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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그들 앞에는 해안을 따라 끝없이 늘어진 길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산책로 옆 거울 마냥 투명한 호수, 적요한 침묵의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은 들판 그리고 우리에게는 낯선 그 대지 위를 터벅터벅 일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굳이 그 험난한 여정을 선택했다. 때로는 원대한 때로는 소소한, 그러나 경중을 매길 수 없는 각자의 소중한 신념과 끌림에 의해.

 

2009년 지금, 대한민국의 젊은 2,30대는 동정 없는 세상의 지옥-그 한가운데에 있다. 억압과 통제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정권과 여당, 꼬투리 잡고 욕하고 떼쓰며 지난날 잘못은 어느새 잊어버린 거대 야당에 이르기까지. 끝을 알기 어려운 경제 불황 속에서 젊은 사람들은 일자리, 아르바이트 하나 제대로 구하기가 쉽지 않다. 꿈은 땅에 떨어지다 못해 스멀스멀 지하로 소멸되어 가고, 그럼에도 찬바람은 역시나 매섭고 거칠다. 느와르 범죄 소설보다 현실이 더 냉정하고 살벌하다. 마냥 놀기에는 불안하고, 그렇다고 마냥 경제회복을 기다리자니 막막한 현실에서 그들은 앞에 거대한 벽이 놓여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앞길이 막막하다면 때로는 우회하거나 일탈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정면 돌파만이 능사는 아니니까. <젊음, 나눔, 길 위의 시간>에 나오는 ‘젊은 그들’의 시간은 한 가닥으로 줄세우던 한국사회에서 일탈해 다른 길을 향해 뻗어나갔다. 책은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해외봉사단 자격으로 개발도상국(파라과이, 우크라이나, 탄자니아, 중국 등)에서 2년여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또는 진행 중인 청춘들의 기록을 담아내고 있다.

 

보석 같은 시간, 빛나는 청춘의 기록

 

수록되어 있는 총 네 편의 여행기는 모두 각기 다른 고유의 빛깔을 뿜어낸다. 파라과이에서의 일상을 차분하게 그려내면서 너와 나의 경계 허물기에 집중하는 글도 있고, 우크라이나의 일상을 집중력 있게 관찰하면서도 날개가 꺾인 것 같은 나라의 쓸쓸한 회한을 그려내는 글도 있다. 또한 편지나 시 같은 형식을 차용해 젊은 여성 특유의 정서를 귀엽게 담아낸 글도 눈에 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건 나머지 한 편, 사진작가 이화진이 쓴 탄자니아에 대한 기록과 풍경이었다. 작가는 강대국과 거대기업 등에 의해 휘둘리며 극심한 빈부격차에 놓인 탄자니아를 보며 시스템과 원조 그리고 착취 등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끝없이 일하면서도 결국 이익은 거대기업과 강대국이 다 가져가고, 결국 가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서민들을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 그렇다고 그는 남의 도움에 의한 발전을 주장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립할 수 있는 여건과 기반 그리고 사람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다. 결국 그 곳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일 테니까.

 

우리가 할 일은 기존의 시스템을 부수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시스템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중략) 정말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면 그들에게 당위성을 이해시키고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서 스스로 바꾸게 해야 한다는 것을.

 

걱정스러운 것은 사파리 내에서의 외국 자본의 문제가 아니라 발전 기회의 박탈과 이로 인한 빈곤의 대물림, 점점 더 벌어지는 빈부의 격차다. <나의 아프리카, 당신들의 아프리카>

 

자칫 허망한 감상에 그칠 수 있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건 바로 그가 행동한 자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좁은 골방에 갇혀 키보드나 두드리는 게 아니라, 직접 뛰어들어 같이 고민하며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자체만으로도 이는 충분히 따스하고 감동적이다. 뜨겁게 타오르는 젊음의 일부, 아니 대부분을 기꺼이 헌신한 이들의 생각과 삶이 기록에 담겨 있어 보는 내내 부끄럽고 또한 흐뭇했다.

 

현실이 마냥 아름답지도, 희망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이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대책 없는 막막함과 길 위에서의 두려움, 공포. 냉정하고 살벌한 현실은 어느새 턱 끝까지 우리들의 숨통을 조인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에 대해 책은 어느 시의 문구를 빌려 말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 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 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책에 수록된 나짐 히크메트의 시 ‘진정한 여행’ 중 일부)

 

끝에서의 시작. 그 때가 비로소 떠나야 할 때라고 말하는 책은 그렇게 흥얼거리며 노래하는 길을 보듬는다. 귀를 기울이면, 가만히 갖다대어보면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도 그 소리가 들린다. 다른 길이어도 괜찮다는 위로, 희망이 보이지 않을수록 한 발 더 움직여야 한다는 희망찬 선언. 그렇게 당신이 내딛은 이 길은 지금도 이렇게 사뿐사뿐, 노래하고 있다.


젊음, 나눔, 길 위의 시간 - KOICA와 함께한 730일

강제욱 외 지음, 포토넷(2008)


태그:#한국국제협력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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