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소리>는 갈등상황에서 고민하는(골치 아픈) 한 노인과 늙은 소를 통하여 우리 사회와 인간의 악랄한 이중성을 고발하고 있다.

<워낭소리>는 갈등상황에서 고민하는(골치 아픈) 한 노인과 늙은 소를 통하여 우리 사회와 인간의 악랄한 이중성을 고발하고 있다. ⓒ 스트듀오 느림보

독립영화 역사에 이변이 일고 있다. 지난 1월 15일에 개봉된 <워낭소리>가 11일 현재 <마린보이> <적벽대전2-최후의 결전> <과속스캔들>에 이어 박스오피스 4위를 기록 중이다. 동원한 관객수도 30만7546명이다. 이는 독립영화사상 흥행 1위의 성적표인데 처음부터 상영관을 확보하고 개봉된 것이 아니고 보면 엄청난 흥행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한국 독립영화 중 최고의 흥행작은 10만명 정도를 동원한 것으로 알려진 <우리 학교>(김명준 감독)였으며, 외국 영화를 포함해도 22만명을 모은 <원스>가 가장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다. <워낭소리>는 이 기록을 벌써 깼다. 상영관의 한계를 토로하는 관객들의 성화에 7개 상영관으로 시작한 <워낭소리>는 지난 주말 현재 70개 이상의 스크린으로 확대되었다.

 

40살을 넘겨 죽어가고 있는 소와 그를 지키는 노인이 큰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워낭소리>는 너무 많은 소리를 아우른다. 그중 신구 갈등이 가장 큰 이슈다. 이는 늘 우리 생활에서 보는 문명충돌이긴 하지만, 영화는 이를 담담한 ‘워낭소리’로 우려낸다. 근데 그 이면에는 철저히 인간의 이중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곁다리, 원균과 삼순

 

좀 엉뚱하긴 하지만, 주인공(실명)의 이름이 ‘원균’과 ‘삼순’이라는 것이 날 그냥 지나가게 하질 않는다. 정확히 최원균, 이삼순이 주인공 이름이다. 주인공들의 이름이 벌써 문명충돌을 예고한다. 영화의 내용과 주인공들의 실제 이름과는 상관이 없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난 조선시대의 무장 원균과 드라마 주인공 삼순이 생각나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원균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갈등을 빚었던 장수다. 변방 오랑캐를 무찌른 공으로 부령부사에 올랐고, 1592년(선조 25년) 경상우수사로 임명되어 가배포를 지켰다. 그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과 힘을 합해 옥포와 당포 등지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조정에서 내리는 포상문제로 이순신과 갈등을 빚는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지휘권을 장악하자 강하게 반발한다. 대부분은 이순신의 편에서 원균을 보기 때문에 원균이 이순신을 시기하여 모함하였다는 쪽으로 알고 있다. 아무튼 둘의 갈등은 대단하였다. 이 갈등으로 인하여 이순신은 더욱 성웅 대우를 받는 게 아니겠는가.

 

삼순은 억척스런 아줌마의 표상이다. 2005년에 종영된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주인공 이름이다. 당시 김삼순 역에는 김선아가 열연을 했다. 삼순은 얼굴이 예쁘거나 몸매가 아름답지 않다. 그렇다고 젊거나 배경이나 학벌을 자랑할 만하지도 않다. 한 마디로 내세울 것 없는 뚱뚱한 노처녀다.

 

그녀 앞에 남자가 나타나고 그 남자가 바람을 피운다. 삼순이가 뿔났다. 절망이 있으면 희망도 있는 법. 비록 계약이긴 해도 멋진 남자와 연애를 시작한다. 그러면서 벌어지는 황당한 이야기들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기발랄한 웃음을 머금게 한다. 자신과 갈등하는 삼순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난 <워낭소리>의 할아버지에게서 할머니와의 갈등, 기계문명과의 갈등, 머리가 쑤시는 아픔과의 갈등을 본다. 할머니에게서 팔자타령을 하며 툭툭 내뱉는 말들이 웃음을 준다는 것을 발견한다. 소가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은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갈등을 포함한다. 이들의 갈등은 한마디로 신구갈등이다. 버릴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평행선에 옛것과 새것이 있다.

 

영화 속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갈등은, 역사 속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을 닮았다. 드라마 속 삼순이 부닥치는 상류사회와의 갈등과 삼순의 현실과 계약을 통하여 얻어진 환상사이의 갈등과 닮았다. 다시 말하면 이들의 갈등은 신구갈등이요 문명충돌이다.

 

“소 팝시다!”, “안 돼!”

 

 카메라가 달구지를 타고 병원에 가는 노부부 곁으로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 행렬을 비출 때 신구갈등의 문명충돌은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카메라가 달구지를 타고 병원에 가는 노부부 곁으로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 행렬을 비출 때 신구갈등의 문명충돌은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 스트듀오 느림보

 

할머니의 입에서는 불평이 그칠 날이 없다. “소 팝시다. 그래야 편하게 살 것 아니껴.” 수도 없이 이 말을 반복한다. 할아버지는 코도 들썩 안 한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아이고 내 팔자야. 영감 잘못 만나 고생만 한다. 소 니도 주인 잘못 만나 고생이다”라고 말한다.

 

재래식, 옛날 방식을 고집하는 농사법이 할아버지의 삶의 방법이라면, 기계농법, 농약농법을 받아들이자는 게 할머니의 주장이다. 할머니가 ‘농약을 쳐 김매기를 수월하게 하자’고 하면, 할아버지는 ‘그럼 소 꼴은 어떻게 베어다 먹일 수 있느냐’고 펄쩍 뛴다.

 

이들의 토닥거림은 좀 거창하게 말하면 문명충돌인 게다. 옛것과 새것의 충돌 말이다. 아직은 옛것의 심지가 굳다. 할아버지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가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새것에 손을 들었다면 그리 아름다운 영상이 스크린에 차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골이 쑤시도록 아프고, 다리는 곧게 걷기가 힘든 할아버지의 건강이 그 고집이 알마 가지 못할 것을 예고한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이라고 멈춰 서서 생각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골이나 예스러움에 대한 동경이 있다. ‘고향생각’이라 해도 좋고 ‘향수’라 해도 좋다. 하여튼 이런 사람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낭만을 자극한 게 영화 <워낭소리>다. 그 자극이 정확히 먹혀들어 <워낭소리>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

 

카메라가 달구지를 타고 병원에 가는 노부부 곁으로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 행렬을 비출 때 신구갈등의 문명충돌은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늙어 뼈만 앙상한 한우가 끄는 달구지 행로에서 미국산 쇠고기 반대집회 참가자들이 그들의 주장을 외칠 때는 어떤 카타르시스 같은 전율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흐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늙은 소, 젊은 소

 

 할아버지는 늙고 병든 소가 얼마 못 살 것이라는 수의사의 진단이 내려지자 젊은 소 한 마리를 사들인다. 그 딴에는 그래도 새 문명을 받아들인 꼴이다.

할아버지는 늙고 병든 소가 얼마 못 살 것이라는 수의사의 진단이 내려지자 젊은 소 한 마리를 사들인다. 그 딴에는 그래도 새 문명을 받아들인 꼴이다. ⓒ 스트듀오 느림보

 

잃어버린 것에의 동경, 잊히는 것들에 대한 연민, 농촌에 대한 환상,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문명의 편리함을 두르고 살면서도 이런 감상은 버리지 못하고 있는가. 이런 환상이 존재하는 한 문명충돌을 영상화한 <워낭소리>류의 영화는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람은 문명에 관한 한 몹시 이중적이다. 현대문명이 주는 편리함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의 문명에 물들지 않은 모습은 아름답게 본다. 영화에서 진한 감동을 받은 관객이라도 영화 속 노인과 그가 누리는 문명 이전의 상황을 체험이라도 하라고 하면 머리를 흔들 것이다. 이런 인간의 악랄한 이중성 때문에 <워낭소리>는 성공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늙고 병든 소가 얼마 못 살 것이라는 수의사의 진단이 내려지자 젊은 소 한 마리를 사들인다. 그 딴에는 그래도 새 문명을 받아들인 꼴이다. 그 소가 일소로 호락호락하게 길들 것 같지 않고, 할머니의 상화와는 딴판이지만. 그런데 새 소에게 꼴을 베어다 먹이느라고 늙은 소가 더 고생을 한다. 그것뿐이 아니다.

 

같은 구유에 있는 여물을 먹을 때 젊은 소가 늙은 소를 들이받아 못 먹게 한다. 신구갈등이 극에 달하는 장면이다. 늙은 소의 배며 머리며 등에는 상처가 늘어간다. 그 장면을 보는 관객이라면 늙은 소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진땀을 흘렸을 것이다. 늙은 소가 눈물을 흘리며 죽어가는 장면에서는 또 어땠으랴? 이런 것을 두고 ‘극적’이라 한다.

 

극적인 장면들 때문에 <워낭소리>는 감동을 준다. 신구갈등, 문명충돌의 ‘극적’ 처리가 매력이다. 용산참사나 여야충돌, 쇠고기 갈등 등도 따지고 보면 문명충돌이요, 신구갈등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문제들 앞에 계속 노출될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이중성이다. 남이 불편함을 지고 가고 나는 그저 감상이나 하고자 한다. 남은 추억의 풍경에 남아주길 원하며 나는 문명의 이기에 푹 빠져 산다. <워낭소리>는 갈등상황에서 고민하는(골치 아픈) 한 노인과 늙은 소를 통하여 우리 사회와 인간의 악랄한 이중성을 고발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워낭소리> 이충렬 감독/ 최원균, 이삼순 주연/ 스튜디오 느림보 제작/ (주)인디스토리 배급/ 상영시간 78분/ 2009년 1월 15일 개봉

2009.02.12 10:06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워낭소리> 이충렬 감독/ 최원균, 이삼순 주연/ 스튜디오 느림보 제작/ (주)인디스토리 배급/ 상영시간 78분/ 2009년 1월 15일 개봉
워낭소리 독립영화 문명충돌 신구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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