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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쪽으로 잠자는 천막이 보인다.
▲ 거리에서 수박 파는 사람들 뒤쪽으로 잠자는 천막이 보인다.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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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잠을 설쳤다. 끊임없이 주유소로 들어오는 차량들 때문에 자다 깨다를 반복했던 것이다. 일요는 오늘 낮에 퇴근해서 집에 간다고 한다. 집에서 하루, 주유소에서 하루, 이런 식의 2교대 근무를 계속 하는 것이다.

나는 일요가 끓여준 녹차를 한잔 마시고 출발했다. 시간은 오전 7시 30분. 출발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길에서 수박과 메론을 파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은 나에게 수박을 먹고 가라면서 나에게 이것저것 묻는다. 이들의 뒤쪽에는 커다란 천막이 놓여져 있다.

"여기가 집이에요?"

내가 묻자 그렇다고 한다. 낮에는 이렇게 거리에서 수박을 팔고, 밤에는 천막에서 자는 생활을 한다. 며칠전에 만났던 꿀을 파는 청년 자스루벡처럼, 이들도 돈을 벌기위해서 집을 나와 거리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중에서 젊은 친구는 19살이라고 한다. 한참 학교에 다니면서 친구들과 어울릴 나이에 길거리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수박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조금 걷자 경찰검문소가 나온다. 여기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경찰은 나에게 친절하게 길을 설명해준다. 직진하면 카자흐스탄 영토로 들어가게 되고, 우회전하면 굴리스탄 가는 길로 접어든다. 혹시라도 내가 실수로 직진하게 되면, 나는 카자흐스탄에 불법입국하게 되는 것이다.

멀리 카자흐스탄 영토를 바라보면서 우회전했다. 쭉뻗은 대로와 주변으로는 아파트 건물이 보인다. 수박으로 배를 채웠지만 오래 가지 못한다. 금방 배가 고파져서 거리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오전 11시.

식사 시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식당은 조용하다. 주방장처럼 보이는 사람이 나를 맞아주었지만 되는 음식이 없단다. 양고기국, 만두, 꼬치구이 모두 지금은 준비가 안되었다고 한다. 배고파 죽겠는데.

나는 주방을 살짝 들여다보고 나서 수첩을 꺼내 그림을 그렸다. 타원형의 그림을 그리고 손으로 톡톡 쳐서 깨뜨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이 주방장이 웃으면서 계란요리는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계란후라이 3개와 녹차로 배를 채우고 나왔다.

거리의 상점에서 한국드라마를 보다

현지에서 유통(?)되는 DVD
▲ <겨울연가> 현지에서 유통(?)되는 D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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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연가> <주몽> 포스터가 붙어있다.
▲ 거리의 식당 <겨울연가> <주몽> 포스터가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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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벗어나자 도로 양옆으로는 목화밭이 계속 펼쳐진다. 앉아서 쉴 곳이 없기는 사막이나 목화밭이나 마찬가지다. 한참을 걸어서 또 다른 마을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보이는 상점으로 가서 음료수 한 병을 사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상점앞에 있는 작은 탁자에 앉아있으니까 이곳에서 일하는 젊은 친구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한국 드라마 DVD를 보여준다. 겨울연가.

TV에 DVD 플레이어를 연결하더니 겨울연가를 나에게 보여주기 시작한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상점에 있던 다른 사람도 한국드라마가 최고라면서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인다. TV에서는 어느새 <겨울연가> 1회가 나오고 있다. 최지우가 버스에 앉아있는 모습, 배용준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고보니 어제 저녁에는 주유소의 TV에서 <대장금>을 보았다. DVD로 본것이 아니라, 우즈베키스탄 방송국에서 실제로 방영하는 것을 본 것이다. <대장금>은 러시아어로 대사를 녹음해서 방송한다. 그런데 녹음상태가 그리 깨끗하지 못하다. 한국어 대사를 완벽히 지우고 다시 녹음한 것이 아니라서, 집중해서 들으면 러시아어 뒤로 한국어 원음이 들린다.

나는 한국에서 이 두 드라마를 한 번도 본적이 없다. 한국에서도 보지 못햇던 드라마를 이 먼 곳에 와서 보게되다니. 이것도 참 대단한 우연이다. 러시아어로 녹음된 <대장금>에서는 이영애를 가리켜서 '탕김'이라고 부른다. <겨울연가>에서는 배용준을 '준상'이라고 부른다.

그동안 우즈베키스탄을 여행하면서 현지인들이 나에게 '준상', '탕김'을 연발했던 이유를 이제서야 깨닫는다. 이들에게 한국은 준상과 탕김의 나라다. 그리고 <주몽>의 나라이기도 하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주몽>의 인기는 대단하다. 아이들은 주몽이 박혀있는 티셔츠를 입고 다니고, 어른들은 주몽이 그려져있는 성냥갑을 들고 다닌다. 주몽 포스터가 붙어있는 가게도 많다. 특히 성인 남성들 사이에서 '쏘시어노'의 인기는 어마어마하다. 배우 한혜진이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하면 아마 타슈켄트 공항이 현지 남성들로 발칵 뒤집어질 것이다.

여행하면서 또다른 한국드라마를 본 적도 있다. 구한말을 배경으로 차인표가 등장했던 드라마인데 제목이 뭔지 도저히 모르겠다. 현지인들이 제목을 말해주었지만, 나의 형편없는 러시아어 실력으로는 알아듣지를 못했다.

왜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 드라마가 인기 있을까. 여행하면서 만났던 한 여성이 나에게 했던 얘기가 떠오른다. 그 여인은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공통점을 이야기 했었다. 평상바닥에 책상다리로 앉는 것을 좋아하고 나이를 구별해서 연장자를 존대하는 경향이 많다. 인사할때는 고개를 숙이고 술을 마실 때는 상대방 잔에 술을 따라주고 '원샷'을 한다.

이런 공통점이 한국드라마를 좋아하게 만든 요인중 하나일 것이다. 많은 현지인들이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은 친구!'라고 말한다. 터키에서는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한다던가. 때로는 형제보다 친구가 더 좋게 느껴질 때도 있는 법이다. 적어도 이들에게 한국이 익숙한 나라인 것은 분명하다.

70년 전에 강제이주돼서 이곳에 정착한 고려인들을 포함해서 대도시에 깔려있는 수많은 LG와 삼성 가전제품, 우즈베키스탄의 도로를 누비고 있는 대우자동차까지. 이 모든 것들이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으로 작용한다. 그러니 한국드라마가 수입되면 일단 낯설지 않게 바라볼 것이다.

저녁에 작은 도시 굴리스탄 도착

거리의 바자르(시장)
▲ 굴리스탄 가는 길 거리의 바자르(시장)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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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도바 마을
▲ 굴리스탄 가는 길 사르도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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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점의 TV에서는 배용준과 최지우가 뭐라고 러시아어로 떠들고 있다. 갈길이 먼데 마냥 이곳에 앉아서 드라마를 보고 있을 수는 없다. 나는 간식으로 먹을 것들을 몇 가지 구입한 후에, DVD를 틀어준 청년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저녁 5시경에 굴리스탄 외곽에 도착했다. 잠을 잘 곳을 찾아다니다가 몇 군데에서 쫓겨나고, 자포자기 상태가 되었을 때 한 식당에서 나를 받아주었다. 식당 주인의 이름은 '후산'이란다. 참 이슬람스러운 이름이다. 왠지 그를 보니까 배우 임창정이 떠올랐다.

식당 한쪽에 짐을 풀려고 했더니 후산은 배낭을 다른 곳에 보관하란다. 식당 옆에는 커다란 상점도 있다. 후산은 식당과 상점을 함께 운영하는 것 같다. 건물의 옆에는 큰 화장실도 있고 또 뭔가를 공사중이다. 후산은 여기서 꽤 크게 사업을 벌이는 모양이다. 그의 말대로 배낭은 그 상점 한쪽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너덜너덜해진 지도를 꺼냈다.

여기까지 오면서 지도를 셀 수 없이 꺼냈기 때문에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다. 상점에서 투명테이프를 사서 넝마처럼 변해버린 지도에 붙였다. 그리고 다시 식당으로 와서 탁자에 앉으니까 후산이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여러 가지를 물어본다.

아직은 한가한 시간이라서 손님들이 거의 없다. 나는 차가운 맥주를 주문하고 양고기국과 빵도 함께 시켰다. 하루종일 걸어왔으니 이맘때면 식욕이 왕성하게 발휘된다. 후산은 하얀 우유와 꿀도 같이 가져다 주었다. 여기서 타슈켄트까지는 120킬로미터라고 한다. 도보여행의 총구간을 1200킬로미터로 잡았으니, 정확하게 10분의 1이 남은 것이다.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식당주인 후산
▲ 굴리스탄의 식당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식당주인 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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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우즈베키스탄, #중앙아시아, #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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