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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컴퓨터를 켰다가 바탕화면에 '물의 활용 사례'라는 이름의 파일을 보았다. 아들의 숙제인 것 같아서 살짝 열어봤더니, 내용이 수필 같은 글이었다. 내가 좀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아내가 보여준 숙제 제출계획서에 의하면 실험, 관찰, 사진, 동영상이 첨부된 보고서 형식의 글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초등학생 수준에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관해 같이 앉아서 얘기를 했다. 그리고 아주 간단한 결론에 도달했다. 처음 물이 모여서 어떻게 변해 가는지 가까이서 관찰하기로 했다. 숙제의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좀 있고, 계획서에서 요구하는 보고서 형식을 완성하기에는 시간이 없고, 남들과 좀 다른 특별한 것을 해보기로 했다. 다행스럽게 우리집 근처에 약수터가 있으니 그곳에서 시작해 하천에 이르는 약1km정도의 물길을 따라가며 물이 변화되는 모습을 관찰하기로 했다. 

 

  지난해 이곳으로 이사를 오고부터 가끔씩이라도 약수터를 다녔지만 숙제를 한다고 생각하고 가니 늘 가던 길도  좀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약수터에서 솟는 샘물은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이다. 빗물은 그냥 빗물일 뿐인데 그 물이  참나무 숲 속에서 마술처럼 맑고 깨끗한 물로 변해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숲은 마치 스폰지처럼 물을 머금었다가 조금씩 흘려보내는 것이다. 이름모를 작은 새싹도 겨우내 덮고 있던 낙엽더미를 헤집고 얼굴을 내밀었다. 을씨년스럽던 그 겨울에도 숲은 깊은 곳에서 계속 생명을 꿈꾸며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울창한 숲이 없다면 샘물도 없는 것이다.

 

  가끔 아이들의 손에 잡히는 가재가 사는 약수터는 분명 맑은 물이지만 몇 십미터도 채 내려가지 못해서 세상의 때가 묻기 시작했다. 물론 물의 양이 많지 않은 탓이 제일 크다. 너무 적다 보니 제대로 순환되지 못해 청태가 많이 껴서 도저히 물의 흐름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하지만 그렇게 적은 물도 수 천 년을 이어 흘렀을 것이며, 백년은 넘은 듯한 커다란 느티나무의 푸른 생명의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꼬불꼬불한 도랑이었겠지만 지금은 그나마 적은 물이라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시멘트로 농수로를 만들어 필요한 곳까지 길을 냈다. 가재나 기타 물을 정화시켜 줄 생명들이 살 집이 없어지고  또 주변의 풀이나 나무들은 늘 목마름에 허덕이다 고사되고, 환경이 변화되는 것이다. 곧고 반듯하게 잘 꾸며 논 것이라 할지라도 구렁이처럼 구불구불한 물길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이른 봄이지만 무논(물이 늘 고여있는 논)에는 이미 영농준비가 거의 끝나고 모내기를 기다리고 있다. 무논 옆에는 작은 습지가 있는데 그곳에는 수생식물과 우렁이 등 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다. 가뭄이 심해 그곳도 좀 말라 있긴 하지만 비가 많이 와서 물이 고이면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한 사오백 미터쯤 내려오면 외떨어진 집과 몰래 숨어서 있는 것 같은 축사와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아파트의 귀퉁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조금씩 보이면서 온갖 혐오스러운 쓰레기들이 제일 먼저 물을 휘젖는다. 누군가 몰래 갖다 버린 생활 쓰레기는 도랑 옆을 가득 메웠다.

 

  그래도 물은 점점 많아져 제법 세수도 하고 발목이 잠길 정도의 웅덩이도 만들었고, 더 놀라운 것은 그곳에 송사리 식구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은 생명과 함께 할 수 있을 만큼의 자정능력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참 다행이다.

 

 

   하지만 아파트 후문에 이르러서는 물이 가장 큰 시련을 맞게 된다. 시멘트 포장 길 아래 지하로 흘러야 하는 것이다. 그곳엔 송사리도 어떤 수생식물도 살 수 없고 오직 오염된 생활용수와 함께 몸을 섞어야 하는 것이다. 고작 백여 미터의 지하를 지났을 뿐인데 나오는 물은 악취를 풍기며 하얀 물때가 너울거려 보기에도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다.

 

  이곳에서는 이미 물이 아니다. 그냥 오염 덩어리 일 뿐이다. 가끔씩 보이는 푸른 식물도 예사롭지 않고 앙칼져 보인다.

 

  약수터에서 시작된 행복한 물은 짧은 여행에 쉽게 비극을 맞았다. 그 비극은 사람들과 만남으로 인해 비롯되었다.

 

  약수터 물은 그렇게 악취를 풍기고 온갖 땟물과 생활하수로 변신해 좀 덩치가 큰 하천과 만나 제법 강처럼 흘러가게 된다. 다소나마 안심이 되는 것은 그래도 그곳은 약수물 보다 더 많은 물이 흘러 오염을 희석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겉 모양이 그렇지 속은 여전히 감추어진채 안타깝게 흐르는 것이다.

 

   하지만 붉은 깃발이 꽂힌 하천도 안타깝긴 마찬가지다. 소하천정비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마도 구불구불한 물길이 시멘트 농수로처럼 반듯해지고, 또 포클레인 바가지가 물길을 헤집어 도랑 옆 백발이 성성하게 바람에 나부끼는 억새들을 짓밟고, 먹이를 찾는 재색 두루미는 송사리 한 마리도 남지 않은 이곳을 떠날 것이다. 사람만 남겠지. 

 

  아주 짧은 약수터의 물길 관찰여행의 끝은 무거웠다.   자연은 자연스러울 때가 제일 아름답다는 생각을 아들과 같이 나누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덧붙이는 글 |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태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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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제천의 소소한 이야기를 전하는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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