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4승째를 따낸 해태선수들이 창단 첫 우승의 감격을 누리고 있다. 사진 가운데 콧수염 휘날리며 뛰는 김봉연이 보인다.오른쪽 옆으로 김일권, 김성한이 모자를 벗어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1983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4승째를 따낸 해태선수들이 창단 첫 우승의 감격을 누리고 있다. 사진 가운데 콧수염 휘날리며 뛰는 김봉연이 보인다.오른쪽 옆으로 김일권, 김성한이 모자를 벗어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1983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4승째를 따낸 해태선수들이 창단 첫 우승의 감격을 누리고 있다. 사진 가운데 콧수염 휘날리며 뛰는 김봉연이 보인다.오른쪽 옆으로 김일권, 김성한이 모자를 벗어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 한국야구위원회 간 <한국프로야구화보>에서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해태 타이거즈의 어린이 회원이 되면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조악한 검은색 비닐 잠바를 입고 야구장에 드나들던 시절, 어른들은 경기가 후반을 향해 치달아 열기가 최고조에 이르면 애절한 이별 노래인 '목포의 눈물'을 함께 불렀다.

승리의 순간이나 패배의 순간이나 해태의 안방인 무등 경기장에는 어김없이 수천 명이 함께 목놓아 부르는 이별의 곡조가 메아리쳤다. 선동열이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프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그날에도 축하 파티 곡은 '목포의 눈물'이었다.

'목포의 눈물'을 이해하게 되기까지

ⓒ 이상


김성한의 '오리궁둥이' 타법과 선동열의 강속구를 자랑하는 최강팀 팬이라는 자부심을 만끽해야할 신나는 야구장에 도대체 왜 이 구슬픈 노래가 울려 퍼져야한단 말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통닭을 나눠주시던 후덕한 옆자리 아저씨를 따라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응원곡을 따라 부르며 내 키는 조금씩 커갔다.  

'목포의 눈물'을 이해하게 된 건 코 밑이 거뭇해지고 목소리가 변해가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마주치게 된 '518 비디오'를 통해 전두환의 신군부가 저지른 '80년 광주'의 잔인한 학살을 알게 됐고 정치경제적으로 철저하게 소외되고 짓밟혀온 '광주'의 현실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제서야 왜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되는 9시 뉴스가 시작되자마자 우리 집의 텔레비전은 침묵을 지켜야했는지, 5월 18일에는 왜 무등 경기장에서 야구 경기가 열리지 않는 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던 퍼즐조각들은 비로서 제 자리를 찾았다. '광주'에게 야구는 그저 던지고 치고 달리는 스포츠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시절을 추억하는 책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에서 저자 김은식은 이렇게 썼다. 

"죽음의 공포가 길게 드리운 채 몇 사람만 모여 앉아도 정보기관원의 뱀 같은 시선을 느끼며 숨죽여야 했고, 해가 뜨면 내 가족, 내 친구의 피가 얼룩진 거리 위에서 또 다시 비굴하고 피곤한 삶의 좌판을 벌여야 했던 광주 시민들. 그들에게 무등 경기장은 유일하게 수천 명이 모여앉아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질러볼 수 있는 곳이었고 그들에게 해태 타이거즈는 서러운 패배와 차별의 굴레를 벗고 승리의 희열과 부러움의 눈길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가장 약한 자들의 희망이었던 해태 타이거즈

해태 타이거즈 앰블럼 해태 타이거즈 앰블럼

해태 타이거즈 상징 ⓒ 한국야구위원회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중반 프로야구판을 지배했던 해태 타이거즈는 아홉 번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모두 우승했다. 해태의 사전에 준우승이라는 기록은 없다. 불과 몇백 원짜리 '땅콩으로 버무린 튀김과자'를 팔아 선수단의 연봉을 대고 팀의 운영비를 마련한 탓에 가난한 구단 중 하나였지만 타이거즈의 야구는 '가장 약한 자들'의 희망이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97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광주의 한'을 풀었던 김대중 후보의 당선 이후 타이거즈는 몰락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처방으로 김대중 정부가 선택한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에 따라 기업의 퇴출과 구조조정이 일상화됐고 타이거즈의 모기업이었던 해태그룹도 부도라는 직격탄을 맞았던 것이다.

팀의 주축이었던 이종범은 거액의 이적료를 마지막 선물로 남기고 일본으로 떠났고 외환위기 덕에 몸집이 더 커진 재벌 소유의 구단들은 홍현우, 조계현, 이강철 등 팀의 주축 선수들을 데려갔다.

설상가상으로 해태 타이거즈의 10번째 우승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광주일고 졸업생 서재응, 김병현, 최희섭은 메이저리그 구단의 품에 안겼다. 계약금만으로 수백만달러를 제시한 미국 구단들과의 스카우트 전쟁에서 해태가 승리할 가능성은 애시당초 없었다.

이 모든 게 약자에게 가장 가혹했던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때문이었지만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팬들은 차라리 타이거즈의 독주를 시기했던 이들의 기도를 들은 신의 저주 때문이라고 믿는 쪽을 택했다. 그것은 불굴의 의지와 근성으로 열세인 객관적 조건을 극복할 수 있었던 시절이 가고 '돈'의 힘이 실력을 좌우하게 된 현실에 저항하고 싶었던 이들의 마지막 자기 위안이었다.

하지만 '개천에서 용나는' 시절이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갔음은 '타이거즈의 시련'이 끝나가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확인됐다. 타이거즈의 모기업이 몇백 원짜리 맛동산이 아니라 수천만 원짜리 '봉고'를 파는 재벌이 되고나서야 이종범이 돌아오고 그동안 빼앗기기만 했던 프리에이전트(FA) 시장에서 거물 선수를 영입할 수 있었으며, 미국으로 떠났던 서재응과 최희섭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무너지지 않을 신화에 대한 아련한 추억 한편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은 다시는 오지 않을 그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 무너지지 않을 신화를 써내려갔던 해태 타이거즈에 바치는 헌사다.

인천에 살면서 "아주 특이한 경로로 특이한 팀을 응원하며 해태 타이거즈에 특이한 적개심을 품었던" 저자는 "강자였지만 약자의 방식으로 싸웠고 승자였지만 패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팀, 그래서 약자와 패자들도 얼음 계곡물에 몸 한 번 담그고 정신 바짝 차리면 강자의 발목이라도 한 번 물어뜯을 수 있다고 악을 쓰며 항변하는 듯 했던 그 몸짓들을 그리워한다"고 고백한다.

<오마이뉴스>에 '야구의 추억'을 연재하면서 녹색의 그라운드 안에서 울고 웃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맛깔나는 글 솜씨로 버무려 냈던 저자는 이 책에서 '해태 타이거즈'를 씨줄로 '김대중'을 날줄로 삼아 야구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넘나들며 아련한 추억 한 편을 더 짜냈다.

타이거즈를 함께 그리워하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굴곡이 많았던 인천의 야구팬에게 큰 빚을 진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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