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조선의 뒷골목 풍경>
 <조선의 뒷골목 풍경>
ⓒ 푸른역사

관련사진보기

뒷골목이란 무엇을 뜻할까? 그냥 단어 자체로 봐서 현실에서 저만치 비껴나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향유가 있는 곳일까. 아니면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처절한 삶을 꾸려가는 공간이겠다. 물론 그 과정에서 뭔가 음흉스럽고 잔혹한 일들이 벌어지는 칙칙한 음지라면 더 적확할까. 아무튼 뒷골목은 긍정적이든 무정적인 의미로 쓰이든 간에 그다지 안정감을 주는 뉘앙스는 아니 것 같다.

그 동안 영화나 소설을 통해 뒷골목 풍경을 조명한 경우는 숱하게 많다. 때문에 그 하나하나마다 다 다른 삶의 편린들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져서, 그냥 뒷골목하면 그러한 속에서 선입관으로 각인된 사실을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래서 뒷골목 풍경을 아무리 있는 그대로 그려내어도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시대를 달리해서 조선의 옛 풍경을 상상해 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뭘까? 커다란 궁궐과 왕족들의 우아한 풍채, 도포자락 휘날리며 걷고 있는 양반들의 모습만을 떠올린다면 너무나 긍정적인 생각이다.

역사인식에 관한 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조선시대라고 해서 오직 성인군자들만 세상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허세로 일관했던 양반들의 자리가 양지였다면, 그에 반하는 뒷골목 음지에는 유흥가를 호령한 무뢰배들도 있었고, 투전 노름에 골몰한 도박꾼, 술과 풍악으로 일생을 보낸 탕자들, 족집게 대리시험 전문가, 벼락출세한 떠돌이 약장수, 설렁탕 한 그릇에 조직을 배신한 도적, 양반타도의 기치를 높이 든 비밀결사조직도 있었다.

이는 지금의 세상과도 별반 다르지 않는 무늬다. 옛 조선의 뒷골목을 채웠던 이들의 모습은 우리의 역사가 미처 기록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역사이다. 어쩌면 양반사회를 영원토록 이어가고픈 자들에게 있어서 옥에 티 같은 이야기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은 영웅호걸이 지배하는 것 같지만 그 면면한 역사는 언제나 민초들, 양반과 남성의 목소리에 가려 있던 상놈과 노비, 영성들의 힘이었고, 실제 우리 역사를 만들어간 대다수의 상놈 개똥이, 종놈 소똥이, 여성 말똥이의 손에 의해 꾸려졌다.

그런데 우리 역사 어디에도 그들 삶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이 존재했던 모든 것들의 구체성과 다양성이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 책 <조선의 뒷골목 풍경>은 조선의 뒷골목을 누빈 이름 없는 그들의 생기발랄한 삶의 현장을 그려내고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도둑과 깡패, 놀음판과 술집 등 시시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하찮은 잡동사니 같은 주제, 시시하고 자질구레한 것들을 다룬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흥미' 이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흥미는 그만큼 진지하다. 

조선의 뒷골목의 생기발랄한 삶의 현장 그려내고 있다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왕과 양반처럼 고귀한 사람들 아니면, 홍경래나 임꺽정처럼 무언가 큰 사고를 낸 사람들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는 기억하지 않는다. 지금이라고 해서 다를까? 불과 몇 십 년 지나지 않아 이 책을 읽는 독자 대부분은 역사 속에서 잊혀진 인물이 될 것이다. 이들을 누가 기억할 것인가. 장구한 시간 우리 역사를 만들어간 대다수의 상놈 개똥이, 종놈 소똥이, 여성 말똥이들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준단 말인가. 역사라는 거대하고 엄숙한 담론에 가려진 잊혀진 사람들의 삶, 그들 삶의 리얼리티는 이런 작고 시시한 이야기들 속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p14-15)

그렇다. 이 책의 저자는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사소한 코드들이 거대한 이야기 속에 가려진 또 다른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의 논지에 따르면 양반과 남성의 목소리에 가려 있던 상놈과 노비, 여성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줄 것이며, 서북 사람의 억울한 사연은 어디서 들을 수 있겠는가. 실제 우리 역사를 만들어간 대다수의 상농, 종놈, 여성들은 과연 나날을 살면서 한국 민족임을 의식하고 살았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아미도 '아니요'일 것이다. 단지 상놈으로 종놈으로 여성으로 살았을 뿐이다. 이렇듯 민족이란 이름으로 모두를 뭉뚱그리는 순간 개똥이, 말똥이, 소똥이는 사라진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은 비주류 인생들에 대한 저자의 따뜻한 시선이 녹아 있다. 탕자, 왈자, 도박꾼, 술집 등 '시시한 주제들'에 관심을 쏟은 것 또한 그러한 애정에 기반한 것이라고 본다. 반면 '근엄' '엄숙'으로 치장된 양반과 주류사회에 대한 시선은 냉철하기 그지없다.

그 이면에 가린 허상들을 낱낱이 파헤친다. 그 과정에서 길게는 500년 전, 짧게는 100년 전 삶의 모습이 지금과 별 다르지 않다고 밝히고 있는데, 당시의 문제의식과 부조리, 민중들의 삶의 애환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놓치지 않고 있다.

비주류 인생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

민중의(民衆醫)들의 활약상을 통해 의료혜택에서 소외된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군도의 출현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뿌리 깊은 부조리를, 도박의 성행에서 우연과 불확실성이 똬리를 틀고 있는 세상사를, 타락한 과거장의 모습에서 고시열풍에 휩싸인 일그러진 우리의 모습을, 반촌 사람들을 통해서 돈과 권력의 보유 정도에 따라 거주지가 나누어지는 세태를 짚어내고 있다. 역사란 단지 역사 책 속에만 존재하지는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중의 조광일, 백광현, 피재길, 백범의 탈옥공작을 벌인 불한당의 괴수 김 진사, 최고의 대리시험 전문가 류광억, 반촌 사람 교화에 나선 안광수, 최고의 판소리꾼 모흥갑, 유흥계 누빈 거문고의 명인 이원영, 조직폭력배 검계를 일망타진한 포도대장 장붕익, 검계의 일원이었던 집주름(부동산 중개업자) 표철주 등등은 이 책을 통해 이름 석자와 함께 자신들의 삶을 세상에 알린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책에 인용된 자료들은 조선시대 개인 문집을 비롯하여 <백범일지> <황성신문> <조선왕조실록>까지 매우 광범위하다. 이 자료들을 읽고 해석하는 저자의 자세는 마치 탐정이나 추리소설가의 그것과 흡사하다. 하나의 주제를 꼬투리 삼아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섭렵하며 궁금증을 풀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옛날의 기록들이 생생한 현장보고서로 다시 태어난다.

자료들을 읽고 해석하는 저자의 치밀성 돋보여

예컨대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는 마치 신문의 사회면을 보듯 당시의 사건 사고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왕실과 집권세력의 역사와 이전투구를 설명하는 근거자료로만 인용되었던 <조선왕조실록>의 새로운 면모이다. 역사서나 국문학 관계 서적 속에서 두터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법한 자료들과 기록들도 당시 사회상을 보여주는 생생한 자료로 거듭 살아났다. 스스로의 궁금증 때문에 이 '한심한(?)' 주제들과 관련된 자료들을 갈무리해둔 저자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누구나 이 책의 제목을 읽으면 선입견을 갖게 된다. 왜 그럴까? 언뜻 제목만 보면 암흑가의 존재를 떠올리기도 하고,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스며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게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은 현재 우리 시대들의 자화상 

이 책에는 우리가 역사에 기록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지순한 인생이 담겨있다. 소외된 민중을 위해 일한 사람들, 우리가 모르던 조선인들의 생활 실태를 옛 고서들을 토대로 하나하나 벗겨내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현재 정치가들의 부정부패가 고스란히 그대로 묻어나고, 소위 지식인들이라는 사람들의 흥청망청하는 생활이 별반 다르지 않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알게 모르게 일어나는 입시부정이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폐습이라니….

결국 조선의 뒷골목 풍경은 현재 우리들의 자화상인 셈이다. 다만 향후 100년 후, 우리들의 모습만큼은 그들과 똑같이 점철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 지음, 푸른역사(2003)


태그:#조선, #역사, #인물, #민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박종국기자는 2000년 <경남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한국작가회의회원, 수필가, 칼럼니스트로, 수필집 <제 빛깔 제 모습으로>과 <하심>을 펴냈으며, 다음블로그 '박종국의 일상이야기'를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김해 진영중앙초등학교 교감으로, 아이들과 함께하고 생활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