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디스토리


작년 가을 출산을 앞둔 아내는 꼭 함께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고 불쑥 말했다. 곧 태어날 아기에게도 꼭 보여주고 싶은 영화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리고는 마치 자기가 감독을 한 영화라도 되는 것처럼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 아내는 이런 소망을 내비쳤다. "정말 좋은 영화인데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어." 그땐  '도대체 무슨 영화기에'라는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했지만 독립영화 배급사 인디스토리에서 일하는 아내가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을 준비하면서 미리 본 영화가 있는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심상치 않았다. 그 영화가 부산영화제에서부터 관객들을 울리기 시작하더니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탔고 서울독립영화제에서는 관객상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아내가 출산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간 지난달 15일 개봉하더니 2월 3일 관객수 10만을 돌파했다. 한국 다큐멘터리와 독립영화 사상 최고 흥행 기록이다. 영화 속 소처럼 느리지만 꾸준한 걸음으로 관객을 만난 결과였다.

아무리 영화가 좋아도 개봉관을 잡기 힘들고 그래서 관객들을 끌어모으기 힘든 독립영화의 현실적 어려움을 이 영화도 비켜가지 못할 것이라던 나의 '회의론'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반면 아내의 소망은 현실이 됐다. 이쯤 되면 다들 눈치를 챘겠지만 아내가 함께 보자고 했던 영화는 바로 <워낭소리>였다.

"하늘의 모든 별을 <워낭소리>에"

영화에 평점을 준 한 누리꾼은 "하늘의 모든 별을 <워낭소리>에"라는 극찬을 했고 도올 김용옥 교수도 인디스토리에 전화해 "이렇게 좋은 영화를 볼 수 있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단다. 예전엔 기자들에게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던 인디스토리의 보도자료도 요즘엔 보내기가 바쁘게 기사화된다. 전에 없던 독립영화에 대한 관심이다. 평소 영화 보러가자면 TV에도 볼 게 많은데 뭐하러 돈들여 영화관까지 가느냐던 어머니는 <워낭소리>를 세 번 보셨다.

지난달 30일 아내가 일하는 인디스토리를 찾았다. 이충렬 감독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한구석에 관객 22만을 돌파한 독립영화의 전설(?) <원스>와 <워낭소리>의 관람객 증가 추세를 비교한 표가 눈에 띄었다. 또 한쪽에는 <워낭소리> 포스터가 쌓여 있었고 인디스토리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약속 시간인 오후 4시가 조금 넘어 이충렬 감독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예쁘장한 볼펜 한묶음이 들려 있었다. 선댄스 영화제에 참석했다가 비록 수상 소식은 못했지만 대신 인디스토리 식구들에게 줄 선물은 챙겨온 것이라 했다. 

첫 스크린 데뷔에서 크게 사고(?)를 친 그였지만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아직 'PD'가 아닌 '감독'이라는 호칭이 어색하고 실감이 안 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댄스 영화제 다큐 경쟁 부문 진출 소식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 무덤덤한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무안하게 만들었다고. 모든 시청자에게 공개되는 방송에 아직도 익숙해서인지 관객 5만, 10만이라는 숫자가 크게 와닿지 않는다는 그에게 먼저 영화 내용 중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순간 성자의 모습을 느꼈다"

 <워낭소리> 이충렬 감독

<워낭소리> 이충렬 감독 ⓒ 이승훈

-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영화 속 장면이 있나? 개인적으로는 할아버지가 소 달구지에서 내려 소와 함께 걷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는다.
"나도 그렇다.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할아버지가 그전까지는 한번도 소 달구지에서 내려 걸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소가 힘이 부치니까 다리가 불편한 할아버지가 나뭇짐을 덜어서 나눠지고 옆에서 걷더라. 길에서 기다리다 그 장면을 잡아냈는데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순간 성자의 모습을 느꼈다."

- 독립영화를 보면서 가끔 '소통이 불가능한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워낭소리>는 대중의 정서를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는 것 같다.
"다큐멘터리도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눈높이를 관객에 맞추고 편집했다.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서 관객들이 익숙한 극영화의 서사를 적용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소의 수없이 반복되는 말과 행동들을 적절하게 여러 장면들에 배치했다. 시간을 미분해 재구성했다고 할까. 이 때문에 사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할아버지와 할머니, 소의 삶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나만의 조리법으로 하나의 요리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이해해 달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리얼리티는 아니다."

"의도한 생략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잘 됐다"

- 영화를 보다 보면 인과관계상 있어야할 장면이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를 들어 젊은 소가 송아지를 낳는 장면은 없는데 송아지가 태어나 있다거나 마지막 죽은 소를 장사 치르는 장면은 비중에 비해 분량이 짧다.
"제작 환경이 열악했던 탓이다. 비용 문제 때문에 상주하면서 찍지 못했다. 3년 동안 제작하면서 촬영감독도 계속 바뀌었다. 그래서 인상이 강하게 남는 송아지 출산 장면, 늙은 소가 쓰러지는 장면, 축사가 무너지는 장면을 모두 놓쳤다. 소가 죽던 날에도 밤에 연락받고 내려가려는데 아무도 같이 가지 못했다. 그래서 혼자서 찍었다. 한계가 많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아쉬움이 많을 것 같다.
"그림이 될 만한 장면들을 놓치고 걱정이 많이 됐고 어쩔 땐 모두 다시 찍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편집을 해놓고 보니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장면이 빠지면서 관객들이 느끼는 감동이 더 커진 것 같다. 영상의 빈 자리를 할아버지의 마음이 채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들이 정서적인 공감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의도한 생략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잘 됐다."

- 원래 방송용으로 기획했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담배를 좋아하시는 할아버지가 담배 피우는 장면이 없는 것도 방송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가 마무리되어갈 무렵에 제작사도 바뀌고 방송국에서도 <워낭소리>에 대해 퇴짜를 놨다. 편집 과정에서 방송용보다 영화용으로 만들어보라는 권유도 많이 받았고 결국 <우리학교>를 제작한 고영재 PD를 만나면서 극장에 걸리게 됐다. 이것도 과정은 어려웠지만 결과적으로 잘 됐다. 중간에 포기한 제작사가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다고 들었다.(웃음)"

- 송아지가 날뛰다 할아버지가 넘어지는 장면을 정지 화면으로 처리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사실 그건 효과가 아니다. 그 때 내가 직접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그만 카메라 앵글 안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영화에 뜬금없이 나를 등장시킬 수 없어서 그 직전까지만 살려 내다보니 느린 화면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 영화 끝의 자막에 "우리를 키우기 위해 헌신했던 이 땅의 모든 소와 아버지들에게 이 작품을 바칩니다"라고 했는데 이 땅의 어머니들이 서운하시지 않을까.(웃음)
"사실 따지고 보면 <워낭소리>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도 할아버지 빼고는 할머니와 소들이 다 여성이다.(웃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어머니만 해도 아들과 대화를 많이 하지만 아버지는 소통한 적이 없던 관계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이었다. 아무튼 많은 자식들이 <워낭소리>를 통해서 나를 위해 헌신했던 이들의 땀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느리고 우직하게... 기다림의 결실 <워낭소리>

ⓒ 인디스토리


<워낭소리>의 제작과정은 소의 걸음처럼 느리지만 우직했다. IMF 당시 아버지를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자고 결심한 후 기획에만 5년이 걸렸다. '약점'이 있는 아버지와 소를 찾기 위해 말 그대로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넜다. 남해, 지리산, 진도, 청주, 함평 등 우시장이 있는 곳과 기계로 농사를 짓기 힘든 계단식 논이 있는 마을들을 모조리 뒤졌다. 풍광이 참 좋았던 지리산의 마을을 찾았지만 소가 수명을 다해 발길을 돌린 적도 있었다.

2005년 촬영에 들어가서도 6개월을 기다렸다. 카메라가 다가가면 사진 찍는 줄 알고 동작을 멈추는 할아버지가 촬영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그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소에 대해 알아가고 그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촬영에 들어가서도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뒤를 쫓는 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소의 움직임을 기다리며 한 장면 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제작 과정 3년은 그런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 제작 기간이 상당했는데 제작비가 많았던 것도 아니고 먹고 사는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어렵긴 했지만 중간 중간 아르바이트를 해서 때웠다. <워낭소리>를 시작하면서 이번에도 안되면 그만 두려고 했다. <워낭소리>가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버텼다."

- 방송일 하면서 어떤 분야를 다뤘나. 그리고 실패했다고 한 작품들은 어떤 것들이었나?
"사실 내가 무당 전문가다.(웃음) 무속 분야를 다루기도 했고 문제작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센 주제들을 주로 다루고 싶었다. 비전향 장기수를 다루기도 했고 <워낭소리> 전에 사북 탄광 노동자들에 대한 기획을 했다. 직접 사북에 가서 6개월 동안 광부들과 함께 살면서 갱에도 들어가고 테이프 150개를 찍었다. 그런데 방송국에서는 '이런 걸 왜 찍었느냐'며 거들떠 보지도 않더라.

그렇게 몇 개를 실패하고 나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지고 정신적으로도 너무 힘들었다. 밤에 호흡 곤란이 와서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일종의 공황 장애인데 이번에 선댄스 영화제에 초청받고 나서 비행기 탈 일부터 걱정이 되더라. 아직도 약을 먹고 있다."

- 부모님께 <워낭소리> 보여드렸나?
"내가 시골 출신인데 시골에서는 아들이 좋은 대학 나와서 성공하길 바라는 분위기와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아들의 계속된 실패에 부모님도 적잖이 맘 고생이 많으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이 언론에도 나오고 해도 아직 잘 믿지 못하시고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고 하신다. 결혼도 안한 노총각 자식이 오랜만에 효도한 기분이다."

- 앞으로 계획이 궁금하다.
"방송에서 영화로 매체가 바뀌었을 뿐 나의 정체성은 PD다. 앞으로도 일상적인 것에 시선을 두고 소소한 것들의 위대함, 아름다움을 성찰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영화 <궤도>처럼 실제 인물을 가지고 극영화를 만들고 싶기도 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삶을 지켜 주세요"

 영화 속 두 주인공 최원균 할아버지와 이삼순 할머니.

영화 속 두 주인공 최원균 할아버지와 이삼순 할머니. ⓒ 인디스토리


영화 속에서 할아버지를 구박(?)하는 감초 역할로 자칫 지루할 수 있었던 다큐에 유머를 가미해준 이삼순 할머니는 촬영이 끝난 후 완성한 <워낭소리>를 보면서 "청춘을 돌려다오~"라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펑펑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원래 말이 많지 않았던 할머니가 "소가 죽어야 내가 편케 산다", "아이고 누구는 싱싱한 영감 만나서 농약도 치는데", "라디오도 고물, 영감도 고물"이라며 촬영 내내 쉴 새 없이 하소연을 쏟아 낸 것은 아들 같은 이충렬 감독에게 자신의 삶을 위로받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었다. 이제 촬영이 모두 끝나고 할머니는 다시 말수가 줄어든 일상의 삶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할아버지도 젊은 소를 길들여 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감독은 일부 언론의 극성과 일부 영화팬들의 과도한 관심 때문에 평화롭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일상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몹시 걱정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도 "두 분 노인들을 멀리서 그냥 지켜봐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소가 죽고 나서도 '촬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나, 그래서 더 빨리 죽은 게 아닌가'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이 영화로 인해서 그분들의 삶 자체가 훼손되거나 구경거리가 되어서는 안되는데….

몇몇 방송과 신문이 두 분이 사시는 봉화마을에 찾아가겠다고 했을 때도 극구 말렸습니다. 그런데도 막무가내로 취재를 갔다 온 이들도 있더군요. 사실 방송을 하면서 출연자들의 삶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병폐를 많이 봤습니다. 이번 만큼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분들을 사랑한다면 그냥 멀리서 지켜봐 주세요."

워낭소리 이충렬 인디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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