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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아침을 기억할 수 있을까?

 

10월 12일, 오전 7시가 조금 넘은 시간, 나는 엘리자베스 호텔 식당에 앉아 있었다. 그날 아침, 나는 식당의 토스터기에 식빵 두 장을 넣고 스위치를 누른 다음 진한 티모르 커피를 찻잔에 따른 뒤 식탁에 앉아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협소한 호텔 마당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이른 시간인데도 뜨거운 햇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식당 안에는 같은 호텔에 닷새나 묵다보니 아침마다 식당에서 마주쳐 낯이 익은 유엔 경찰 두 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날마다 켜져 있던 TV는 꺼져 있었다. 일요일이라서 그럴까, 한가롭고 나른한 기분이었다. 토스터기에서 튀어나온 따뜻한 식빵에 버터를 바르면서 문득 나는 나중에 내가 이 아침시간을 기억할 수 있을 지 궁금해졌다.

 

사진에 담긴 풍경은 사진을 보면 보면 기억이 되살아나지만 기억 속에 담긴 것들은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절대로 기억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혹은 여행 일정이 길어지다 보니 감성적이 된 것인지 모르지만 이 날 아침은 다른 날과 특별히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 날은  딜리의 외곽에 있다는 불교유적지를 보고, 딜리 시장을 구경하고 YMCA의 양동화 간사를 만나 인터뷰를 할 예정이었다. 이 날도 EPC의 장근호 이사가 동행했다.

 

오전 9시 30분경, 찾아간 불교유적지는 아무리 봐도 불교유적 같지 않았다. 유적의 형태나 시바여신의 사진이 있는 것으로 보아 힌두교 유적지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정확한 정체는 모르겠다. 절(卍)자 표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유적지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다시 확인하니 절자 표시와 반대였다. 그럼 나치의 표식인가? 그런 건 절대로 아닐 것이고, 그럼 무슨 표식이지?

 

낡고 초라하면서 허물어져 가는 유적지는 인적마저 없어 쓸쓸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런데 이곳에 관광객이 이따금 오는지 유적지에서 놀던 아이들이 우리 일행을 졸졸졸 따라 다니기 시작했다. 낡고 더러운 옷을 입은 아이들은 맨발이었다.

 

우리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이 아이들이 뭐라고 중얼거린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나중에 제대로 알아듣게 되었는데 그 말은 "원 달러"였다. 돈을 달라는 말이었다. 관광객들을 졸라 돈을 얻어내던 아이들이었나 보다.

 

동티모르에 오기 전에 아이들이 돈을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런 말은 딜리 시내를 돌아다닐 때 딱 한 번 들었을 뿐이다. 뚜뚜알라나 수아이로 여행을 떠났을 때 돈을 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을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유적지에서 그런 아이들을 만난 것이다.

 

이 아이들, 원 달러를 계속해서 웅얼거렸지만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돈은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것처럼. 하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유적지가 있는 곳은 위치가 높아 딜리 시내가 내려다보였다. 딜리 시내 안에 있을 때는 도시가 큰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막상 멀리 떨어져서 내려다보니 무척이나 넓어 보인다. 하긴 딜리의 인구가 16만8천이라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할 수 있겠다. 고층 빌딩이 없으니 사람들은 옆으로 퍼지면서 집을 짓고 살 수밖에 없겠지.

 

사람들은 평지에만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산에도 집을 짓고 살았다. 딜리 외곽의 산에도 집들은 여기저기 들어서 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물도 귀한 곳에 자리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 고온다습한 딜리 시내보다는 높은 산이 훨씬 더 시원해서 살기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낡고 초라한 유적지, 그리고 달러 달라는 아이들

 

 

유적지를 둘러보고 우리는 곧장 딜리 시내에 있는 시장으로 갔다. 이 시장, 지금까지 동티모르에서 본 것 중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았다. 딜리에 사는 사람들이 죄다 쏟아져 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좁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장이 늘어서 있었는데 한쪽이 도로를 따라 노점이 늘어서 있었다면 다른 한 쪽은 안쪽에 큰 규모의 시장이 자리잡고 있는 형태였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미로처럼 좁은 길을 따라 상점들이 이어져 있었다.

 

상점과 노점이 뒤엉킨 듯한 시장은 엄청나게 컸다. 옷가게도 엄청나게 많았고, 파는 물건의 종류도 무척이나 다양했다. 과일, 야채, 건어물, 잡화, 그릇, 커피, 곡물 등등.

 

확실히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여야 제 맛이 난다. 가게 사람들은 이따금 손짓을 해서 구경하는 나를 불러 사진을 찍으라고 하기도 했다. 내가 그들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딜리 시장에서 귀금속 상점을 처음 보았다. 진열장 안에 반지며 목걸이 등이 제법 값이 나가 보이는 귀금속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보는 금은방과 비슷해 보인다. 진열된 물건이 아주 많거나 다양하지는 않았지만. 그 가게에서 한 여자가 반지를 고르고 있었다. 나도 신기해서 반지구경을 하고 값을 물어 보았다. 값은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고나 할까.

 

시장을 둘러보다가 잡화점 아래에서 고추와 마늘 몇 개를 늘어놓고 파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이 할머니, 쪼그리고 앉아 나를 쳐다본다. 팔고 있는 물건은 정말 초라하기 짝이 없어서 저걸 다 팔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어린아이가 아이스크림을 파는 수레 옆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것을 보고 값이 얼마인지 물었더니 5센트란다. 아이스크림은 과자 위에 얹어주는데 색깔이 붉다 못해 빨갛다. 두 개를 사서 장 이사에게 하나를 건네주었다. 맛은 밍밍하면서 단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 먹고 나서 장 이사를 보니 안 먹고 쩔쩔매고 있다.

 

이 아이스크림이라는 것, 아무리 봐도 입맛이 당기게 생기지는 않았다. 불량식품이라는 느낌이 팍팍 나고 있었으니까. 먹어도 안 죽는다고 먹으라고 하니 장 이사는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는 듯한 표정으로 그걸 먹는다. 이곳 아이들은 먹고 싶어서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것인데 말이다.

 

아이들의 간식거리는 아이스크림 말고도 또 있었다. 동그란 오뎅 비슷한 것을 꼬치에 꿰어서 소스를 발라서 파는 것이다. 한 아이가 그것을 사먹기에 나도 먹어 볼까 하다가 그냥 지나쳤다.

 

귀금속, 담배, 건어물, 도박판... 없는 것 없는 딜리 재래 시장

 

 

시장의 안쪽 후미진 곳에서 아주 재미있는 것을 보았다. 어느 나라나 도박은 성행하는가 보다. 이런 걸 돈 놓고 돈 먹기, 라고 하나?

 

커다란 네모판 안에 각기 다른 숫자가 써진 칸이 36개가 들어가 있다. 칸마다 둥그렇게 파여 있는데 이 판 안에 둥근 공을 굴려 넣으면, 한참 있다가 숫자 하나에 멈춰 선다. 공을 굴리기 전에 네모판 앞의 탁자 위에 숫자가 써진 종이 위에 사람들이 돈을 건다. 탁자 위의 숫자와 같은 숫자가 써진 칸에 공이 멈추면 따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이 공이 금방 멈추는 것이 아니라 멈출 듯 멈출 듯 하면서 계속해서 이 칸, 저 칸을 넘나드는 것이다.

 

공이 언제 어느 숫자 칸에 멈추나, 지켜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았다. 내가 돈을 건 것도 아닌데 말이다.

 

탁자 앞에 모인 사람들은 딱 한 사람만 빼고 다 남자였다. 도박판을 벌이고 있는 일행은 내가 파악하기로 7명쯤 되었다. 공을 굴리는 사람, 돈을 바꿔주는 사람, 판돈 거는 것을 보는 사람, 네모판 주위에서 판을 보고 있는 사람 등.

 

도박판에 돈을 걸던 여자가 돈을 따자 가방 안에 집어넣는다. 이 여자는 내가 그 자리를 떠날 때까지 계속해서 돈을 걸었다. 전문적인 도박꾼처럼 보였는데 따는 것은 한번밖에 보지 못했다. 이 여자, 혼자 온 것은 아니고 일행이 있는 것 같았다. 돈을 걸면서 도박판에 끼어든 사람들은 얼추 이십여 명이 넘었다. 구경꾼들도 그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사진을 못 찍게 할까봐 눈치를 보면서 사진을 찍었는데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다.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다. 네모판에 공을 굴리는 덩치가 큰 남자는 눈을 내리깐 채 초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판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이 판에서 돈을 벌기는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숫자는 공을 굴릴 때마다 다른 게 나온다. 같은 숫자가 계속해서 나오지 않는다. 짐작이지만 도박판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 돈을 딸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같았다.

 

공은 참으로 유연하게 숫자와 숫자 사이를 넘나들고, 공이 멈출 때까지 사람들은 조용하게 숨을 참고 판을 들여다보고 있다. 진지하기까지 한 분위기다. 하지만 판이 끝나고 돈이 오갈 때는 당연히 시끄러워진다.

 

저 도박판, 불법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만 판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나 구경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내가 넋을 잃고 구경을 하고 있자 옆에 있던 장 이사가 그만 보고 가자고 채근을 한다. 내가 너무 오래 구경을 했나 보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북적거리는 시장을 벗어나서 밖으로 나오자 도로 위를 탱크가 지나가고 있다. 호주군 탱크다. 몸을 밖으로 뺀 호주군인이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일요일 오전에 탱크가 왜 지나가는 거지? 자동차가 지나가고 탱크가 지나가는 길에 마른 먼지가 풀썩인다.

 

활기가 넘치는 딜리 시장에서 꼭 보고 싶은 닭싸움은 끝내 보지 못했다.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녔지만 언제 어디서 하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대신 묶어놓은 수탉만 잔뜩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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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지난 10월 5일부터 15일까지 10박 11일동안 동티모르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태그:#동티모르, #딜리, #시장, #도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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