린 것이라 봄이 좋을 것이다."

한편 <시경> 한혁편에는 '보피한성 연사소완(普彼韓城 燕師所完)'이라는 구절도 들어 있다. "커다란 한(韓)나라 성은 연(燕)나라 백성들이 완성시킨 것"이라는 뜻인데, "지역적으로는 (우리나라가) 연(燕)나라, 제(齊)나라와 가까웠다"는 정조 시대 관리 홍양호가 했던 증언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잠부론 "위만에게 망하여 바다를 건너갔다"

작가가 두 번째 모티프로 삼은 <잠부론(潛父論)>은 후한의 대학자 왕부(AD 85~162)가 지은 문집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의 '씨성(氏姓)'편에 시경에서 위대한 제후로 묘사했던 한후가 다시 등장한다.

한후가 선왕을 방문한 지 거의 1천여 년이 흐른 뒤의 일이니, 왕부가 얼마나 방대한 고사와 지식을 섭렵했던 학자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후한의 3대 명저인 <잠부론>에서 변방과 이민족의 침입에 대한 국방정책, 성씨(姓氏)의 분화에 대한 학술적 연구 등 아주 다양한 지식과 견해를 쏟아냈다.     

국회도서관에서 기자는 1종의 <잠부론> 번역본을 구할 수 있었다. 건국대학교 출판부가 2004년 출판한 이 책의 번역자는 임동석이다. 이 책에서 한후와 관련한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주 선왕 때에 역시 한후라는 자가 있었으며, 그 땅은 연나라에 가까웠다. 그래서 <시경>에 이렇게 노래하였다. '크고 큰 저 한성이여 연나라 백성이 쌓았도다' 그 뒤의 한서 역시 성이 한씨로 위만에 멸망하여 바다 쪽으로 옮겨 갔다."

<잠부론>에 적혀 있는 한자 원문은 다음과 같다.

"昔周宣王亦有韓侯 其國也近燕, 故詩云 '普彼韓城 燕師所完' 其後韓西亦姓韓 爲魏滿所伐 遷居海中"

<천년의 금서>에서 작가에 의해 형상화된 "한후는 연나라 부근에 있었다"거나 "차츰 한의 서쪽에서도 한씨 성을 갖게 되었는데 그 후에는 위만에게 망하여 바다를 건너갔다" 등의 내용이 역사적 근거를 분명히 가지고 기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기후한서역성한(其後韓西亦姓韓)과 천거해중(遷居海中)에 대한 임동석과 김진명의 해석이 다를 뿐이다. 임동석은 각각 "그 뒤의 한서 역시 성이 한씨로"와 "바다 쪽으로 옮겨 갔다"고 풀이한 반면 김진명은 각각 "차츰 한의 서쪽에서도 한씨 성을 갖게 되었는데"와 "바다를 건너갔다"로 해석했다.

소설이 현실보다 더 진실에 가까울 때도 있다

고종 황제 고종 황제
 고종 황제
소설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 그것은 소설을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때로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극적일 때도 있다. 역으로 소설이 현실보다 더 진실에 가까울 때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국호와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평소에는 별 의식 없이 그냥 지나쳐 버렸던,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을 때 들었던 생각도 이와 무관치 않다. 
대일본국 즉 일본(日本)이 대한제국 즉 한국(韓國)의 국권을 강탈한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칙령 제318호를 발동했다.

"한국(韓國)의 국호(國號)를 고쳐 지금부터 조선(朝鮮)이라 칭한다."      

그렇다. 한일합병 당시 일제는 국호 한국을 조선으로 고쳤다. 일각에서 "일반 인민의 감정에 미치는 바 적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했음에도 그대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일제는 일본 헌법의 국토 범위를 기존의 "혼슈, 큐슈, 시코쿠, 홋카이도 및 타이완과 그 부속도서"에서 "혼슈, 큐슈, 시코쿠, 홋카이도 및 조선(한국이 아니라-기자 주), 타이완과 그 부속도서"로 고쳤다.

한일합병을 계기로 한국이란 국호의 사용은 강제로 금지되고 말았다. 일제가 국권을 빼앗은 한국에 총독부를 설치하면서 '한국총독부'가 아니라 '조선총독부'라고 명명한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제는 왜 한국이란 국호를 없애버렸을까?

국호의 비밀을 찾아 떠난 역사탐험의 기로에서 새로운 의문의 이정표를 만난 셈이다. 기자는 국회도서관 서고를 오랫동안 떠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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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